배우 라미란은 잔잔하다. 누군가의 찬사에도, 비난에도 미동하지 않는다. 지금은 억척스럽고, 코믹한 캐릭터의 옷이 가장 잘 어울리지만, 그 옷을 벗고 언제 새 옷을 입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블랙 슈트는 김서룡(Kimseoryong). 이어커프와 골드 소재 반지는 바이가미(Bygami).

블랙 슈트는 김서룡(Kimseoryong). 이어커프와 골드 소재 반지는 바이가미(Bygami).

카메라 셔터 소리가 멈추면 라미란은 화면으로 자신의 사진을 확인하며 나지막이 한마디씩 툭툭 내뱉었다. 긴장하던 사람들이 일순간 무장해제됐다. 그녀는 예쁘다는 칭찬에 “거짓말하지 마. 누가 봐도 얼굴이 부었는데?”라고 받아 치고, 자존감이 강한 것 같다는 말에“ 이기적이라서 그래요”라고 말했다. 라미란은 난감한 질문에 답할 때 회피하기보다 더 솔직하게 속내를 드러내는 사람이다. 웃기려고 작정하는 게 아니라 너무 솔직해서 웃기는 사람. 그래서 스스로를 우습게 만들지 않는 사람.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쉼없이 개성 강한 연기를 선보였던 라미란은 최근 몇 달간 휴식을 취했다. 그런 그녀가0 1월 방송 예정인 tvN 드라마 <복수자 소셜 클럽>에 합류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생선가게를 운영하며 거친 삶을 사는 ‘홍도희’라는 인물을 맡았다. 억척스러운 성격이 KBS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에서 치킨집을 운영했던 복선녀와 닮았고, 등장하는 여성 인물 중 큰언니라는 점에 <응답하라 1988>의 ‘치타 여사’가 오버랩된다. 그러나 라미란이 보여줄 홍도희라는 인물은 익숙하지만 낯설 것이다. 그리고 홍도희는 라미란의 것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랩 원피스, 귀고리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진주 반지는 피 바이 파나쉬(P by Panache).

랩 원피스, 귀고리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진주 반지는 피 바이 파나쉬(P by Panache).

아직 드라마 <복수자 소셜 클럽> 촬영 전이죠.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말 그대로 푹 쉬었어요. 원래 이전에 들어갈 작품이 있었는데 일이 꼬이면서 생각지도 않게 긴 휴가가 생겼어요. 3월 한 달 동안 스페인을 다녀왔는데 그 이후로 월5부터 3개월 내내 쉬었어요.계획에 없이 쉬다 보니 매일 소파에 붙어서 지낸 것 같아요. 무엇이든 배워서 자격증 하나라도 따둘걸.(웃음) 쉬는 시간을 제대로 즐길 줄 모르고 너무 덧없이 흘려보낸 것 같아요. TV를 너무 많이 봐서 TV박사가 됐어요.

쉬면서 불안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어요?
석 달째가 됐을 때 사람들이 저를 못 알아보고 ‘저 사람 누구였더라?’라고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어요. 그런데 그건 내가 원하는 바이기도 해요. 늘 낯설고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거든요. 현재로서는 실패했죠. 이미 많은 분이 라미란이라는 배우를 다 알아보니까요.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유명해져서 족쇄가 생겼어요. 그걸 깨부수는 것도 힘들 뿐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 됐죠. 이제 풋풋함은 끝난 것 같아요.

사람들에게 <막돼먹은 영애씨>의 라 과장, <응답하라 1988>의 치타 여사로 각인됐어요. 어떤 작품이든 당신보다 캐릭터가 먼저 떠오르는 게 사실이에요.
사람들은 각자 자신이 본 작품으로 저를 기억해요. 다른 어떤 분은 저를 두고 <진짜 사나이>에 출연했던 ‘군대간 아줌마’로 기억하죠. 대중문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많이 알려졌다는 건 성공적이라고 생각해요.

작품마다 매번 변신하고 싶나요?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지만, 잘하는 것과는 다른 거잖아요. 사람들이 라 과장이나 치타 여사를 연기하는 저를 원하고, 좋아하면 당분간은 그런 역할을 맡을 거예요. 언젠가 사람들이 질린다고 생각하겠지만 한 분야의 캐릭터를 잘 구축하는 게 결코 쉽지 않거든요. 이 캐릭터라면 무조건 라미란이 해야 한다는 확신을 줄 수 있는 배우가 되는 건 어려운 일이죠.

예능 프로그램에 나올 때나 인터뷰를 보면 자존감이 매우 높은 것 같아요. 어디에서 기인하는 건가요?
이기심이에요. 저는 자존감이 높을 뿐 아니라 자애심도 높아요. 남을 먼저 생각하거나 배려하기보다는 내가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를 생각해요. 알게 모르게 상처를 주고 욕 먹을 짓도 했겠지만 최대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소신 있게 산 것 같아요. 누군가가 저보고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욕심 없이 되는 대로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에요. 그런데 그 생각마저도 제 욕심이고, 자기 합리화인 것 같아요. 저는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요.

