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노벨문학상은 뮤지션 밥 딜런에게 돌아갔다. 세상을 놀라게 한 수상을 두고 두 문인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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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이 무슨 대수라고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 감흥은 ‘그럴 만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많았던 것 같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가수 밥 딜런’을 소위 ‘문학적 관점’에서 논의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일각에서는 노벨상이 가진 오랜 권위와 신망이 무너졌다는 식의 반응도 나온 것으로 안다. 판단은 각자의 몫이지만, 어떤 지점에선 실소도 나왔다. “문학이라는 타이타닉 호가 침몰하는 기분”이라 개탄한 어느 한국 비평가의 토로엔 ‘문학이 언제 타이타닉 호였던 적이 있던가’라는 의문과 반발이 생겼다. 혹시, 한국 문단은 오랫동안 자기들만의 권위와 지식, 그리고 그로 인한 명예 또는 지적 독점권을 보위하는허 ‘ 공의 성채’를 쌓아오는 도구로 ‘문학’을 명패 삼아온 게 아닌가 여겨지기도 했다. 그 안에 자의든 타의든포섭돼 있는 많은 이들은 그럼에도 자기 자신은 그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도 분명히 있을 테지만, 문학판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겐 어쨌거나한  ‘통속’으로 보일 것이다. 정말 그런 것이라면 이 땅에서 문학은 삶과 세계의 실질과 관련한 것이 아닌, 삶과 세계에서 취할 수 있는 모종의 허영과 허명에 대해서만자 ‘기들끼리’ 떠들어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한 달여가 지났다. 10여 년 전에 출간된 밥 딜런의 자서전이 서점 매대에 무더기로 깔려 있는 것 말고는 더 이상 어떤 논의도 이루어지지 않는 분위기이다. 노벨상 발표 직후, 문학과 유관 또는 무관한 이슈와 사건이 한반도 전체를 뒤덮고 있는 와중에 한동안 침묵하던 딜런 스스로가 수상을 기뻐하고 있다는 뉴스 정도가 인용됐을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수상은 감사하나 그게 내 인생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라고 말하는 게 더 딜런스러울 거라 여겼으나, 내가 그가 아닌 이상 실망도 동의도 할 사항이 아닌 줄 안다.
내가 딜런에 대해 가지고 있는 마음은 꽤나 이중적이다. 그의 노래와 그의 삶에서 드러나는 여러 정신적 편력에 대해선 공감도 하고 존경하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측면으로는 그의 오묘한 자기방어술과 자기기만성에 대해서는 불신도 있다. 그의 삶과 관련한 증언들에는 그가 지닌 이율배반적인 인간성, 간교해 보일 정도로 뛰어난 쇼 비즈니스 감각과 변장술을 비판하는 대목이 많다. 그럼에도 어떤 이의 삶, 그것도 50년 넘도록 자신만의 예술적 성좌를 독보적으로 그려낸 이의 삶을 두고 도덕적 일관성이나 정치적 맷집 따위를 강요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라 본다. 그는 그저 그의 삶을 살았고, 사람들이 그에게 열광했으며, 그 열광 속에서 때론 선지자처럼, 때론 악랄한 모반자로 비치면서 그 자신의 인생을 꾸려왔을 뿐이다. 그에게서 개인적인 피해나 손해를 본 사람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그를 임의적인 취향이나 도덕관념의 잣대로 심판하거나 재단할 수는 없다고 본다.
