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식물에 대한 열정으로 식물성분을 담은 화장품을 만든 이브 로쉐. 자연과 브랜드가 상생하는 미래를 그린 그의 흔적을 찾아 프랑스 북서부의 작은 마을, 라 가실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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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래된 돌담길을 따라 옛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가옥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라 가실리 시내.

이른 아침, 파리 몽파르나스 역은 여행가방을 든 관광객들과 근교로 출근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낯선 풍경에 넋을 잃고 있는 사이, 라 가실리로 향하는 고속열차가 역사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서둘러 열차에 올라 선반에 짐을 올리고 의자 깊숙이 몸을 누여 창밖을 바라봤다. 열차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빛바랜 도시의 풍경은 점차 사라지고 유채꽃으로 노랗게 물든 너른 들판이 끝없이 펼쳐졌다. 그렇게 세 시간을 달려 르동 역에 도착했다. 르동 역이 있는 라 가실리는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 지방에 속한 작은 도시다. 프랑스 자연주의 화장품 브랜드 이브로쉐의 창립자인 이브 로쉐의 고향이자 이브로쉐의 역사가 처음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어려서부터 식물이 가진 효능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이브 로쉐는 1959년, 자신의 집 다락방에서 미나리아재비의 일종인 피카리아 추출물을 담아 피카리아 크림을 만들었다. 이브 로쉐가 만든 제품이 프랑스 전역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라 가실리에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났고, 일자리를 찾아 파리로 떠났던 마을 청년들도 고향으로 하나 둘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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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푸른 언덕 위에 지어진 에코 호텔 1층에 자리한 레스토랑 테라스. 테라스 앞 텃밭에서 직접 기른 식용 꽃과 허브로 음식에 풍미를 더한다. 3 통창 너머로 숲과 들판의 풍경이 펼쳐지는 실내 수영장.

옛 풍경을 간직한 라 가실리
5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라 가실리에는 식물원료를 재배하는 농장과 1천여 종의 식물을 보존하고 연구하는 생태공원을 비롯해 이브로쉐의 주요 생산시설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 주민의 3분의 2 이상이 이브로쉐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다 보니 ‘라 가실리’라는 지역 이름보다 ‘이브로쉐마을’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지금도 라 가실리 시내에는 이브 로쉐 생가가 50년 전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다. 이브 로쉐 생가 주변에는 옛 모습을 간직한 프랑스 전통 가옥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울퉁불퉁한 돌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수공예품을 파는 작은 가게와 식당이 나온다. 크레페를 전문으로 하는 레스토랑인 크레페리에(Creperie)에서는 따스한 햇빛이 내리쬐는 야외 테라스에서 마을에서 재배한 원료로 만든 프랑스 전통 크레페를 맛볼 수 있다. 바삭하게 튀긴 감자와 햄, 치즈와 달걀노른자로 속을 채운 크레페는 이곳의 대표 메뉴다. 노릇하게 구운 크레페 위에 직접 만든 캐러멜 시럽과 레몬 소르베를 올린 크레페도 인기다. 돌담길을 지나 도착한 마을 입구에는 ‘메종 드 라 포토그래피(Maison De La Photographie)’라고 적힌 사진 전문 갤러리가 자리하고 있다. 라 가실리에서는 매년 6월, 프랑스 최대 규모의 야외 사진 페스티벌이 열린다. 31년 전, 이브 로쉐의 아들인 자크 로쉐가 푸르름이 가득한 라 가실리의 마을과 자연을 배경으로 <People and Nature>라는 야외 사진전을 개최한 후로 매년 새로운 주제로 열리고 있다. 올해는 일본과 바다를 주제로 하여 인간과 환경의 지속 가능한 관계에 대해 탐구해보는 전시로 열리는데, 6월 4일부터 9월 30일까지 계속된다. 마을 입구에서 차로 5분 거리에는 1100여 종의 식물이 자라는 생태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식물자원을 보존하기 위해 조성된 이곳에서는 대나무 숲이 만든 터널 속을 천천히 거닐며 조용히 사색을 즐길 수 있다.

