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초등학생 여자 아이들이 용돈이 생기면 가장 먼저 달려가는 곳이 바로 화장품 가게다. 여고생들의 가방 속에는 화장품 파우치가 필수품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이제는 기정사실이 된 십대의 화장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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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카라, 컬러렌즈, 립틴트, 비비크림, 쿠션 팩트, 아이라이너. 언니들이 하는 건 우리도 다 해요”. 이제 겨우 열두 살 여자 아이에게 요즘 초등학생들은 도대체 어떤 메이크업을 하는지 물었을 때의 대답이었다. 물론 모든 초등학생이 이처럼 풀 메이크업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틴트와 비비 크림만 사용하는 정도까지 더하면 한 반의 여자 아이들 중 거의 90%가 화장을 하고 있다고 한다. 요즘 초등학교의 한 반 학생 수가 30명 정도고, 그중 여자 아이가 10~15명꼴인 것을 감안한다면 한두 명 빼고는 다들 화장을 한다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 사이의 단골 생일 선물도 화장품인 경우가 많단다. “얼마 전 제 생일에는 우리 반 남자친구 엄마가 틴트를 선물해줬어요. 여자애들끼리 모인 카톡방에서는 화장품 얘기만 하고요. 수업 시간에 쌍꺼풀 테이프를 붙이고 있는 친구도 많아요.” 요즘 초등학생 여자 아이들 사이에 화제는 단연 걸그룹 ‘트와이스’이고, 가장 좋아하는 화장품 브랜드는 페리페라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유는 단순하다. 패키지가 귀엽고 아주 진하게 발색되는 립틴트 때문이라고. 용돈을 모아서 화장품을 사긴 하지만, 돈이 없거나 화장품이 떨어졌을 때는 학교 앞 문방구에서 화장품을 사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쿠션 팩트는 겨우 3천원, 틴트는 2천원 정도면 구입할 수 있다고 하니, 그 질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러니 학부모 입장에서는 무조건 화장을 막기보다는 차라리 질 좋은 화장품을 사용하게 하는 것이 더 나을 터였다. 이제야 생일 선물로 화장품을 고르는 부모의 마음이 십분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화장을 하지 않는 여고생은 이제 거의 없다
이번에는 열일곱 살,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을 만났다. 예상대로 그녀는 한 반 학생의 100%가 메이크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비비크림, 팩트를 바르고 아이라인과 마스카라는 필수예요. 눈에 음영을 주고 눈밑에 펄 섀도를 발라 애교살을 강조하고요, 쉽게 뭉개지는 립스틱 대신 들고 다니기 편한 립틴트를 좋아해요.” 설명만 들어도 여자 아이돌 스타의 메이크업이 딱 떠올랐다. 도대체 이런 메이크업 기술은 어디서 배우는 걸까? 영상 세대답게, 메이크업 튜토리얼을 선보이는 유튜버가 그들의 메이크업 선생님인 걸까? “유튜브는 정말 화장에 관심이 많은 몇 명만 보는 것 같아요. 보통은 페이스북을 가장 많이 봐요. 연예인보다 김나희, 채보미 같은 페이스북 얼짱의 화장법에 더 관심이 많고요. 화장품에 대한 정보도 주로 페이스북에서 얻어요. 친구들하고 화장품에 대한 이야기를 정말 많이 하니까 그러면서 사고 싶은 제품이 생기는 경우도 많아요.” 주로 가격이 저렴하고 화장했을 때 쨍하게 색이 나오는 제품을 선호하고, 네이처리퍼블릭, 에뛰드하우스, 더 샘, 미샤, 더페이스샵 등 로드숍 브랜드를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생각보다 고가 화장품을 많이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등굣길 교문에서 화장품 파우치를 압수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따라서 뺏겨도 아깝지 않을, 너무 비싸지 않으면서도 가방이 아니라 주머니에 갖고 다닐 수 있는 작은 사이즈의 화장품을 더 좋아한다고 했다. 아무것도 안 바른 듯 가벼운 피부 화장에 열광하는 20~30대와 달리 피부 화장을 유난히 두껍게 하는 이유는 뭘까? 바로 여드름 자국을 감추고 싶어서다. 선생님들이 클렌징 티슈를 들고 다니며 화장을 지워버리기도 하지만, 바로 다시 화장을 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눈썹도 없고, 입술도 색이 없이 아파 보이기 때문에 화장을 안 하고 있으면 창피하기 때문이란다. 친구들이 다 하니까 휩쓸려 시작한 화장이 이제 필수가 된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지막으로 피부 관리(스킨케어)와 화장 중 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당연히 화장이죠. 피부 관리에는 아무 도 관심 없어요. 다른 애들도 다 그럴걸요?”

