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 사이즈의 피규어를 손에 넣고자 먹지도 않는 햄버거를 네댓 개씩 사고, 좋아하는 캐릭터 얼굴이 새겨진 쿠션 팩트를 모으는 시대다. 매달 한정판 아닌 한정판 전쟁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든다. 대체, 컬래버레이션이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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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서 첫 번째로 손에 넣은 컬래버레이션 화장품은 2008년 맥이 디즈니와 함께 출시한 컬러 립밤이다. 요즘 한정판처럼 스케일이 큰 것도 아니고, 미스 버니, 데이지(도널드 덕의 여자 친구) 등 미키 혹은 미니마우스처럼 메인 캐릭터도 아니지만 불티나게 팔린 걸로 기억한다. 포털사이트의 온라인 동호회에서는 어느 매장에서 어떤 컬러를 운 좋게 손에 넣었다는 득템의 승전보를 알리는 게시물이 연일 올라왔고, 뜯지도 않은 상품을 웃돈 주고 되파는 것도 이때 처음 등장했다. 나 역시 통통한 아기 입술을 만들어준다는 딸기우유 핑크 컬러의 데이지 데이즈 립밤을 갖고 싶어 발을 동동 굴렀는데, 전 매장 품절은 물론 맥에서 촬영용으로 준비한 제품도 몇 개 없는 터라 도무지 손에 넣을 수가 없었다. 결국엔 컬러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배의 책상에서 굴러다니던 걸 졸라서 선물받은 후, 행여나 긁힐까 상자에 넣어 보관하던 그 립밤은 아까워서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누렇게 변색된 채로, 몇 번의 이사 끝에 사라져버렸다. 화장품 하나로 그럴 일이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는 ‘한정판’ ‘컬래버레이션’이라는 개념도 제대로 없을 때였다.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가 그려진 화장품을 쓸 수 있고, 서두르지 않으면 손에 넣을 수 없다는 초조함은 그 제품을 향한 열망을 부채질했다. 그 이후로도 맥의 헬로키티와 원더우먼, 심슨 등 애간장을 녹이는 컬래버레이션이 줄을 이었고, 몇 번의 품절 대란을 경험한 사람들은 유행과 맞물린 특정 컬러를 여러 개씩 사재기했다가 되파는 신풍속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캐릭터 제품은 아니지만 뷰티 마니아 사이에 역대급 컬래버레이션으로 두고두고 회자되는 맥의 헤더렛 컬렉션은 립스틱을 1cm씩 잘라서 몇 만원씩 웃돈을 주고 파는 ‘소분’ 문화를 창조했을 정도다. 화장품이 차고 넘치는 뷰티 에디터인 나 역시 몇몇 컬렉션은 남 주기 아까운 ‘소장템’임을 고백한다.

협업, 열풍을 넘어선 광풍
협업 풍년이다. 뷰티 업계뿐 아니라 패션, 인테리어, 생활용품, 심지어 패스트푸드까지 온통 협업 전쟁이다. 새로운 디저트들 사이에서 인기를 잃어가던 던킨 도너츠가 무민 인형을 끼워 파는 프로모션 한 번으로 핫한 브랜드로 다시 떠오른 것이나, 슈퍼마리오나 미니언즈 등 키덜트의 취향을 완벽히 저격한 사은품 덕분에 웰빙 트렌드를 거스르고도 매장 앞에 손님들을 줄 세운 맥도널드 해피밀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사람들은 무민 인형이 남아 있는 매장 정보와 박스째 구입한 도넛 박스를 SNS에 올려 공유하고, 해피밀 컬렉션을 모두 손에 넣은 사람에게 경탄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그동안 키덜트라고 하면 나이가 들었는데도 철없이 인형이나 장난감을 사 모으는 ‘오덕’쯤으로 여기고 손가락질했지만, 이제는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완벽히 자리 잡았다. 이것은 한편 SNS의 발달 덕분이다. 나 혼자 모으고 좋아하던 은밀한 취미에서 자랑하고 공감을 이끌어낼 만한 것으로 인식이 바뀐 것. 여러 가지 뷰티, 패션 한정판 중에서도 캐릭터 협업 제품들은 오리지널 피규어에 비해 비교적 가격이 저렴하고, ‘사진발’ 역시 잘 받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브랜드들이 컬래버레이션 시장에 앞다투어 뛰어들고 목을 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제는 브랜드마다 매년 두세 번의 협업 컬렉션을 진행하는 건 관례가 되었고, 올해는 협업 컬렉션이 그 정점에 달한 듯하다. 맥과 트롤, 미샤와 라인 프렌즈, 이니스프리와 폴 프랭크, 비욘드와 앨리스, 더페이스샵과 카카오 프렌즈, 아리따움과 바바파파, 데메테르와 무민 등 모두 다 손에 꼽기 힘들 정도인 데다, 무민, 바바파파, 카카오와 라인 프렌즈처럼 인기 있는 캐릭터들은 브랜드를 갈아타며 끊임없는 협업 제품을 선보이기도 한다. 신규 고객 창출이 어려운 요즘 같은 불경기에 캐릭터로 소비자의 마음을 일단 움직인 다음, 제품력으로 승부를 보자는 것이 정해진 패턴이다. 특히 가격이나 제품군에서 큰 변별력을 갖기 힘든 중저가 브랜드 사이에서 이러한 경향은 두드러진다. 물론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웬만하면 중박은 간다는 게 업계의 속설. 한동안은 컬래버레이션 전쟁이 계속될 거라는 말이다.

