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온갖 상을 휩쓸었을 때, 손열음의 나이는 스물다섯이었다. 그리고 올해 서른이 된 손열음은 그 어느 때보다 바쁘다. 8년 만의 레코딩 앨범을 냈고, 자신의 이니셜을 딴 기획사를 설립했으며, 평창대관령음악제의 부예술감독을 맡았다. 젊은 음악가의 이토록 용기 있고 과감한 행보에, 우리는 박수를 보낼 준비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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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열음은 몇 년 전부터 하노버에 머물고 있다. 에세이 <하노버에서 온 음악 편지>를 펴내기도 한 그의 말에 따르면 하노버는 엄청나게 한가로운 도시다. 요즘은 시내에 애플스토어도 생기고 조금 번화했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그의 고향인 강원도 원주는 어떨까? “시끄럽지 않고 느긋한 도시죠. 가족끼리 식사할 때는 늘 한우를 먹는데 엄마 친구분들이 하시는 ‘화개장터’와 ‘고려정’을 주로 찾아요. 두 곳 다 대박 나세요!” 8월 9일까지 열리는 2016 평창대관령음악제의 부예술감독으로 부임한 그는 기자회견에서 “우리 동네 축제에 일조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고향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 만큼, 손열음은 기사마다 따라다니는 ‘한국인’, ‘최초의’ 등의 수식어에도 별 부담을 갖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에서 대학 교육까지 받고 자라 세계 무대에 진출한 1세대 음악가라는 것에 자부심을 갖는다. 그러니 세계를 누비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서울에서, 대관령에서, 분주히 새로운 일을 벌이는 것은 그에게 자연스러운 결정일지도 모른다. “정명화, 정경화 예술감독님이 저를 부예술감독으로 임명하신 것은 페스티벌에 젊은 감각을 불어넣으려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세계 각지에서 열리는 페스티벌에 대해 공부하고 있어요. 일종의 모니터 요원이라고나 할까요?” 매년 여름 열리는 평창대관령음악제는 전 세계 클래식 연주자들이 모여드는 음악제로 올해 13회를 맞이했다. 남성 중심적인 한국사회에서 음악제의 감독과 부감독이 모두 여성이라는 사실은 꽤 흥미롭게 느껴진다. “그러게요. 전혀 생각지 못했어요. 아는 분이 한국의 세계 경쟁력은 여자들이 책임지고 있다고 하신 적은 있어요. 한국 하면 여자 골퍼, 여자 바이올리니스트라면서요, 하하.”

지난해 쇼팽 콩쿠르에서 조성진이 우승을 거머쥐면서(2011년, 손열음이 준우승을 한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조성진은 3위를 기록했다) 한국 클래식계도 덩달아 활기를 띠었다. 하지만 연주자의 숫자에 비해 클래식 연주자를 위한 마케팅과 공연 시스템은 여전히 부족한 상태다.“ 기획사를 세우면 어떻겠냐는 것은 아는 분의 아이디어였어요. 언젠가는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이었기에 기꺼이 참여하기로 했죠. 한국 클래식 음악계의 인프라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니까요. 최근에는 클래식뿐 아니라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대중화를 위한 노력이 꾸준히 있는 것 같아요. 양과 질은 뗄 수 없는 관계니까 지금은 이런저런 다양한 시도가 나오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다만 대중이 좋아할 만한 것뿐만이 아닌, 취향의 폭까지 넓힐 수 있는 시도가 곁들여진다면 더 좋겠죠.”

