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스러운 딸기 우윳빛, 세련된 더스트 핑크, 강렬한 진달래빛 꽃분홍까지 핑크 컬러 의상이 겨울을 화려하고 따뜻하게 꽃피웠다. 핑크는 옷차림에 성별의 구분이 무의미해진 21세기에 역설적으로 꼭 필요한 색이다.

 

메인 구찌

여성성이 다시 화두로 떠오른 요즘의 트렌드에서 빠질 수 없는 색은 핑크이다. 한없이 사랑스럽고 부드러우며 여성스러운 핑크라니! 남자와 여자의 색을 나누기 시작한 것은 괴테의 시대였고 전통적으로 분홍은 남성적인 색이었다는 점에서도 ‘핑크 = 여자’라는 공식은 21세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시대 착오적 생각이다. 하지만 분홍이 생동감 넘치며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고 부드럽게 만들어 주는 힘이 있다는 것 역시 잊지 말아야 한다.

 

샤넬-돌체앤가바나 최근 몇 년간 회색빛의 겨울 인상을 파스텔 컬러가 산뜻하게 바꾸어놓았는데 파스텔의 유행이 한풀 꺾인 지금에도 핑크는 여전히 남아 우리의 옷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올 가을/겨울 컬렉션에서 과감하게 분홍 스펙트럼을 꺼내 든 이는 샤넬의 칼 라거펠트였다. 가브리엘 샤넬의 황금기를 함께한 캉봉 부티크 살롱 쇼 형식으로 꾸민 무대는 샤넬의 유산으로 가득했고, 다양한 톤의 분홍 트위드 물결이 무대 위에 일렁였다. 첫 번째 룩부터 심상치 않았다. 블랙과 어우러진 핫 핑크의 조합은 고전적인 스커트 슈트였음에도 도전적인 인상을 풍겼고 그 뒤로 이어진 시폰 셔츠가 곁들여진 올 핑크 룩은 마냥 도발적인 분위기를 발산했다. 가브리엘 샤넬 여사처럼 분한 모델 다마리스 고드리는 톤 다운된 분홍과 장밋빛으로 발색하는 분홍을 직조한 트위드 스커트 슈트를 입고 진주 목걸이를 겹겹이 두르고 등장했다. 이는 우아하고 다정하며 세련된 상류층 레이디의 기품을 드러내기 충분했다. 모델 최소라가 입은 실키한 핫 핑크 롱 드레스는 여성의 부드러움을 드러냈지만 현대적으로 느껴졌다. 그 뒤로 딸기우유 색깔의 연분홍 트위드 룩이 이어졌다. 재미있게도 연한 핑크 룩은 금색 모자와 함께 매치되었는데, 이는수줍은 소녀를 연상시키는 동시에 상당히 귀족적이고 위엄 있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칼 라거펠트가 클래식과 현대적인 교차점에서 찾은 컬러가 분홍이었다는 것은 분홍이 그만큼 현대 여성의 다양한 감정을 전달하기 적합한 매개체였음을 의미한다. 분홍을 잘 입는 여성은 자신감이 넘친다. 시크와 세련미라는 단어 앞에서 사랑스러워도 여성스러워도 괜찮다고 외치는 것, 그것이야말로 젠더리스 세상에서 여성이 지닌 고유의 가치를 더욱 공고하게 하는 것이다. 왜 사랑스러우면 안 되는가! 여성스러운 취향을 지녔다는 것이 유치하고 촌스러운 것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오히려 남성적인 것이 더 우월하다고 인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여성성에 대한 취향은 젠더 이슈를 떠나 취향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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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의 물결은 여러 디자이너에게로 퍼져 나갔다. 구찌의 알레산드로 미켈레 역시 지극히 여성스러운 색으로 여겨지는 분홍의 역설적인 기능을 컬렉션에 부여했다. 귀고리에서부터 코르사주, 퍼 코트, 가방과 장갑, 스타킹과 구두까지 진정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보랏빛이 감도는 핑크로 중무장한 모델이 등장했고, 분홍의 행렬은 빨간색 퍼 코트와 매치된 핫 핑크 테일러드 슈트, 머리가 셋 달린 뱀이 똬리를 튼 핑크색 새틴 원피스, 복숭앗빛 분홍색이 부서질 듯 연약한 여성성을 드리운 시폰 드레스로 이어졌다. 키치한 느낌을 전하는 애시드 핑크를 사용하여 괴짜스러움을 더한 것은 구찌가 핑크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방법이었다. 분홍의 마법은 비단 여성복에서 그치지 않았다. 더스트 핑크에 초록색 장미 패턴이 그려진 슈트를 입은 남성복을 런웨이 위에 세웠고 구찌의 남성 컬렉션에서도 핫 핑크, 셀먼 핑크, 로즈 핑크 등을 곳곳에 배치한 것이다. 이는 분홍이 여성을 상징하는 색에서 벗어나 흰색, 네이비, 검정처럼 그저 하나의 색으로 인정받는 순간!

 

스텔라맥카트니-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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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리터 장식의 아세테이트 소재 선글라스는 40만원대, 미우미우 바이 룩소티카(Miu Miu by Luxottica). 2 스웨이드 소재 펌프스는 가격미정, 프라다(Prada). 3 실크 소재 셔츠는 34만원, 래비티(Rabbitti). 4 메탈 소재 커프스는 가격미정, 샤넬(Chanel). 5 자카드 소재 스커트는 46만원, 푸시버튼(Push Button). 6 울 소재 베스트 코트는 59만8천원, 쟈니 해잇 재즈(Johnny Hates Jazz).

올 가을/겨울 시즌 디자이너들이 선보인 분홍은 장식적인 의상과 현실적인 의상의 간극을 조율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도 했다. 스텔라 맥카트니의 프릴이 달린 저지 드레스나 포츠의 담백한 테일러드 슈트에 더해진 진달래빛의 분홍은 웨어러블한 의상이 화려하고 수려한 장식이 달린 의상에 굴하지 않고 눈길을 끌 수 있도록 도와준 동시에 컬렉션에 생기를 부여했다.

분홍이 유행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일상, 특히 우중충한 회색으로 물든 겨울 풍경에 낙관을 드리운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우리가 핑크를 입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시인 프리드리히 폰 마티손은 핑크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다. “향기로운 모습이 분홍빛으로 떠돌며 행복에 겨운 꿈의 얼굴 짜내네.” 꿈이 있는 곳에는 달콤한 분홍이 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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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소가죽 소재 펌프스는 37만8천원, 슈콤마보니(Suecomma Bonnie). 8 스팽글 장식 브라톱은 가격미정, 프리마돈나(Fleamadonna). 9 여우털 소재 머플러는 95만원, 사바티에 (Sabatier). 10 인조털 소재 코트는 17만9천원, 자라(Zara). 11 태슬 장식 귀고리는 가격미정, 디스퀘어드2(Dsquared2). 12 모헤어 장식의 송아지 가죽 소재 체인백은 1백26만원, 미우미우(Miu Mi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