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숍은 도시를 세련되고 다채롭게 만드는 취향의 보고다. 서울에 첫 멀티숍이 생긴 1990년대 후반부터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로 넘어온 지금까지, 서울의 멀티숍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

 

AI55351 복사본-3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나. 하지만 이제 열흘 만에도 세상은 변한다. 이건 모두 스마트폰, 소셜 미디어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상 가장 강력한 소비 세대인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 때문이다. 그들은 디지털의 발전과 함께 자라나 자기를 표현하고 의사 소통을 하는 체계 자체가 완전하게 디지털화되어 있다. 모든 일상이 디지털로 시작해서 디 털로 끝나는 것이다. 즉각적이고 주체적이고 상호적이다. 물질적으로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고 자라났지만 실업률은 최고인 세대, 그렇기 때문일까? 미래를 도모하기보다는 지금 현재를 즐기고 자신의 기호에 따라 구매하고, 좋은 물건을 싸게 구입하는 합리적인 결정에 만족감을 얻는다. 지금 매장에서 입어본 옷은 집에 가는 길에 더 싼값으로 모바일을 통해 직구로 구입한다. 참여와 소통을 중시하고 자기 주도적으로 구매를 결정하고, 재미가 있는 콘텐츠에만 관심을 가지는 세대. 밀레니얼 세대로 불리는 이들은 10년 안에 25억 명이 될 예정이며, 이는 무려 노동인구의 75%를 차지한다! 이전의 모든 세대와 완전하게 다른 뇌 구조를 지닌 신인류의 등장으로 지금껏 세상을 움직이던 시스템이 극변화를 맞고 있는 것이다.

밀레니얼 세대가 옷을 입는 방법
기존의 방식이 너무 빨리 구태의연한 것이 되자 속도에 민감한 패션은 가장 먼저 이런 변화에 반응했다. 옷 입는 방식에서부터 그 변화가 시작되었다. 하이엔드가 거리 문화를 입기 시작한 것이다. 하이패션은 하이힐보다는 스니커즈와 버킨스탁을 신기를 권했고, 그래피티와 너덜너덜 찢어진 데님이 하이엔드라는 이름으로 1백만원을 호가하는 가격에 팔려나갔다. 패션은 이를 세상 제일 쿨한 것들이라고 불렀다. 밀레니얼 세대는 나르시시즘적인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게다가 그것이 쿨해 보이는 것이라면 가격에 연연하지 않는 습성도 지녔다 .비유를 하자면 ‘쿨한 하이패션’은 밀레니얼 세대가 좋아하는 것들의 ‘엑기스’이다. 과시를 좋아하는 세대와 과시로 먹고사는 패션이 인스타그램에서 만나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고, 결국 패션은 속도전이 되었다. 이제 6개월의 시간도 너무 길다고 말하며 지금 쇼에서 본 건 당장 살 수 있도록 ‘See Now, Buy Now’를 선언했다. 언제나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취향, 자유분방한 사고, 독자적인 스타일을 만들어낸 것은 매스미디어나 거대한 패션 기업들에서부터가 결코 아니다. 그런 사소한 변화를 일찍 알아챈 마리아 루이자, 오프닝 세레모니와 같은 멀티숍이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실현 방식을 적극적으로 찾아내서 만들어낸 결과였다. 다양성과 개성을 중시하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전파되는 트렌드는 아쉽게도 느리고 진중하게 흘러가는 취향의 깊이를 앗아간 듯 보인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처음으로 패션 기자가 되었을 때에는 매달 서울의 멀티숍을 둘러보며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인더우즈에는 오너 겸 바이어였던 강주희의 취향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오래된 듯하면서도 모던하고, 여성스러운 실루엣에 록적인 것들이 가미된 뉴욕의 신인 디자이너의 셀렉션이 좋았다. 메리핑의 치마를 샀고 콤포트 스테이션의 팔찌를 샀다. 록산다 일린칙을 처음 본 곳도, 산타마리아 노벨라의 비누를 처음 산 곳도 그곳이었다. 어빙 플레이스는 사카이, 토가, 츠모리 치사토와 같은 일본 디자이너를 서울에 처음으로 소개했고, 그곳에 가면 아기자기하지만 현대적인 구석이 있는 옷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었다. MM6의 셔츠나 원피스를 주로 샀던 에크루는 코즈믹 원더, 마틴 마르지엘라, 닐 바렛 등 전위적인 테일러링의 의상에 상업적인 감각을 더해놓은 것들을 만날 수 있었다. 국내 셀렉트숍의 원조인 디테일도 빼놓을 수 없다. 디테일에 가면 바이어인 김정임을 자주 만날 수 있었는데, 그녀는 매튜 윌리엄슨, 두리 정, 필립 림 등 새로 바잉한 옷들을 조목조목 설명해주었고, 나는 화보 촬영을 위해 그 옷들을 빌려오곤 했다. 디테일의 슈즈 컬렉션과 액세서리는 항상 탐이 나는 것들로 가득했다. 세일을 할 때면 크리스찬 루부탱이나 쥬세페 자노티의 슈즈를 몇 켤레씩 샀다. 한편, 대기업이 운영하는 멀티숍인 무이나 분더샵에서는 상업적인 코트를 파악하고 대중적인 코드를 읽어내기 좋았다. 수익을 내야 하는 구조의 거대한 멀티숍에도 그때엔 그곳만의 분위기라는 게 있었다. 분더샵은 클래식과 아방가르드함이 공존하는 아이템을 만날 수 있었고, 무이는 날카롭지안 우아한 아우라가 배어났다.

