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셔츠 한 장에 쓰여진 문구의 파급력은 실로 대단하다. 디지털 텍스트에 익숙한 밀레니얼 세대에게 자신의 정치성을 표현하고 브랜드의 정체성을 가장 쿨하게 전하는 스테이트먼트 티셔츠가 주목받고 있다.

 

104현재도 진행형인 국정농단 시국은 분명 많은 이들을 정치에 관심 갖게 했다. 정치라면 슬며시 고개를 돌렸던 에디터 역시 그렇다. 자신의 정치적인 견해를 사적인 자리에서 분명히 밝히는 사람들이 불편했고 패션과 정치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불안한 세상은 이젠 분명하게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한다. 정치적 격변과 사회 불안이 고조되고, 세계를 하나로 모으는 가치가 분열되고 있는 요즘 대중에게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패션을 통해 즉각적이고 강렬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본래 패션이 개인의 취향과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이 쉬워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난여름 영국이 EU(유럽연합)를 떠나면서 패션계는 이를 반대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시블링의 듀오 디자이너 E. 타우츠와 패트릭 그랜트는 ‘In’이라고 쓴 티셔츠를 입고 피날레에 등장했다. 그리고 이제 막을 내린 2017년 가을/겨울 컬렉션에는 아시시와 프라발 구룽이 어디로 치달을지 모르는 국제적 불안에 맞서기 위해 ‘Don’t Give Up the Daydream’(몽상하기를 포기하지 말라), ‘I am an Immigrant(나는 이민자)’ 라고 쓰인 슬로건 티셔츠로 패션 정치학을 펼쳤다.

