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에 맞는 쇼를 보고 바로 구매하는 새로운 패션 캘린더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전통과 혁신의 스케줄 사이에 환영과 혼돈이라는 물음표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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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19일 선보인 버버리의 셉템버 컬렉션은 청담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지금 구입할 수 있다.

8월의 어느 날, 버버리 홍보팀이 <얼루어>의 사무실을 방문하여 문서 한 장과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지난 9월 19일, 런던에서 열린 ‘셉템버’ 컬렉션의 콘셉트 이미지와 스토리를 담은 책, 의상을 볼 수 있는 아이패드가 들어 있는 상자였다. 버버리는 다른 브랜드들이 2017년 봄/여름 컬렉션을 선보일 때 계절에 맞는, 정확히 크리스토프 베일리의 말을 빌리자면 계절과 무관한 컬렉션을 선보이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얼루어>의 에디터들은 컬렉션이 열리기 전까지 그 어떤 내용도 발설하지 않겠다는 비밀 유지 각서에 서명한 후에 비밀의 상자를 열어볼 수 있었다. 그제야 반세기를 유지했던 체계가 시대의 변화와 어긋나며 뒤로 밀려나고 있음을 피부로 실감했다. 체계를 바꾸어야 할 만큼 대단히 다른 시대가 찾아왔고 에디터도 그 변화의 시대 위에 서 있다고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쇼가 시작되기 전에 어떤 옷이 나올지 기대하던 설렘도, 6개월을 앞서 옷을 만져보고 느껴보는 현장감도,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트렌드를 뽑아내 대중에게 알리는 즐거움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허탈함이 포함되어 있었다.

쇼와 판매 시점의 시간 차 줄이기
그리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9월 19일, 영국 현지 시간으로 오후 7시 30분 버버리는 메이커스 하우스에서 패션의 전통적인 캘린더를 바꾸는 역사적인 막이 올랐다. 그리고 쇼는 전 세계에 생중계 되었다. 리전트 스트리트에 있는 버버리 플래그십 스토어에서도 스크린을 통해 쇼가 실시간으로 상영되었고, 쇼가 끝나자마자 베일이 걷히고 런웨이에 있던 모든 룩을 갖춰 입은 마네킹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쇼를 보자마자 바로 구매할 수 있는 기념비적인 경험을 만끽했다. 런던에서 버버리가 ‘셉템버’ 컬렉션을 발표하기에 앞서 이미 뉴욕에선 톰 포드, 랄프 로렌, 랙앤본, 타미 힐피거, 알렉산더 왕, 타쿤, 오프닝 세레모니, 레베카 밍코프, 바하 이스트가 소비자에게 컬렉션 의상을 지체 없이 공개히는 새로운 시스템을 가동시켰다. 때마침 뉴욕은 9월이라 하기엔 이상하리만큼 더운 날씨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번 패션위크 기간 동안 봄/여름 컬렉션 중 일부 제품을 쇼가 끝난 직후부터 온라인 사이트와 뉴욕의 매장에서 구매할 수 있도록 중도적인 ‘레디 투 고, 레디 투 웨어’를 선보인 마이클 코어스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당신이 봄 시즌 컬렉션 쇼를 감상할 때, 여전히 밖은 따뜻합니다. 당신의 여름을 위해 태닝한 피부는 아직 그대로이고, 대부분의 여성들이 여전히 샌들을 신고 다닐 때지요. 우리 고객은 지금 당장 입을 수 있는 것들을  원합니다.”