멀티숍 전성기
2008년 10 꼬르소 꼬모(이하 10CC)가 들어선 뒤부터 모든 게 조금씩 달라졌다. 이제 멀티숍이 옷을 포함해 화장품, 가구, 책, 커피와 샐러드를 파는 고감도의 복합 문화 공간으로 변화한 것이다. 그리고 서울의 편집숍은 대기업의 자본 아래 거대화되었다. 디스퀘어드2를 서울에 처음 소개하며 압구정동 멋쟁이들과 셀러브리티들의 성지였던 쿤 역시 2011년 애경과 인수 합병되어 제일모직의 10CC, 신세계의 분더샵, 한섬의 무이, 애경의 쿤으로 재편성되었고, 본격적으로 멀티숍의 2라운드가 시작되었다. 하이엔드를 소비하고 향유하는 사람들과 스트리트 문화와 힙한 옷에 대한 수요의 틈을 좁히기 위해 기업들은 동생 격인 세컨트 라벨의 멀티숍을 만들어냈다. 애경의 쿤 위드 어 뷰, 한섬의 톰 그레이하운드 다운스테어, 신세계의 마이분, 제일모직의 비이커가 그랬다. 앤 소피백, 패트릭 에르벨 등의 진보적인 디자이너들과 젊고 재능 있는 국내 디자이너인 요괴, 양근영, 폴앤앨리스 등의 옷을 다룬 데일리 프로젝트 역시 이런 흐름 속에 서울의 편집숍을 대표했다. 그야말로 멀티숍의 춘추전국시대였다.  새로운 브랜드들이 탄생하고, 다양한 스타일이 넘쳐났으며, 재미있는 행사가 줄을 이었다. 자본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멀티숍에서 쇼핑을 하며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고 인테리어와 가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풍요로움을 즐기는 동안 바이어의 취향과 역량이 중요했던 시대가 그렇게 저물고 있음을 그때는 몰랐었다. 점점 모체 편집숍과 세컨드 편집숍의 구분이 모호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스트리트는 어떤 한 장르가 아니라 하이엔드 패션 그 자체가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익스클루시브’의 의미도 없어졌다. 실제로 국내 시장엔 하이엔드 브랜드를 구매하는 사람들이 적었고, 소규모의 멀티숍이 독점으로 브랜드를 들여오는 것이 부담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판매가 괜찮다 싶은 브랜드는 이미 단독 매장을 오픈했다. 실제 알렉산더 왕의 주가가 한창 치솟을 때 청담동 일대에 모여 있던 거의 모든 편집숍에서 알렉산더 왕의 옷을 각자의 취향에 맞게 판매했다. 그러나 분더샵이 독점적으로 알렉산더 왕을 전개하고 나아가 청담동에 플래그십 스토어가 들어서자, 대중적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지만 다양한 취향으로 바잉되던 셀렉션의 재미는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많고 다양하던 멀티숍들 역시 하나 둘 사라져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제3라운드의 시작
본격적으로 소셜 미니어의 시대에 들어서자 문화적 코드를 동반한 대기업형 콘셉트 스토어만 살아남았다. 그리고 또 다른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젊은 소비자층을 책임지던 비이커와 쿤 위드 어 뷰 등이 국내 디자이너들에게 눈을 돌리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 비이커는 계한희의 카이를 시작으로 정지연의 렉토, 이혜미의 잉크, 김채연의 플레이 노모어 등 국내 디자이너들과의 협업을 통해 익스클루시브 영역을 기획해왔고, 지난 4월에는 ‘아워 서울’이라는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의 숨은 매력을 알리려는 의도 아래 2015년 가을/겨울 시즌부터 시작된 프로젝트로 이번 시즌은 서울을 주제로 11명의 국내 디자이너와 호흡을 맞추었다. 