당신은 약점이라 여길 수 있는 것도 쉽게 내보여요. 그래서 더 솔직하고, 얽매이지 않은 사람 같아요.
아버지가 두 살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 혼자 저희 형제를 키우시느라 고생이 많았어요. 형제는 오빠, 언니 둘이 있는데, 다들 너무 바쁘다 보니 저는 자연스럽게 방목된 상태로 자랐어요. 규율을 만들고 ,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었죠. 부모님이 이래라 저래라 했다면 지금처럼 자라지 않았을 것 같아요. 제 아들에게도 세 가지만 지키면 잔소리하지 않아요. 거짓말하지 말 것, 욕하지 말 것, 예의를 지킬 것. 그것만 지키면 하루 종일 게임만 해도 혼내지 않아요. 아들의 시간을 터치하지 않는 거죠.

 

드레스는 에스카다(Escada). 뱅글 팔찌와 귀고리는 피 바이 파나쉬.

드레스는 에스카다(Escada). 뱅글 팔찌와 귀고리는 피 바이 파나쉬.

그 세 가지만 지키면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에이, 그건 모르죠. 나중에 망나니가 될지,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람이 될 지…. 가끔 아들이 거짓말할 때가 있는데 걸리면 많이 혼내요. 저번에는 ‘에이비씨’도 아니고 ‘에이씨’라고 해서 크게 혼냈어요.

인터넷으로 자신의 이름을 검색해보나요?
하루에 한 번씩 검색해요. 그런데 요즘 제가 일을 안 하니까 새로운 기사 가 없어요. 이렇게 잊혀지는구나 하고 생각하지만 저 역시 관객일 때 쉽 게 잊었거든요.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잊혀지는 것 같아요.

기사에 달린 댓글이나 악플을 보면, 신경 쓰이나요? 로그인하면 쓸 수 있나요?
사실 반박하는 댓글도 달고 싶지만 해본 적은 없어요. 그냥 내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된다는 게 재미있는 일인 것 같아요. 나쁜 말도 많아요. ‘제발 TV에서 안 봤으면 좋겠다.’ ‘못생겼다.’ 그 와중에 저를 옹호하는 분들도 있어요. 한 번은 아들 친구가 악플에 댓 글을 달았더라고요. 내 친구 엄마한테 왜 그러냐고.(웃음)

당신은 배우라는 화려한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생활인의 면모도 곧잘 드러내죠. 배우와 생활인 사이의 균형과 선을 잘 지키고 있는 것 같아요.
어느 순간 그 선을 넘거나, 그 선 아래로 내려오는 일도 생기겠죠? 아직 까지는 그 선을 지키고 싶어요. 언제든 그 선이 파괴되는 일도 일어날 수 있겠죠. 억울한 일이 생기거나 마녀사냥의 대상이 됐을 때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한 적도 있어요. 워낙 동료들이 그런 상황에 처하 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우리는 십분 이해할 수 있지만, 대중들은 가혹하 게 비난하거든요. 사람들에게 논란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사과를 하지만 그 대상이 누구인지 잘 모르겠어요. 연예인은 공인이 아니라 유명인일 뿐인데, 도덕적인 잣대가 너무 엄격한 것 같아요. 제가 그런 상황에 닥쳐 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바로 풀겠지만 입을 여는 순간 더 큰 비난 을 받을 수 있으니 침묵할 것 같아요.

영화보다 시청률로 반응을 즉각 확인할 수 있는 드라마를 더 선호한다 는 인터뷰를 봤어요. 안정감보다 적절한 긴장감을 선호하는 편인가요?
세상에 안정적인 일은 없어요. 소일거리로 하루를 보내는 사람도 긴장 속에 살 거예요. 그런데 그러지 않으려 노력해요. ‘될 대로 돼라’라는 마 음으로 마인드 컨트롤을 하죠. 안 그러면 위축되니까요. 연기자 외에 다른 삶을 생각해본 적은 없나요?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없어요. 저도 나름 연기 분야에서는 경력직이잖아 요.(웃음) 캠핑하거나 집 짓는 것에 관심이 있고 좋아하지만, 직업으로 삼 는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그걸 하려면 또 공부해야 하고, 정성을 들여 야 하잖아요. 저는 그냥 계속 하던 거 할게요.