끊임없는 밀당의 결과
대부분의 협업 컬렉션은 뷰티 브랜드에서 어울리는 협업 파트너를 찾은 다음 러브콜을 보내 이루어진다. 이때 브랜드와 잘 어울리는 이미지를 갖고 있고, 타깃 소비자가 선호하는 캐릭터인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경쟁 브랜드에서 다룬 적 없는 희소성 있는 파트너라면 더욱 좋다. 또, 이미 경쟁 브랜드와 협업을 했더라도 반응이 꾸준히 좋았다면 협업 대상이 된다. 최근 홀리카홀리카에서 선보인 캐릭터인 구데타마가 좋은 예. 귀여운 달걀 캐릭터로 국내에선 비교적 신선한 캐릭터인 데다 친근한 매력으로 2030세대의 공감을 이끌어내 좋은 반응을 얻었다. 미샤의 라인 프렌즈나 더페이스샵의 카카오 프렌즈도 마찬가지다. 삼복더위에 수백 미터의 대기 줄을 세울 정도로 인기인 메신저 캐릭터들은 뷰티 브랜드 협업에서도 강세다. 매일 쓰는 이모티콘 속 캐릭터가 친근감을 주기 때문이다. 미니언즈처럼 영화로 인기 몰이를 한 직후 뷰티 컬렉션을 론칭하는 경우에도 소위 ‘약발’이 먹힌다. 갖고 싶을 때 ‘짠’하! 고 등장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발 빠른 협업에 놀라겠지만, 사실은 이미 수개월, 혹은 수년 전부터 공들인 프로젝트일 가능성이 높다. 처음 협업을 진행하는 신규 파트너라면 준비 기간은 최소 3개월 이상 소요된다. 화장품 브랜드와 협업 대상 브랜드 상호 간의 의견 타진이 이루어져야 하고, 캐릭터를 사용한다면 패키지만 바꿀지, 혹은 컬러나 제형까지 캐릭터와 연계해서 제품을 생산할지에 따라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파트너를 선정하고 제품을 개발하는 것은 어느 정도 도박에 가깝다. 올해 가장 기대되는 컬렉션 중 하나인 ‘토니모리×포켓몬스터’는 포켓몬GO가 뜨기 한참 전인 지난해부터 이미 계약을 맺고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고 한다. 포켓몬 열풍을 확인하고 뒤늦게 수많은 뷰티 브랜드가 러브콜을 보내고 있지만, 답신을 받는 데만 한 달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니 토니모리 입장에서는 로또 당첨이나 다름없는 행운을 잡은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맥은 컬래버레이션이라는 것을 하나의 현상으로 자리 잡게 한 대표적인 브랜드다. 입소문이나 화제성, 판매량 등을 모두 고려해도 컬래버레이션 컬렉션 중 톱 10 안에 여러 개의 이름을 올릴 만큼 의미 있는 협업을 진행해왔다. 맥은 하나의 컬렉션당 최소 2년 정도 준비 기간을 거쳐 패키지와 로고 디자인은 물론 해당 파트너와 맥의 아이덴티티를 살릴 수 있는 컬러, 질감까지 완벽하게 선보인다. 만약 당사자가 단순한 캐릭터가 아닌 셀럽이나 디자이너라면, 그들이 선호하는 내용이 고스란히 화장품에 담긴다. 스타일 블랙의 미네랄라이즈 아이섀도나 디스퀘어드의 스틱 섀도처럼 컬래버레이션만을 위한 새로운 제품군이 추가되기도 한다. 헬로키티나 심슨처럼 인기 캐릭터와의 협업 제품이 출시되는 날이면 백화점 입구는 물론 건물 밖까지 줄을 설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뤄 종종 H&M의 디자이너 컬렉션과 비교되기도 한다. 매달 두세 가지의 컬렉션을 출시해 한정판 아닌 한정판이라는 볼멘소리를 들을 때도 있지만, 이들의 집중도를 감안하면 실로 놀랍다. 매년 수십 개의 협업을 동시에 기획하고 진행한다는 얘기니까. 단기적인 수익보다는 아티스트 브랜드라는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고 소비자들의 흥미를 이끌어내는 것과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데 큰 의의를 두기 때문에 컬래버레이션 각각의 흥망성쇠에 흔들리지는 않는다고 덧붙인다. 이달 출시를 앞두고 있는 SF의 클래식인 <스타트랙> 컬렉션 역시 입술이나 눈에 바르면 외계인처럼 보일 것 같은 생소한 컬러와 텍스처를 담았지만 벌써 마니아들은 정보를 발빠르게 공유하기 시작했으니까 말이다.