온전한 휴식을 선사하는 에코 호텔
생태공원을 나와 라 가실리 시내를 가로질러 푸른 언덕 위에 지어진 이브로쉐 에코 호텔에 도착했다. 지난 2010년, 이브 로쉐가 식물을 연구하기 위해 즐겨 찾던 숲 바로 옆에 지어진 에코 호텔은 숲에 서식하는 동식물의 생태와 자연환경을 보존하기 위해 건축자재부터 인테리어, 설계에 이르기까지 환경친화적인 방식을 택해 유럽 에코라벨 연합으로부터 친환경호텔 인증을 받았다. 태양열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모든 객실을 남향으로 설계하고 단열처리를 완벽히 해 겨울에 따로 난방을 하지 않아도 실내 온도가 17℃로 유지된다. 또한 객실 주변을 1미터 높이의 목초벽이 둘러싸고 있고, 객실 앞쪽 테라스의 천장이 햇볕가리개 역할을 해 여름에도 실내 온도가 12℃를 넘지 않는다. 호텔 내부 인테리어도 장식을 최소화하고 친환경인증을 받은 천연 페인트와 내구성이 좋은 오크와 아카시아 나무를 사용해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객실 내 침구와 수건도 유기농 순면 소재로 만든 것만 사용한다. 정원에는 빗물을 저장하는 시설이 마련되어 있으며 호텔 수영장에서 사용한 물은 곧바로 정수해 정원수로 재활용한다.

에코 호텔답게 레스토랑도 특별하다. 호텔에서 반경 40km 이내에서 유기농으로 재배한 제철 식재료만 사용해 요리하고, 호텔 앞 텃밭에서 직접 기른 식용 꽃과 허브로 음식에 고운 색감과 풍미를 더한다. 그날그날 신선한 식재료를 이용하기 때문에 메뉴도 수시로 달라진다. 호텔에 머무는 동안 두 번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매번 감탄할 정도로 훌륭한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돼지고기를 저온에서 장시간 부드럽게 삶아 겉만 바삭하게 튀긴 다음 검은깨로 만든 소스를 곁들인 요리는 지금까지 프랑스에서 먹어본 음식 중 최고라고 할 만큼 맛있었다. 알고 보니 단지 이곳 셰프가 만든 음식을 맛보기 위해 멀리 파리에서도 찾아올 만큼 미식가들 사이에서 이름난 곳이라고 한다.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즐겼다면 이제 온전한 휴식을 취할 차례다. 호텔안에 있는 이브로쉐 스파에서는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에 자생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콩과 식물인 엔타다 기가스(Entada Gigas)의 씨앗을 이용한 특별한 트리트먼트를 경험할 수 있다. 납작한 조약돌 모양의 단단한 씨앗을 뜨겁게 데워 마사지 오일과 함께 몸 구석구석을 부드럽게 마사지하는데, 따뜻한 온기가 몸속으로 스며들어 긴장이 풀리면서 깊은 잠에 빠져든다. 스파 안에는 따뜻한 물로 채운 수영장이 있는데, 통창 너머로 펼쳐진 숲과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여유롭게 쉬었다 갈 수 있다. 아침에는 야외에서 요가 수업이 열리는데, 호텔에 숙박하면 무료로 참여할 수 있다. 숲에서 불어오는 상쾌한 공기를 맡으며 스트레칭을 하다 보면 건강한 기운이 몸속 가득 차오르는 기분이 든다. 휴식과 재충전이 필요하다면 에코 호텔에 오래 머물러도 좋을 듯하다. 이브로쉐 재단에서는 2020년까지 전 세계에 1억 그루의 나무를 심는 활동을 지원하고 있는데, 에코 호텔에 1박을 할 때마다 나무 한 그루를 후원하게 된다.

 

1 친환경호텔 인증을 받은 이브로쉐 에코 호텔. 2 라 가실리의 생태공원을 재현해 직원들을 위한 휴식공간을 마련한 이브로쉐 본사의 1층 정원, 3 수레국화와 금잔화 등 주요 식물원료를 정리해놓은 연구소 내부의 진열장.