고등학교를 다닐 나이에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진학한, 남들보다 조숙한 천재에게 서른이 됐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이십대 중반의 저와 비교한다면 당연히 변화가 있죠. 건강을 좀 더 챙겨야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마음은 좀 편해졌어요. 아마 여자분들은 많이 공감하실 텐데 20대 싱글 여자로 사는 동안 괜히 위축되고, 그렇지 않아도 될 때조차 생글거렸던 게 사실이에요. 이제는 좀 더 열심히 내 갈 길을 가려고요.” 손열음은 자신을 ‘온오프 모드형’ 인간이라고 소개한다. 오프 버튼이 켜진 날은 밥도 잘 먹지 않고, 잠도 대충 자고, 아무하고도 연락하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온몸과 마음을 바쳐 일할 때가 더 많은 그에게는 꼭 필요한 시간이다. “수많은 도시를 다니는데 크고 붐비는 도시는 대체로 다 별로고 작고 사람이 별로 없는 한적한 도시는 거의 다 좋아하거든요. 여름휴가는 3년째 이탈리아의 작은 섬에 있는 호텔 한곳을 찾고 있어요. 대인기피증인가? 저도 사람이면서 웃기죠?”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아낌없이 지지한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이의 재능에 놀랍도록 민감하게 반응하니까. 손열음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는지 궁금했다. “제일 신나는 순간 중 하나가 남의 재능을 발견할 때예요. 아주 어려서부터 그랬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미국에서 피아니스트 랑랑을 만났을 때 당시 열네 살이던 그의 재능에 홀딱 반해 연주를 녹음해온 카세트테이프를 반 친구들에게 틀어주곤 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 친구들은 무슨 죄로 그걸 듣고 있어야 했나 싶네요. 요즘도 똑같아요. 주변에 빛나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발벗고 나서 소개하고 싶어 하죠” .클래식 음악계를 떠나서 그가 흥미롭게 지켜보는 대중문화 아이콘은 아이유다. “옛 노래를 커버한 것들을 몇 곡 들어본 적이 있는데 천부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리에 바르디 선생님이 종종 하시는 말인데 음악 신동은 크게 세 종류가 있대요. 기술, 음악성, 그리고 정신(Spirituality)이 나이를 초월하는 유형이요. 아이유 씨는 세 번째 같아요.”

손열음은 올해 레코딩 앨범< 모던 타임즈>를 냈다. 2008년 발매한< 쇼팽: 피아노와 현을 위한 녹턴> 이후 8년 만이다. 예전에는 레코딩 앨범을 남긴다는 것이 연주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다. 아니, 오히려 싫어했다. 텅 빈 스튜디오에서 부분부분 한 음도 안 틀릴 때까지 수십 번씩 반복해가며 녹음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다르다. “음악회에서는 그날의 연주 자체가 살아 숨쉬는 유기체가 되는 날도 있어요. 반면 레코딩에서는 마디마디 아주 상세하고 낱낱이 작곡가의 의도를 파헤쳐가는 작업이 가능하죠. 그 나름대로의 맛이 있다는 걸<모던 타임즈>를 녹음하며 처음 느꼈어요. 음악의 시간을 붙잡아버린다는 레코딩은 여러모로 역설적이지만, 그렇게라도 붙잡지 않으면 그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버리고 끝이잖아요.” 손열음의 연주 실황 영상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모차르트 협주곡 21번을 연주하는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영상이다. 200만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이 영상을 감상했다. “불과 얼음의 연주자라는 감사한 표현도 들었지만 사실 제가 좋아하는 연주는 이런 음악이에요.” 최근 무대 위에서 경험한 가장 마법 같은 순간 역시 지난 4월, 모차르트의 곡을 연주하던 중에 찾아왔다. “모차르트가 남긴 마지막 협주곡 27번을 연주하던 중이었어요. 평소에도 경쾌한 듯 정체불명의 어두운 분위기에 사로잡힌 곡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날은 그 양극의 분위기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느낌이었어요. 유쾌하다가도 조용한 부분에서는 객석까지 모두가 하나 되어 순식간에 숨죽이는 걸 느꼈죠. 그런데 그런 마법 같은 순간들은 글로 표현하면 늘 너무 보잘것없어져요. 정말 너무나….” 손열음은 노부스 콰르텟과의 국내 공연을 오는 8월 말 앞두고 있다. 어쩌면 말로 설명할 수 없다는 그 마법 같은 순간에, 이번에 는 우리도 함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