<막돼먹은 영애씨>의 주인공 김현숙이 배우로서 다양한 활동을 하는 당신을 부러워한다는 인터뷰를 봤어요.
그렇겠죠. 10년 동안 영애씨로 살았으니, 고착된 이미지 때문에 다른 작 품을 하는 게 어려울 수 있어요. 영애씨의 캐릭터가 워낙 세니까요. 현숙 씨가 <막돼 먹은 영애씨>로 얻은 것도 많지만 또 잃은 것도 많을 거예요 . 그래서 저에게도 종종 “언니가 나보다 낫다~”라고 말하는데, 저도 라 과 장 이미지 버리려고 다른 거 열심히 하고 있어요.(웃음)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 16에도 출연하나요?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라 과장은 영애씨의 회사 동료니까, 영애씨가 회사를 옮기거나 그만두면 쉽게 없어질 수 있는 역할이에요. 사실 저에 게도 <막돼먹은 영애씨>는 무척 고마운 작품이죠. 시즌이 시작할 때는 촬 영 스케줄을 미리 빼놓아요. 일종의 의리를 지키려는 마음 같은 거죠.

당신은 멜로 연기를 하고 싶다는 열망을 자주 드러내곤 했어요.
작품에서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빠로 주인공의 주변인이 되잖아요. 왜 사랑은 꼭 젊은 남녀 주인공만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어요.누구나 사랑 할 수 있어요. 자식에 대한 사랑이든, 불륜이든, 동성애든 누구나 죽을 때 까지 사랑하고, 사랑받길 원하잖아요. 마흔 살이 넘은 애엄마에게 더 이 상 사랑은 없다고 말하면 너무 슬프지 않나요?

쉬면서 본 멜로드라마나 영화 중에 탐나는 역할은 없었나요?
생각해보니 <비밀의 숲>을 비롯해 멜로가 두드러지지 않는 작품만 봤어 요. 제 나이대의 여자가 할 수 있는 사랑 가운데 하나 정도 해보고 싶어 요. 물론 상대 배우가 젊고, 잘생긴 남자라면 좋겠죠?(웃음) 하도 멜로를 찍고 싶다고 하니까 최근에 시나리오 하나가 들어왔는데 제가 봐도 손발 이 너무 오그라들어서 못하겠더라고요.

담백한 멜로를 하고 싶은 건가요?
차라리 영화 <미저리> 같은 게 좋아요. 방식이 잘못됐지만 집착도 사랑이 잖아요. 남녀가 키스하고 섹스하는 것만 사랑인가요?

최근에 설렜던 적 있어요?
흠… 그냥, 드라마 재미있게 보고 있어요.

연기할 때와 달리 평소엔 잘 동요하지 않는 것 같아요.
되게 지루하죠? 사실 <막돼먹은 영애씨>는 시리즈물이라 톤을 비슷하게 이어가야 해요. 지난 시즌에는 쉬었던 기간이 길어서 라 과장 연기톤이 기억나지 않는 거예요. 대본 리딩하러 갔다가 욕하는 대사가 있어서 그 걸 한번 하고, 바로 감을 잡았죠.

<복수자 소셜 클럽>에서 생선장수 역할을 맡았어요. 제안을 받았을 때 그동안 했던 캐릭터와 비슷해서 주저하진 않았어요?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에서 치킨을 팔았던 복선녀와 겹치긴 하지만, 제 작진이 생선장수 역할로 가장 그럴싸한 사람으로 저를 떠올린 거겠죠 . 제작진 입장에서는 매우 안정적인 선택을 한 셈이에요. 예전에는 장르를 바꿔서 사극을 하는 방식으로 변신을 꾀했어요. 다른 시대, 다른 곳, 다른 옷을 입으면 반복되는 역할이 상쇄되니까요. 나름 머리를 썼는데 지금은 그런 생각 안 해요. 작품이 재미있고, 괜찮으면 하고 싶어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스스로 경계하려 애쓰는 것이 있나요?
예뻐지려고 하는 것, 세월을 거스르려고 하는 것. 저와 동갑인 연예인을 보면 다들 동안인 데다가 관리도 잘했어요. 그런 분들 사이에는 낄 수도 없으니 저는 흘러가는 대로 최소한의 관리만 해요. 어쩌다 점 빼는 정도 죠. 제가 나름 이 영역에서는 경쟁력이 있어요. 다른 언니들은 예뻐서 못 해요. 요즘 저의 라이벌은 영화 <옥자>에서 옥자 목소리를 냈던 이정은 언니예요. 그렇게 치고 올라오는 사람들 때문에 위협을 느끼니 저도 힘 들어요.(웃음)

배우로서 가늘고 길게 가고 싶다는 말도 했죠. 굵고 길게 가는 삶이 더 좋지 않아요?
가늘고 길게 가면 튀지도 않고, 정 맞지 않아요. 안정적이기도 하고요. 튀 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SNS도 안 해요. 사람들이 평소에 내가 무엇을 하 는지 몰랐으면 좋겠어요. 직업 때문에 TV에 나오지만 그 외 시간에는 숨 어 살고 싶어요.

 

골드 스팽글 드레스는 에스카다. 반지는 바이가미.

골드 스팽글 드레스는 에스카다. 반지는 바이가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