협업, 양날의 검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협업 컬렉션이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소위 대박 컬렉션으로 손꼽히는 ‘맥×헬로키티’는 품절 사태를 일으키면서도 당시 마니아들 사이에서 ‘블랙 키티’라는 오명을 얻었고, 국내에서 인지도가 높지 않은 파트너와의 컬렉션은 기간이 끝나면 소리 소문 없이 매장에서 자취를 감추기도 한다. 최근 LG생활건강에서 선보인 ‘보닌×원피스’ 컬렉션도 캐릭터의 인기에 비해 크게 눈길을 끌지는 못했다. 반대로 지나치게 인기가 높은 캐릭터의 경우 브랜드를 갈아타거나, 심지어 같은 달에 동시에 여러 개 브랜드에서 컬래버레이션 제품이 쏟아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어떤 브랜드와 만나느냐에 따라 완성도가 달라지기 때문에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의 컬렉션 출시일을 순서대로 기억했다가 간만 보는 소비자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오는 족족 구입했다간 집에 같은 캐릭터의 쿠션 팩트만 서너 개 모이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출시되는 제품 중 평균 70% 이상은 소진되고 유명 캐릭터의 경우 처음 준비한 물량은 대부분 품절된다는 것이 브랜드 관계자들의 전언. 하지만 대중들이 좋아할수록 라이선스 비용이 비싸지는 것도 문제다. 전 세계가 열광하는 유명 캐릭터의 경우 많게는 15%까지 라이선스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새로운 디자인의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공장설비를 다시 하는 것까지 고려하면 브랜드 입장에서는 크게 남는 게 없는 장사다. 여기에, 여러 곳에서 동시에 러브콜을 받는 파트너라면 계약조건을 좀 더 꼼꼼하게 따지는 것은 당연할 일. 디자인을 결정하고 수정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갑질’이 발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당장의 매출보다는 신규 고객의 유입이 목적인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진행하게 된다. 또 1회성으로 진행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 1년 계약을 맺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하나의 캐릭터로 최대한 많은 횟수의 컬래버레이션 제품을 출시해 판매하는 것이 브랜드에게는 이익이다. 때문에 첫 번째 컬렉션이 성공하면 재빨리 시즌2, 시즌3를 준비해 물량공세를 펼친다. 한데, 많은 예산과 노력을 쏟아부은 협업이 별 반응이 없다면? 한마디로 그 시즌 장사는 공치는 거나 다름없다. 고정적인 매출이 적은 브랜드가 무턱대고 컬래버레이션에만 집중하는 건 도박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성공은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고, 브랜드 입장에서도 ‘이제 캐릭터 약발이 끝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생각보다 많은 소비자가 캐릭터 컬래버레이션에 긍정적으로 반응한다. 막상 출시하면 기존 제품보다 인기 있는 경우가 더 많고, 캐릭터 선정만 잘해두면 더 많은 소비자에게 브랜드를 알려 인지도를 높이고 매출로 고스란히 이어지기 때문에 협업을 포기할 수 없는 것. 소비자 입장에서는 캐릭터의 향연을 즐기되 현명하게 소비하는 것도 필요할 터다. 기분에 따라 한두 번은 지갑을 열 수 있지만 매번 캐릭터만 보고 구입할 수는 없는 일이다. 캐릭터 뒤에 숨겨진 제품력 또한 꼼꼼히 따져보란 얘기다. 그러다 보면 캐릭터에 가려진, 브랜드의 숨겨진 내공을 발견하는 기쁨도 느끼게 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