뉴욕에서 혁신적인 시스템을 가장 먼저 공표하고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디자이너는 톰 포드이다. 2016년 봄/여름 컬렉션을 온라인 런웨이로 대체한 톰 포드는 지난 2월 돌연 2016년 가을/겨울 쇼를 취소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현시대와 맞지 않는 일정을 운영하고 있어요. 저는 더 이상 구식 시스템에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매장에 옷이 도착하는 시기에 맞춰 쇼를 연다면 소비자는 쇼에 선보인 옷을 바로 구매할 수 있을 테고, 이는 매출 향상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해요.” 그의 생각은 계절, 날씨, 성별, 지역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는 ‘지금’을 상기시키며 즉각적이고 개인적으로 변한 우리의 삶의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 크리스토프 베일리의 메시지와 일맥상통했다. 이 두 디자이너의 발칙한 선언은 다른 브랜드를 동요시켰다. 그들이 시 나우 바이 나우(See Now, Buy Now)를 발표한 뒤 타미 힐피거도 지지 하디드와의 캡슐 컬렉션을 시작으로 이 시스템에 합류할 것임을 밝혔다. 추진력 있는 브랜드들은 지난 2월 2016년 가을/겨울 패션위크 기간동안 이 선언을 조심스레 반영했다. 마이클 코어스는 런웨이 룩 일곱 벌과 각각 두 개의 가방과 신발을, 프로엔자 스쿨러는 여섯 벌의 룩과 하바백의 ‘얼리 에디션’을, 프라다는 까이에와 피오니에르 백을 컬렉션에 선보이는 동시에 판매했다. 그들의 동요는 확신 없는 동의를 의미했다. 하지만 지난 9월 2017년 봄/여름 뉴욕 패션위크가 시작되고, 두 디자이너의 선언이 뉴욕에서는 현실이 되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새로운 시스템의 리더인 톰 포드는 구 포시즌스 레스토랑에서 주요 프레스와 셀러브리티만 초청해 만찬을 즐기며 은밀하게 가을/겨울 컬렉션을 선보였다. 컬렉션이 이루어지는 동안 전 세계 톰 포드 매장은 물론 버그도프, 니먼 마커스 백화점의 톰 포드 매장엔 컬렉션에 선보일 옷들이 비닐이 벗겨지길 기다리고 있었고, 바로 그 다음 날부터 판매를 시작했다. 판매는 순항을 타며 전년 대비 약 15퍼센트 증가되었다는 후문이다. 내년이면 창립 50주년을 맞이하는 랄프 로렌은 일말의 의심도 없이 런웨이-투-리테일이라는 개념으로 옮겨 갔다. 랄프 로렌은 쇼가 끝나고 게스트들이 쇼핑을 할 수 있도록 매디슨 애비뉴에 위치한 플래그십 스토어와 이어지는 무대를 만들었고, 자신의 주특기인 아메리칸 클래식과 웨스턴 스타일의 의상을 두 번의 쇼에 나누어 선보였다. 사실 의상은 새롭거나 특별하진 않았다. 랄프 로렌의 충성심 강한 고객들에겐 당장이라도 사고 싶은 실용적이고 랄프 로렌다운 룩의 행렬이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두 가지다. 시스템의 변화를 이루어내기 위해선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며 이러한 변화는 대형 브랜드에게조차 모험이 될 만큼 위험 부담이 따른다는 것. ‘웰컴 투 나우’라는 슬로건을 내밀며 지난 시즌에 이은 두 번째 가을/겨울 컬렉션을 선보인 타미 힐피거의 컬렉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항구를 놀이동산으로 변신시킨 타미 힐피거는 2016년 가을/겨울 시즌 선보인 첫 번째 쇼의 마린 테마를 연장하여 DNA로 간직해온 아메리칸 클래식에 스트리트적인 현대미를 더했다.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신선한 테마나 룩이 등장하진 않았다. 다만 지지 하디드가 디자이너로 참여한 타미×지지 캡슐 컬렉션의 옷을 입고 오프닝과 피날레를 장식했을 뿐. 그리고 이 의상은 쇼가 끝나고 놀이동산으로 꾸며진 숍에서 바로 구매할 수 있도록 했다. 요즘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테일러 스위프트를 포함해서 말이다. 그래서 타미 힐피거의 상업적인 결과는 성공적이었을까? 대답은 예스다. 우선 이날 현장에서 판매한 타미×지지 캡슐 컬렉션은 모두 매진되었고, 온라인 역시 대부분의 아이템이 하루아침에 완판을 기록했다. 게다가 쇼가 끝나고 매출이 전년 대비 20%나 성장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해준다. 지난 2016년 가을/겨울 시즌부터 다른 브랜드들이 겨울옷을 선보일 때 봄 컬렉션을 재정비하여 시 나우 바이 나우를 시행했던 레베카 밍코프는 올해도 플래그십 스토어 앞 소호 거리로 프레스와 더불어 자신의 고객들을 불러 가을/겨울 시즌 의상을 선보였다. 그들이 새로운 시스템을 유지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실제 레베카 밍코프가 지난 2월에 시 나우 바이 나우를 시행한 후의 매출이 같은 시기인 2015년 2월 매출과 비교해 무려 200% 넘게 성장했고, 올해의 매출 역시 작년 9월의 쇼 직후 판매량보다 168%나 올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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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미 힐피거가 2016년 가을/겨울 컬렉션에서 선보인 타미×지지 캡슐 컬렉션 코트는 국내에서도 바로 구입 가능하다.

