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처 에디터가 추천하는 3권의 산문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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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조석의 바람 끝이 차가워졌으니, 올해의 반딧불이와 버찌와 복숭아와 물옥잠화와 수련의 계절은 끝난 셈이다. 밤에는 귀뚜라미가 울고, 달은 더 높이 떠오른다. 곧 서리가 내리리라.’ 장석주 시인의 산문집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는 마치 작은 창으로 작가의 일상을 엿보는 듯하다. 작가가 스스로 ‘인생의 오후’라고 표현하는 이 순간은 뜨겁고 추운 계절이 지난 후의 평화로운 어떤 날 같다. 이 산문집에는 경기도 안성의 시골과 서울 서교동을 오가며 작가가 느낀 소회가 담담하게 담겨 있다. 결혼, 인생, 돈, 시간, 인생의 맛, 사라짐, 밤과 꿈, 시작과 끝, 숲과 걷기 등 작가의 일상이 우리의 일상과 마주쳤다 사라지는 순간, 역시 가만히 웃게 된다.

많은 사람에게 시 읽는 즐거움을 전한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의 시인 박준은 첫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을 냈다. 시집으로는 이례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은 전작이 있기에, 신작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았다. 왜 시집이 아닌가 궁금해하는 사람도 많았다. 산문집 속 글은 작가의 일기 같고, 짧은 글은 시와 같다. 그런데 또 읽다 보면 역시 긴 글도 시와 같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그래도 울 수 없는 것보다는 우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운다는 것은 느낄 수 있다는 것. 박준은 분명 앞으로도 우리에게 우는 법을 잊지 않게 해줄 것 같다. 한때, 전혜린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혜린이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는, 열에 아홉은 어머니가 전혜린의 팬이었다. 나 역시 인생의 책으로 꼽는 <생의 한가운데>를 전혜린의 번역으로 처음 읽었다. 32세의 나이에 자살로 삶을 마감한 전혜린은 당대의 문화 아이콘이었다.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폭풍의 계절>이라는 드라마에서 등장한 작가 역할도 전혜린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혜린이라는 이름은 ‘여류작가’라는 이름 속에서 이내 폄하되고 삭제된다. 박정희는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전혜린이 대표한 교양주의를 “불란서 시집을 읽는 고운 손의 소녀”라 부르며 적시했다. 여성이 쓴 문학과 여성이 읽는 문학은 미문 취향, 낭만적 감상성, 부르주아, 독일 등 서구에 대한 동경, 소녀 감성이라는 이름으로 깎여나갔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어느 순간 전혜린을 지웠다. <문학소녀>를 쓴 김용언은 글을 읽는 여성들이 동일시했고, 또한 인정받기 위해 버려야 했던 전혜린을 통해 ‘문학소녀’를 재평가한다. 바야흐로 전혜린을 다시 읽어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