개성을 추구하지만 어렵지 않고 쉽게 지갑을 열 수 있는 아이템이 주를 이룬다. 문텐은 구조적인 오버사이즈 셔츠를 디자인했고, 쿨한 감성의 소유자 스테레오 바이널스는 호랑이 프린트 티셔츠를, 위빠남은 ‘OUI SEOUL’이라고 쓰인 레터링 티셔츠로 각자의 서울을 표현했다. “디자이너들의 제품은 팝업 매장을 통해 판매했어요. 오픈 파티에는 서울에서 옷 잘 입고 잘 노는 사람들이 모두 모였죠. 비이커는 개성 있고 재미있는 옷, 동시에 대중을 너무 앞서가지 않는 의상을 선보이고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국내 디자이너들과의 협업은 비이커에겐 젊은 디자이너들의 재기 발랄함과 감각을 발굴할 수 있고, 디자이너에겐 비이커라는 플랫폼을 통해 브랜드의 이미지를 상승시키고 인지도를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해요.” 비이커의 바이어 오수형은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유통형 편집 매장으로의 입지를 다지는 것이 경쟁력을 갖추는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쿤 위드 어 뷰는 보다 극적인 변화를 시도했다.  오피셜 헐리데이로 이름을 바꾸고 국내외 디자이너들과 함께 독점 상품을 직접 생산하는 패션 라이프스타일 셀렉트 숍으로 포진한 것. 렉토, 미스치프, 제이 쿠, 더 스튜디오 케이, 해프닝 등과 협업한 리미티드 에디션과 나이키, 반스, 잉크, 자인송, 노앙, 푸시버튼의 의상을 위탁 판매하고 있다. 디자이너들과의 협업 라인의 셔츠가 17만원대, 코트는 48만원대로 직접 생산과 유통을 책임지기 때문에 그만큼 가격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이제 사람들은 브랜드에 의존해 옷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취향을 대변할 수 있는 스타일을 사기 시작했어요. 이제 발맹이기 때문에, 발렌시아가이기 때문에라는 이유는 통하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해외 브랜드를 독점적으로 소유한다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죠. 소셜 미디어의 영향으로 원하는 스타일도 다양해졌고, 흐름은 더욱 빨라졌어요. 해외 신생 브랜드를 소개하는 역할을 해온 바이어의 영역이 줄어들었죠.  인스타그램을 몇 시간 둘러보면 지금 어떤 브랜드가 유행인지 금방 알 수 있으니까요. 게다가 똑똑한 소비자들은 매장에서 옷을 사지 않아요. 직구로 사죠. 빠르게 변화하는 흐름을 따라잡기 위해 바잉보다는 국내제조로 눈을 돌려 대중의 구미에 맞는 상품을 선보이는 게 맞다고 판단했어요.” 쿤에서부터 오피셜 홀리데이까지 바잉을 책임지고 있는 장익준은 밀레니얼 세대를 위한 새로운 형태의 멀티숍이 필요함을 설명한다.

지금껏 충성도 높은 고객층을 확고히 하며 굳건히 자리를 지켜온 한스타일도 변화를 준비 중이다. 온라인 스토어를 오픈했고, 조만간 골든 구스와 델보의 플래그십 스토어를 겸하는 멀티숍 콘셉트의 매장을 선보일 예정이다. 이는 결국 지금의 멀티숍은 셀렉션을 선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인큐베이터 혹은 디스트리뷰터 역할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옳고 틀린 선택이란 없다. 세대가 변화했고 그래서 멀티숍도 진화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