창의력과 시간 사이의 딜레마
사실 이러한 변화는 맞고 틀렸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러한 때가 왔음을 의미한다. 디자이너들은 너무 지쳐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버버리의 크리스토퍼 베일 리의 경우만 해도 매년 네 번씩 남성과 여성 컬렉션을 열어야 했고 브릿, 런던, 프로섬으로 나눈 라벨을 모두 책임져야 했다. 비단 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디자이너들은 메 인 컬렉션 이전에 프리 컬렉션이나 리조트 컬렉션을 만들어야만 한다. 이는 바이어들의 예산의 70~80%를 차지할 만큼 판매를 책임져야 할 영역이고 실제로 우리가 제철에 사 입는 대부분의 옷들이기도 하다. 메인 컬렉션은 어떠한가? 3월에 쇼를 선보이면 이 옷은 7월이 되어서야 매거진에 실리고 9월부터 본격적인 판매에 들어선다. 미국 시장을 기준으로 10월 추수감사절 직후면 세일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정상가로 판매되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디자인을 해야 할 범위는 늘어만 간다. 그뿐인가? 공개된 후 소셜 미디어를 통해 세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쇼 룩은 더 이상 새롭지 않다. 정보가 빠르게 확산되는 현상은 패스트 패션 브랜드나 세계의 로컬 브랜드들은 카피 제품이 소비자를 먼저 찾는 기이한 현상까지 불러들였다. 6개월이 지나 제품이 매장에 도착했을 때 소비자들이 느끼는 식상함은 생각보다 심각하고 판매와 동떨어져 남 좋은 일만 시키는 쇼에 자본과 인력을 낭비한다는 주장은 꽤 설득력 있어 보인다. 새 컬렉션을 본 후가 소비자들의 구매욕이 가장 충만할 때라는 것은 앞에서 밝힌 숫자가 잘 말해주지 않는가! 그런데 왜 이 정도의 당위성과 성공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모두 이 시스템에 동참하지 않았는가?

숫자 공식이 승리했다고 미래를 단언하기에는 이르다. 모두 이 변화를 반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파리와 밀라노는 뉴욕과는 상당히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유럽의 럭셔리 하우스들이 포함되어 있는 파리 컬렉션을 담당하는 파리의상조합협회와 이탈리아 국립패션상공회의소가 만장일치로 시 나우 바이 나우에 반대 의사를 표했다. 협회장인 랄프 톨레다노는 현명한 고객이라면 아이템이 출시되길 기다리는 것에 이미 익숙하며 기다림이 오히려 욕망을 불러일으킨다는 말로 그들의 생각을 전했다. 또한 일정 수준 이상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 장인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제작하는 시스템 아래에선 시간을 단축시켜 시즌을 앞당긴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SPA 브랜드의 카피 제품을 피하는 완벽한 방법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창조의 질이 떨어질 것임을 염려했다. 이탈리아 국립패션상공회의소 회장 카를로 카파사 역시 이렇게 동조한다.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기 위해선 품질과 비례한 제작 시간이 필요하죠. 우리의 소비자들은 창의적이고 완성도 높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선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기꺼이 기다릴 의사가 있어요.” 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자체 생산라인과 유통망을 지닌 대형 기업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점 역시 이 흐름을 가로막고 있다. 소규모의 패션 브랜드와 독립 디자이너들은 새로운 시스템에 정착하기까지 혹독한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소비자가 쇼를 본 후 바로 제품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은 미리 쇼를 보고 물건을 고르고 바이어와 트렌드를 읽고 화보를 촬영해야 하는 에디터들에겐 어떤 의미일까? 결국 어떤 방법이 되었든 이들은 소비자들보다 비밀스럽고 은밀하게 컬렉션의 의상을 이전처럼 미리 보게 될 것이다. 버버리가 쇼가 열리기 한 달 전 컬렉션 룩이 담긴 아이패드를 들고 <얼루어>의 사무실을 방문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비밀유지 각서를 쓰고 엠바고 기간을 계산하는 골치 아픈 시간들을 보내야 한다. 버버리 하나가 아닌 모든 브랜드의 엠바고를 기억한다는 것이 가능하긴 한 걸까? 게다가 바이어와 에디터들이 좋아하지 않는 룩은 컬렉션에서 빠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 이야기는 잘 팔릴 확률이 검증된 상업적인 옷들만이 판매대에 오르게 될 것이고, 이는 패션의 창의력을 위해하는 위험한 발상이기도 하다. 톰 포드는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한 후 그 방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쇼의 시간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장소를 뉴욕으로 정해야만 했죠. 왜냐하면 상품을 8월에는 진열해야 하거든요. 물론 (뉴욕 패션위크가 열리는) 9월 7~8일까지는 괜찮아요. 하지만 (패션위크가 9월 말, 10월 초에 시작하는) 파리에서 쇼를 한다면 주요 제품을 판매할 수 있는 기간을 3~4주가량 놓치게 되죠. 한 가지 대안은 (2월, 7월에 열리는)쿠튀르 기간에 쇼를 여는 거예요.” 전통적인 시스템의 허점을 지적한 베트멍 역시 앞으로 남성 컬렉션이 끝나고 여성 쿠튀르 컬렉션이 이어지는 사이에 남녀를 통합한 두 번의 컬렉션을 선보일 것이라고 발표한 것을 보면 새로운 시스템을 위해 디자이너들이 결국 쇼의 시기를 바꾸어 문제를 점차적으로 해결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그 어떠한 환경에도 적응력이 빠르고 강한 개체는 살아남는다는 생존의 법칙은 언제나 유효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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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나우 바이 나우를 시행한 톰 포드의 컬렉션 중 한국에 바잉된 의상과 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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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코어스의 2017년 봄/여름 컬렉션 중 바로 구입이 가능한 드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