도심 속 식물연구소
다음 날 아침, 고속열차를 타고 다시 파리로 돌아와 몽파르나스 역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위치한 이브로쉐 파리 본사를 찾았다. 이브로쉐는 일부 메이크업 제품과 향수를 제외한 나머지 제품을 제조할 때 식물성분을 95% 이상 함유하도록 하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중간업체를 통해 식물추출물을 구매하는 대신 식물원료를 찾아 재배하는 과정부터 식물에서 유효성분을 추출해 실제 제품에 적용하는 과정과 판매와 유통까지 직접 담당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때문에 회사 내에 농학박사와 식물학자, 과학자, 피부과 전문의 등 150명이 넘는 연구진이 일하고 있다. 파리 본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서 역시 식물성분의 연구와 제품 개발을 담당하는 R&D센터다. “이브로쉐는 화장품 원료로서의 효능과 안정성이 검증된 250여 개의 식물성분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 중 라 가실리에서 재배가 가능한 금잔화와 수레국화 등 일곱 가지 종류를 제외한 나머지 식물은 이브로쉐의 철저한 관리 아래 전 세계 각지에서 직접 재배하고 있어요.” R&D센터의 책임자인 자비에르 오라망 리서치 디렉터의 설명이다. 모든 과정을 직접 통제하고 관리하는 덕분에 중간업체에 지불해야 하는 비용을 아껴 제품 가격을 낮출 수 있고, 원료가 되는 식물을 몇 연도에 어느 지역에서 재배했는지 여부까지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어 제품의 품질과 안정성을 높일 수 있다고. 새로운 식물원료를 채집하기 위해 연구원들이 직접 일년에 서너 차례 전 세계를 여행한다. “얼마 전에도 인도 남부와 부탄에 다녀왔어요. 아마존 오지로 채집을 하러 갔을 때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었어요. 경비행기를 타고 배로 갈아타고도 한참을 들어가야 할 만큼 먼 곳이었는데, 부족을 만나러 가기 위해 특별한 선물도 준비해야 했어요. 살아 있는 뱀을 가져가면 신이 보낸 사람으로 여겨 우호적으로 대해준다기에 살아 있는 뱀을 목에 두르고 배를 타고 간 적도 있었죠.” 자비에르 리서치 디렉터의 말이다.

연구원들이 이처럼 발로 뛰며 찾아낸 식물원료는 유효성분을 추출해 실제 제품을 개발하는 단계로 들어간다. “새로운 제품을 개발할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점은 바로 유효성분과 피부의 ‘동화작용’이에요. 피부에 발랐을 때 유효성분이 피부 속까지 침투하지 않거나 기대했던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죠.” 효과와 안정성을 입증하기까지 오랜 연구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새로 개발한 식물원료로 제품을 개발하기까지 오랜 기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지난해 출시된 안티에이징 라인인 세럼 베제탈의 주성분은 아이스 플랜트라는 식물에서 추출한 성분이에요. 보통 식물에서 유효성분을 추출할 때는 건조과정을 거치는데, 아이스 플랜트는 건조과정 없이 냉각시킨 상태에서 추출해 유효성분의 효능을 높였죠. 제품 개발에만 5년 이상이 걸렸지만 저희가 개발한 독자성분이기 때문에 오직 저희 제품에만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연구소 규모가 얼마나 큰지 자비에르 리서치 디렉터와 함께 연구소를 전부 둘러보고 나니 두세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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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프랑스 식물학자 파트릭 블랑의 수직정원으로 외관을 장식한 이브로쉐 본사. 5,6 이브로쉐의 첫 매장이 있던 파리 오스만대로 43번지에 문을 연 콘셉트 스토어.

파리 본사를 나와 향한 곳은 오스만대로 43번지에 위치한 이브로쉐의 콘셉트 스토어. 갤러리 라파예트 백화점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이곳은 1969년 이브로쉐 첫 매장이 있던 곳으로, 대대적인 리뉴얼을 거쳐 3층 규모의 콘셉트 스토어로 재탄생했다. 매장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초록빛 식물이 벽면 전체를 뒤덮고 있는 수직정원으로, 수직정원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식물학자 파트릭 블랑이 직접 디자인한 작품이다. 1층에는 스킨케어와 메이크업을 아우르는 다양한 제품이 구비되어 있고, 디톡스 주스를 판매하는 뷰티 바도 자리하고 있다.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호텔 라운지를 연상시키는 세련된 분위기의 퍼퓸 바가 모습을 드러낸다.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고가의 향수도 시향해볼 수 있다. 2층에는 이브로쉐 제품을 이용해 트리트먼트를 받을 수 있는 스파 공간도 자리하고 있다.

이브 로쉐의 흔적을 찾아 라 가실리와 파리를 여행하는 동안 인상 깊었던 것은 자연과 상생을 추구한 그의 철학이 눈길과 발길이 닿는 곳곳마다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이든 브랜드든 일단 큰 성공을 거두면 성공에 도취돼 과거의 흔적은 지워버리고 새것으로 화려하게 치장하기 마련이지만 이브 로쉐의 고향인 라 가실리는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모습이다. 에코 호텔이 친환경건축설계로 제대로 지어져 히터와 에어컨 없이도 아무 문제 없이 운영되는 모습을 보면서 이브 로쉐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자연이 곧 우리의 미래’라는 이브 로쉐의 철학은 우리 모두가 가슴에 새겨야 할 문장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