슬로건을 입다
디지털 시대, 인스타그램의 사각형 화면과 슬로건 티셔츠는 매우 잘 어울린다. 손가락이 훑고 지나가는 무수한 이미지들 사이에 직설적인 문구와 타이포그래피는 그 어떤 설명보다 함축적인 동시에 단도직입적이다. 미국판 <보그> 편집장 안나 윈투어는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는 마크 제이콥스의 셔츠를 입고 마크 제이콥스 쇼에 등장했고, 리한나 역시 힐러리를 지지하는 해시태크(#Imwithher)를 프린트한 티셔츠를 입고 자신의 정치성을 드러냈다. 레이디 가가는 ‘Love Trumps Hate’를 혈서처럼 써 내려간 티셔츠를 입고 트럼프 당선에 대한 반감을 거침없이 표출했다. 뿔이 난 트럼프의 얼굴과 ‘American Psycho’라고 프린트된 티셔츠를 입고 찍은 사진을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리며 더 노골적으로 트럼프에 대한 미움을 드러낸 하리 네프도 있다. 이는 거리에서만의 일이 아니다. 지난 2016년 가을/겨울 컬렉션부터 슬로건 티셔츠는 디자이너들의 감성, 생각 그리고 의식적인 태도를 전달했다. 베트멍의 뎀나 바잘리아는 오버사이즈 후디에 이렇게 적었다. ‘May the Bridges I Burn Light the Way(내가 불태우는 다리가 빛이 되리)’. 이 문구는 할리우드의 드라마 <비벌리힐스의 아이들(Beverly Hills, 90210)>에서 나온 대사이지만 뎀나 바잘리아에겐 파리 테러에 대한 분노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이었다. 그가 쇼를 준비하는 동안 파리의 클럽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테러 말이다. 쇼의 장소로 성당을 선택했고 추모하듯 꽃을 든 모델로 쇼가 시작되었다. 그는 직접 테러라는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이 문구 하나로 테러 직후 충격에 빠진 사람들의 얼굴과 우울한 파리의 풍경이 전해졌다. 이 문구들은 즉각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2017년 봄/여름 컬렉션에도 슬로건 티셔츠의 파급력이 이어진다. 그 바통을 이어받은 이는 디올의 첫 번째 여성 수장이 된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였다. 그리고 그녀가 처음으로 선보인 컬렉션의 주제는 당연하게 ‘여자’였다. 의상은 여자의 몸을 편안하게 하는 동시에 아름답게 해줄 수 있는 요소와 상징이 가득했다. 상징 속에서 ‘세상에 한 종류의 여성은 없다’라는 주제를 분명하게 한 것은 ‘We Should All be Feminists(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라는 문구를 가슴에 새긴 흰 티셔츠였다. 이 문구는 디올 컬렉션을 보는 여자들의 가슴에 여자를 위한, 여자에 의한 것들을 아로새기게 했다. 더불어 여자들에게 다시 일어나라는 혁명적 메시지(‘Dior(r)evolution’이라 쓰인 또 다른 티셔츠의 문구도 한 몫했다)처럼 느껴진 동시에 이 티셔츠를 가져야겠다는 역설적인 소유욕을 불러일으켰다. 이건 개인적인 감상이 아니다. 실제 디올의 슬로건 티셔츠는 판매와 동시에 ‘완판’을 향해 거침없이 순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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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트먼트 티셔츠의 유행
슬로건 티셔츠를 두고 누군가는 ‘꿩 먹고 알 먹고’, ‘누이 좋고 매부 좋다’라고 했다. 메시지도 전하며 상업적인 성공도 거머쥘 수 있는 효자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베트멍의 60만원대 슬로건 후드와 90만원대의 구찌 로고 티셔츠를 사기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연다. 그것과 매우 유사한 1만9천원짜리 티셔츠를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뎀나 바잘리아가 인용한 문구에, 단순하지만 신기하리만큼 룩을 럭셔리하게 만드는 구찌의 로고 티셔츠 구입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 브랜드의 로고가 박힌 흰 티셔츠는 가장 적은 돈으로 그 브랜드의 옷을 입을 수 있는 기회이지만, 브랜드의 입장에서도 소비자의 입장에서도 이는 비합리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누구나 카피할 수 있는 옷을 만드는 쪽도, 보통 면 티셔츠 값보다 수십 배나 비싼 그 옷을 사는 쪽도 말이다. 하지만 글자가 지닌 힘을, 로고가 지닌 아우라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캘빈 클라인으로 거처를 옮긴 라프 시몬스는 컬렉션을 선보이기 직전에 아트 디렉터 피터 새빌과 함께 만든 새 로고를 선보였다. ‘CALVIN KLEIN 205 W39 NYC’! 이는 캘빈 클라인의 초심으로 돌아가고자 한 라프 시몬스의 의지를 담았다.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가 디올에서 ‘J’adior’를 반복한 패턴의 끈으로 슈즈와 드레스를 만들고 새로운 서체의 ‘Dior’을 장식한 가방과 반지를 만든 것은 브랜드의 로고가 지닌 막강한 힘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여기 있노라, 그리고 바꾸노라”를 명명하는 의식. 세린느(Celine)를 맡은 직후 첫 번째 E에 악상테귀를 찍은 피비 파일로와 입생로랑의 심장과도 같았던 ‘Yves’를 과감하게 도려낸 에디 슬리먼처럼. 로고를 입는다는 것은 브랜드의 철학을, 디자이너 크리에이티브의 정수를 입는 것이나 다름없다. 디자이너의 세대교체와 맞물려 이루어진 로고 교체를 홍보하는 수단이 된 로고 티셔츠의 유행은 스트리트 컬처와 만나 그야말로 유행의 꽃을 피웠다. 바야흐로 90년대의 추억이 뭉글뭉글 피어오를 즈음이었다. ‘이것이 프라다이고 구찌이며 루이 비통임을 온몸으로 피력하는, 부를 향한 맹목적인 추앙의 산물, 90년대의 노골적이고 속물적인 취향이었던 로고는 2000년대에 시크라는 단어와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2010년대에 들어서 90년대와 함께 로고의 유행이 다시 돌아와 향수를 자극하며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자, 로고 티셔츠는 스테이트먼트 티셔츠가 되어 하이 브랜드의 기본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샤넬, 구찌, 세린느, 생로랑, 겐조는 매해 로고를 바탕으로 디자인을 조금씩 바꾼 티셔츠를 선보이고, 셀러브리티와 인플루언서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소비하고 홍보한다. 그리고 이들을 따르는 무리들이 그것을 똑같이 카피하고 대중적으로 유행시키며 티셔츠 위에 새겨진 브랜드의 정신을 적극 알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슬로건이나 로고의 유행은 한동안 멈추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정치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즉각적이고 간편한 도구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브랜드의 새로운 정신을 표현하는 적극적이고 효율적인 마케팅 수단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강력한 시각적 효과를 주는 서체는 디지털 미디어에 익숙한 신인류에게 자신을 표현하는 가장 쿨한 방법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