십대의 화장을 막을 수 없는 이유
초등학생부터 중학생, 고등학생까지 다섯 명의 십대를 만나고 얘기를 듣다 보니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그들 입장에서는 자신이 화장을 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할 것 없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십대 시절을 기억해보면 한편 이해되는 것이 사실이다. 또 이제 돈이 궁한 십대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저렴한 브랜드가 수없이 많이 생겨났다는 사실 등을 감안해본다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부모나 교사는 왜 그들의 화장을 막지 않는 것일까? 서울의 한 고등학교 교사를 만났다. “학생인권조례 때문에 웬만한 처벌과 벌점 제도는 다 없어진 상태예요. 화장을 지우라고 하거나, 화장품을 뺏는 등 강제적인 훈육은 거의 불가능한 셈이죠.” 학생인권조례란 학교 교육 과정에서 학생의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 주요 골자인데, 현재 서울뿐 아니라 경기도, 광주광역시, 전라북도 교육청에서 시행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서울학생인권조례는 12조에서 복장, 두발 등 용모에 있어 개성을 실현할 권리를 명시하고 있을 정도. 따라서 학생 지도 담당 교사조차도 섣불리 화장을 강제로 지우라고 말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여자 아이들 중에는 틴트를 너무 많이 사용해서 치아가 붉게 착색된 아이도 많아요. 혹시라도 화장을 못하고 등교할 때는 마스크를 쓰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나타나죠. 화장 안 한 얼굴을 너무도 창피해하거든요. 아이돌 스타 때문인지 마스크를 끼는 게 학생들 사이에 유행이기도 하고요.” 경기도의 한 중학교 교사는 십대 여학생들의 메이크업을 이렇게 정의 내렸다. “십대에게는 ‘화장한 티’를 내는 것이 중요한 명제 같아요. 피부는 케이크 같은 질감으로 두텁고 매트하게 발라요. 쿠션 팩트보다는 파우더 팩트를 더 많이 사용하더군요. 하얀 피부가 예쁘다고 생각하고, 여드름 등 트러블을 감추고 싶어서래요. 눈썹과 입술이 유난히 진한 것도 특징이고요. 어른들도 시도하기 부담스러운, 새빨간 색이나 쨍한 핑크나 오렌지색도 과감하게 발라요. 셰이딩으로 얼굴 라인을 정리하기까지 하죠. 피부는 하얗고 눈썹과 입술은 진하니까 가부키 화장이 따로 없지만, 가끔 어른인 저보다 메이크업을 더 잘하는 아이도 많아서 깜짝 놀랄 정도예요.” 진로를 위해 일찌감치 메이크업을 전문적으로 배우는 아이들이 늘어난 것도 십대들이 화장에 더욱 가까워지는 이유 중 하나란다. 화장은 되도록 하지 말라고 교육하긴 하지만, 이를 제대로 지키는 학생들은 거의 없다고 했다. 이 학교에서는 화장을 어떻게 지도할 것인가에 대한 교사들의 토론회가 공식적으로 열리기도 했다고 한다. 화장을 아예 금지해야 한다는 의견과 허용 가능한 화장의 기준을 만들어 지도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립했는데, 별다른 결론을 내지 못하고 토론은 마무리되었다. 화장을 아예 금지하기란 이미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화장의 기준을 명쾌하게 규정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어차피 화장에 대해 ‘지도’할 수 있지만, ‘강제’할 수는 없기 때문에 교사들의 토론도 별 의미가 없어요. 다만 아이들이 최소한의 경각심이라도 가질 수 있도록 지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에는 모든 교사가 수긍하죠. 그런데 이제 갓 교사가 된 이십대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화장을 더욱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도 하더라고요. 그들 역시 십대 때부터 화장을 시작한 세대이기 때문이겠죠.  이렇게 시대가 바뀌었다면, 오히려 피부가 망가지지 않게 제대로 화장하는 법을 교육 과정에 정식으로 넣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언젠가 그런 커리큘럼이 생기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십대의 마음을 잡기 위한 브랜드들의 전략
