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절 퍼스트레이디들은 한 나라의 지도자인 남편의 정치외교적 신념과 업적을 빛내주는 옷을 입었다. 21세기 퍼스트레이디들은 패션을 통해 그녀들 스스로 한 나라의 소비경제를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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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가장 유명한 샤넬 슈트로 기록된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의 모습.

역사 기록자로서의 스타일 아이콘
세계 역사상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고 오래 기억되는 퍼스트레이 디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백악관에서 그녀의 마지막을 기록한 영화 <재키>가 개봉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충격적인 암살 사건 후 장례 식까지, 그녀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시간임에도 영화 속 재키의 스타일은 찬란하고 아름답다. 무엇이 이 참담한 비극 가운데도 그녀를 흔들림 없는 스타일 아이콘으로 자리하게 하는 것일까? 1963년 11월 22일, 텍사스 주 댈러스에서 카 퍼레이드를 펼친 그날, 퍼스트레이디 재키는 봄꽃 부케처럼 화사한 핑크빛 샤넬 트위드 슈트를 입고 있었다. 네이비 칼라와 더블 금장 버튼의 이 아름다운 샤넬 슈트가 곧 케네디 대통령의 피로 물들여질 것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영화 속에서 재연됐듯, 재키는 피범벅이 된 슈트를 입은 채 남편의 관을 실은 비행기 안에서 린든 존슨의 대통령 수락 선서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그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보게 해야 한다’며 피 묻은 슈트를 갈아입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당시 재키가 입었던 핑크 슈트가 샤넬 제품이 아니라 뉴욕에서 주문 제작한 샤넬풍의 테일러드 슈트라는 증언이 나왔지만, 그럼 에도 가장 유명한 역사 속의 핑크빛 샤넬 슈트로 기록되고 있다. 그렇게, 퍼스트레이디에게 패션은 역사의 기록이다. 그녀들이 옷을 입고 걷고, 서고, 앉아 있거나, 웃음 짓고, 슬퍼하고, 탄식하는 모든 찰나가 역사의 한 순간으로 사진과 동영상에 기록되어 세상에 전파되며, 평가되고, 후세에 전해진다. 영화에서 재키는 악몽 같은 현실 속에서도 스스로를 가다듬고 완벽하게 옷을 차려입으며 말한다. ‘모두가 기억하게 할 거예요. 이 순간을….’ 이 한마디가 퍼스트레이디에게 패션이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해준다. 퍼스트레이디 룩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질 강렬한 메타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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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 자수에서 영감받은 드레스를 입고 한국을 방문한 다이애나.

20세기 퍼스트레이디 룩, 정치외교적 ‘커스튬’
퍼스트레이디 룩의 아카이브는 재키로부터 시작됐다 할 수 있다. TV와 미디어가 대중적으로 보급된 60년대, 재키는 미디어를 통한 이미지 메이킹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영민하게 이용했다. 당시 유행하던 미니멀리즘의 간결한 라인에 화사하고도 품위 넘치는 파스텔 컬러, 진주, 장갑, 모자, 백 등의 액세서리를 세련되게 스타일링하여, 자신만의 ‘재키 룩’을 창조했다. 샤넬, 지방시, 에르메스 등 프랑스의 하이패션 브랜드를 좋아해 사치스럽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대중들은 이전에 본 적 없던 젊고 매력적인 퍼스트레이디의 패션쇼에 매료됐다. 스타일을 통해 전 세계 미디어의 관심을 재키 자신에게 집중시켰고, 외교적으로도 호감도를 상승시켰다. 미디어 플레이에 뛰어나고, 정치적 사안에 관계없이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받은 재키의 인기가 케네디 대통령의 정치적 파워가 됐음은 분명하다. 재키는 스타일로 대중을 움직이고 외교에 영향을 미친, 퍼스트레이디 룩의 창조자였다. 재키 이후로 퍼스트레이디 룩 아카이브의 또 다른 시대를 연 건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비다. 재키가 딱딱하고 고루한 백악관에 우아함을 불어 넣었다면, 다이애나는 권위적인 영국 황실에 친근함과 대중적 세련미를 가져왔다. 재키처럼 옐로, 핑크, 퍼플, 블루 등 달콤한 파스텔 컬러 팔레트를 펼쳤던 다이애나의 80년대 파워 슈트는 ‘파워 우먼’의 이미지보다 는 우아한 기품이 넘치는 ‘소프트 페미닌 룩’에 가깝다. 특히 다이애나는 패션 외교 감각이 남달랐다. 각 나라로 로열 투어를 떠날 때마다 방문국 의 전통 의상 특징을 반영한 스타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태국 방문 시에는 어깨에 긴 숄 형태의 ‘싸빠이’를 걸치는 태국 전통 의상 ‘쑤타이’ 를 모던하게 재해석한 원 숄더 드레스를 입었고, 캐나다 방문 시에는 메이플 프린트의 드레스를 선택했다. 1992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다이애나 는 한복 자수 장식에서 영감을 얻은 슬림한 실루엣의 드레스를 입었다 . 다이애나의 이런 스타일 외교는 영국 왕실에 천문학적인 숫자의 대외 홍보 효과를 선물했다고 평가받는다. 한 나라의 정치외교가 잘 짜인 각본과 연출의 쇼에 비유된다면, 퍼스트레이디에게 ‘옷’은 패션 이전에 정치외교적 ‘커스튬’과 같다. 시대의 트렌드를 반영한 패션 센스와 함께한 국가의 공식 업무를 전달해주어야 한다 . 재키와 다이애나는 이 모든 퍼스트레이디 룩의 매뉴얼을 창조한 리더로, 21세기 젊은 퍼스트레이디들의 뮤즈가 됐다. 재키와 다이애나가 역사에 기록한 풍부한 스타일의 아카이브를 통해, 그녀들만의 새로운 ‘재키 룩’과 ‘다이애나 룩’을 그려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