노벨상은 매년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영광이자 화젯거리이다. ‘ 일개가수’가 그걸 거머쥐었다는 게 누군가에겐 못마땅하고 누군가에겐 통쾌한 일일 테지만, 더 중요한 지점은 이번 수상이 옳고 그르냐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문학은 가장 개인적인 생각과 감수성을 통해 언론이나 학문적 이론이 묘파할 수 없는 세계의 더 깊은 심급을 때론 통렬하게 때론 추악하고 극렬하게 드러내는 작업이다. 그것은 기존의 선악이나 미추 개념을 모두 포함하는 동시에 그것들을 함께 끌어안으며 삶의 다른 지점을 환기시킨다. 그런 점에서 밥 딜런은 그 자신의 굴레와 치욕과 과오까지도 노래에 담아 전 세계로 퍼뜨렸다. 노벨상을 받았든 그렇지 않든, 그리고 노벨상으로 호두를 까먹든 엿 바꿔 먹든 그가 시인인 것만은 분명하다. 내가 확신하는 건 오직 그뿐이다. 글 | 강정(시인)

우리의 위대한 뮤지션에게
어리석은 권위는 자기를 보존한다. 지혜로운 권위는 자기를 둘러싼 의심들을 보존한다. 1948년의 노벨문학상이 평론가들조차 그를 이해하기 어려워했던 첨예한 모더니스트인 T. S. 엘리어트에게 돌아갔을 때, 스웨덴 아카데미는 노벨이 유언한 ‘이상적인 방향’이 낡은 보수성이 아님을 증언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반세기가량이 지난 지금, 그들은 다시 한 번 스스로를 갱신하는 시도를 전면에 내세운 것처럼 보인다. 밥 딜런,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이름과 함께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결정을 두고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질문을 다시금 제기하는 소중한 시도라고 평한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문학(Literature)과 글쓰기(Literacy)의 관계가 중요한 논쟁거리로 부각되어온 최근의 흐름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이 결정적으로 간과한 것은,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질문이 이번 수상을 통해 비로소 제기된 것이 아니라, 이미오래전부터 문학의 유일무이한 본질이었다는 진실이다. 만약 사람들의 주장대로 밥 딜런의 수상이 문학이라는 개념을 둘러싼 질문들을 새롭게 환기시키기 위함이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사실상 2016년의 노벨문학상은 1972년의 하인리히 뵐이 ‘문학적 쇄신을 이루었다’는 평가 속에 마지막 경쟁자였던 귄터 그라스―그는 후에 20세기 마지막 노벨문학상의 주인공이 되었다―를 제치고 수상자로 선정된 것과 마찬가지로, 위대한 싱어송라이터가 아닌 스웨덴 아카데미 자신에게 주어져야 마땅하지 않은가.
물론 이것은 대단히 ‘문학적인’ 정론이며, 여기에서 비롯되는 불가피한 고뇌와 고충이 스웨덴 아카데미를 줄곧 괴롭혀왔으리라 짐작한다. 괴테의 종‘ 소리’와 낭만주의자들의 ‘푸른 꽃’이, 또는 프란츠 카프카의 ‘법’이 그러했듯이, 문학이 꿈꾸는 ‘이상’은 언제나 실패를 전제하는 미완의 숙명을 우리 앞에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고 무질이 말했던 것처럼 오늘의 성취나 열광은 내일의 우리에게는 다소 경악스러울 수밖에 없다. 다름 아닌 노벨문학상의 역사가 이것을 증명하고 있으며, 그것을 넘어설 ‘ 진정으로 위대한 예술’은 단 한 번도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사회에 속한 적이 없다. 그러니 노벨문학상이 걸어온 길 역시, 결국은 무수한 실패들 속에서 가장 빛나는 실패를 골라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하루키나 고은 같은 이름들이 당연한 듯 후보자 명단에 오르내리는 상황에 지쳐버렸을 수도 있고, 자신들의 고뇌를 한낱 도박의 소재로 삼는 이들에게 일격을 가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점을 고려하고도 여전히 부정하기 힘든 사실은, 스웨덴 아카데미가 너무나도 손쉬운 성취에, 그러니까, 누구도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확연한 성공에 어깨를 기대고 싶어 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2016년의 노벨문학상을, 다소 안타까움을 담아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것은 ‘문학’이 아니라 ‘노벨문학상’을 위해서, ‘새로운 시적 표현’이 아니라 ‘위대한 미국 노래의 전통’에 주어졌다고. 글 | 이강진(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