십대의 화장이 이제 도저히 거스를 수 없는 물결이라면, 브랜드에서는 과연 십대의 마음을 잡기 위해 어떤 전략을 내놓고 있을까? 십대가 전체 소비자의 20%를 차지한다는 페리페라의 경우 십대가 좋아하는 배우 김소현을 모델로 내세웠다. 스티커나 키링 등 아기자기한 액세서리와 디자인을 좋아하는 십대를 위해 DIY 키트인 ‘소녀의 캐비닛’이라는 제품을 내놓기도 했다. “십대는 브랜드 충성도가 낮고, 유행이나 제품 디자인에 민감한 편이에요.” 페리페라 홍보팀 이주영 과장은 십대의 뷰티 키워드로 ‘틴트’를 꼽으며 그들이 수정하지 않아도 되는 제품을 유난히 선호한다고 설명했다. 교복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사이즈나 디자인의 제품을 좋아하는 것도 특징. 틴트 제품이 주를 이루고, 일러스트가 더해진 아기자기한 패키지의 페리페라가 십대에게 인기를 얻는 이유다. 에뛰드하우스 홍보팀 임해리 차장 역시 비슷한 분석을 내놓았다. “가격과 질을 꼼꼼히 따지는 이십대와 달리 친구와 주변의 입소문에 예민해요. 소위 말하는 ‘대란템’의 경우 테스트 없이 바로 사는 경우도 많죠. 한마디로 유명한 제품을 좋아해요. 또 친구들의 정보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매장에 와서 여러 제품을 비교하기보다는 친구가 쓰는 제품을 모바일로 미리 검색하고 와서 망설임 없이 바로 구입해요. ” 에뛰드하우스의 전략은 SNS에 익숙한 십대에 맞춰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통해 브랜드와 제품, 화장법에 대해 활발하게 소통하는 것이다. 입소문에 약한 세대를 위한 입소문 마케팅에 주력하는 것이다. 로드숍 브랜드 외에 럭셔리 브랜드들의 사정은 어떨까. “콕 짚어 십대를 위한 전략을 준비하고 있지는 않아요. 경제력이 거의 없는 십대를 위한 마케팅은 매출 효과로 이어지기 어렵기 때문이죠. 다만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등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브랜드에 대한 이미지를 심어주는 정도에 그쳐요. 현재 이미지 메이킹 전략 역시 십대보다는 이십대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거든요. ” 한 브랜드 담당자는 말했다. “팝업스토어와 같은 이벤트의 경우, 전 세대를 망라할 수 있는 강남역이나 홍대 등을 선호해요. 딱히 십대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지만 장소를 선정할 때 십대의 접근 가능성까지 고려하는 정도가 럭셔리 브랜드들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겠죠.” 또 다른 브랜드 담당자 역시 비슷한 답변을 보내왔다. 화장품 소비가 많은 십대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아직 경제력이 없고 나이가 들수록 경제 사정에 따라 브랜드를 수없이 갈아탈 십대를 위한 직접적인 전략을 내놓을 이유가 없다는 의미다. 따라서 대부분 브랜드의 십대에 대한 전략은 브랜드의 인지도를 높이는 정도의 포괄적인 이미지 마케팅에 그친다. “친구들이 다 하는데, 나만 안 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면 나만 못생겨 보일 테니까요.” 초등학생 여자 아이의 말이 머릿속에 강하게 남는다. 작년 유아용 썬 쿠션을 내놓은 프리메라는 생각보다 뜨거운 엄마들의 반응에 놀라, 올해는 한정판까지 새롭게 출시했다. 엄마의 화장을 흉내 내고 싶은 미취학 여자 아이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화장을 하고 자신을 치장하는 것은 어쩌면 나이를 막론한 여자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불과 네다섯 살 여자 아이들도 이러한데, 십대들은 오죽하겠나. 그들의 이른 화장을 막을 방법은 거의 없어 보였다. 얼굴에 색을 얹는 순간 내 얼굴이 예뻐지는 황홀한 경험을 한 아이들에게 왜 화장을 하면 안 되는지 납득시키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일 테니까. “집에서 아무리 화장을 못하게 말려도, 학교에 가면 아무 효과가 없어요.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화장을 하게 되는 것 같더라고요. 그럴 바에는 아이가 질 낮은 화장품으로 몰래 화장해서 피부를 상하게 하는 것보다, 엄마가 골라주는 질 좋은 화장품으로 화장하게 하는 게 더 나은 것 같아요.” 서울의 한 어머니는 중학생 딸의 방에서 듣도 보도 못한 브랜드의 싸구려 메이크업 제품을 발견한 후로 딸과 함께 화장품 쇼핑을 가서 필요한 메이크업 제품을 사 준다고 말했다. 화장품 사용을 이렇게 암묵적으로 허용한 후, 오히려 화장품에 대한 얘기도 편하게 나눌 수 있어 딸과 더욱 가까워졌을 뿐 아니라 올바른 화장법을 가르칠 수 있어 더 좋은 것 같다고 덧붙였다. 어쩌면 이게 정답일지도 모르겠다. 십대의 화장을 무조건 불편한 시선을 보기보다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제대로 된 스킨케어 방법이나 피부에 자극을 주지 않는 화장품을 고르는 노하우를 교육시키는 것이 더욱 현명한 대처 방안이 아닐까. 적어도 어리디어린 초등학생 여자 아이들이 피부에 유해한 색소로 가득한 문방구 화장품으로 자신의 피부를 망치는 것을 방치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