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일한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고맙게도 패션은 그것보다 쉽고 더 즉각적인 방법으로 떠남의 유희를 즐길 수 있도록 도와준다. 여행에 의한, 여행을 위한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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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가을 파리의 그랑 팔레는 샤넬 캉봉 공항으로 변해 있었다. 차가운 은색으로 빛나는 터미널 의자, 카운터에서 탑승 수속을 도와주는 샤넬 에어라인의 직원들, 모스크바, 서울, 두바이로의 비행 스케줄이 표기된 전광판, 실제 공항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세심함 덕분에 게스트들은 예기치 않게 일등석 탑승객이 될 수 있었다. 매 시즌 동시대 사회현상을 간파해 컬렉션에 반영하는 칼 라거펠트는 “현재의 럭셔리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죠”라고 말한 수지 맨키스의 말에 힘을 싣고 있었다. 생각해보라. 여행만큼이나 시간과 돈, 양립하는 두 가지의 가치가 모두 필요한 럭셔리한 장르가 또 있을까? 게다가 여행이야말로 이국적인 것을 찾아,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떠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 현대인은 틈이 날 때마다 LA로, 파리로, 코사무이로 날아가 새로운 곳을 탐색하는 즐거움을 누리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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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라피아 소재 모자는 가격미정, 뮬바우어(Muhl Bauer). 2 골드 도금 목걸이는 66만원, 레 네레이드(Les Nereides). 3 면 소재 원피스는 24만8천원, 세인트 제임스(Saint James). 4 면 소재 카디건은 4만5천원, 버쉬카(Bershka). 5 아세테이트 소재 선글라스는 45만원, 토즈(Tod’s). 6 송아지 가죽 소재 샌들은 가격미정, 에르메스(Hermes). 7 소가죽 소재 트렁크는 2백만원대, 프라다(Prada). 8 폴리에스테르 소재 스카프는 5만9천원, 커밍스텝(Coming Step).

칼 라거펠트는 이렇게 새롭게 부상한 여행족들이 좋아할 만한 9개의 룩을 펼쳐 보였다. 그곳엔 화이트 슈트,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전용기를 타는 20세기식 젯셋족은 없었다. 기내에서 편히 잘 수 있도록 팬츠 위에 하늘거리는 스커트를 매치했고, 찬 공기로부터 몸을 보호해줄 스웨트 셔츠를 어깨에 두르거나 허리에 동여맸다. 트랙슈트에 캡모자를 뒤로 쓴 모델은 일등석에 오르는 힙합 뮤지션을 연상시켰고, 두툼한 양말과 불이 들어오는 테바 샌들의 매치, 비행기 펜던트 목걸이와 브로치, 안대에서 영감을 받은 선글라스는 밀레니엄 시대의 여행자들이 원하는 것은 실용과 위트임을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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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샤넬의 칼 라거펠트가 있다면 서울에는 럭키 슈에뜨의 김재현이 있다. 꾸준히 여행의 영감을 풀어내온 김재현은 공항 활주로로 탈바꿈시킨 런웨이에 휴가를 떠나는 쿨하기 그지없는 젯셋족을 올렸다. 모델 정호연은 실크 톱과 트랙슈트에 오버사이즈 아우터를 입고 등장했는데, 이는 실제 공항에서 마주칠 법한, 실용의 멋이 충만한 공항 룩의 표본이었다. 이달 패션 인사이더의 공항 룩을 인터뷰한 ‘My Travel Uniform’ 칼럼에서 인터뷰이들이 언급한 스타일링 팁을 김재현의 컬렉션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다. 짐을 줄이면서 세련된 캐주얼 룩을 완성하는 점프슈트, 휴양지에서 입기 딱 좋은 실크 소재 선드레스, 헝클어진 머리를 감출 수 있는 후디 점퍼와 버킷햇 등! “자신을 사랑하고 가꿀 줄 아는 여성들은 여행을 통해 인생을 즐기죠. 휴양지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여유롭고 세련된 무드에 담아냈어요.” 김재현의 말처럼 패션이 긍정과 낙관의 무드를 전하는 여행에 집중하고 있다는 증거는 도처에서 감지할 수 있다. 끌로에는 태슬을 장식한 튜닉 드레스, 90년대풍 트레이닝 슈트, 레게풍의 스웨터 등 단순한 아이템에 힘들이지 않고 여름휴가를 담아냈다. 타미 힐피거는 카리브 해로 우리를 안내했다. 폴로 셔츠와 옥스퍼드 셔츠에는 오색찬란한 ‘밥 말리’ 컬러의 크로셰 수영복과 버킷햇을, 해변에서 빛을 발할 그물 니트 드레스에는 꽃무늬 슬립온을 조화하여 젊고 생동감 넘치는 바캉스 룩을 완성한 것. 피날레 무대에서는 구릿빛으로 태닝한 지지 하디드가 물속으로 뛰어들며 열대 섬으로의 달콤한 휴가를 종용했다. 주제를 풀어내는 방식에 변화가 없어 다소 진부하지만 여행을 테마로 무한 긍정을 드리웠다는 점에서 돌체앤가바나도 기억해야 한다. 로마, 나폴리, 카프리 등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지역의 풍경과 지명을 프린트한 드레스, 자수, 비딩, 아플리케 등의 장식을 더한 마린 스트라이프로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여행객을 탄생시켰다. 돌체앤가바나가 치장에 여념 없을 때 리조트 룩의 대가 마이클 코어스는 조용하게 따뜻한 나라에서의 낭만을 그려냈다. 오프숄더 러플 톱과 풀 스커트의 매치, 스윔슈트와 터틀넥 스웨터의 조화, 양귀비가 만개한 선드레스 등 리넨 거즈나 조셋 소재를 사용해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느낌을 주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을 따라 흐르는 유연한 선, 허리를 잘록하게 강조하는 벨트, 깊은 슬릿이 관능을 곁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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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소가죽 소재 여권 지갑은 12만9천원,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 10 비행기 모티브 브로치는 가격미정, 샤넬(Chanel). 11 비스코스 소재 톱은 3만9천원, H&M. 12 나일론 소재 수영복은 5만원대, 아메리칸 이글 (American Eagle). 13 짚 소재 토트백은 가격미정, 랄프 로렌 컬렉션(Ralph Lauren Collection). 14 면 소재 팬츠는 가격미정, 마이클 마이클 코어스(Michael Michael Kors).

패션은 여행지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고 이국적인 색으로 런웨이를 물들이는 것 이상으로 여행을 사랑한다. 지금 일본의 키오이초에서 열리고 있는 루이 비통의 <비행하라, 항해하라, 여행하라>의 전시가 보여주는 것처럼 여행은 사람들로 하여금 가보지 못한 곳을 향한 꿈을 품게 하는 브랜드의 정체성이다. 혹은 샤넬, 루이 비통 등 무수한 패션 하우스들이 낯선 땅에서 크루즈 컬렉션을 선보이고, 쿠슈빌이나 생트로페 등지에 팝업 스토어를 여는 이유. 낯선 곳에선 뭐든 사고픈 욕구를 제공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덕분에 우리는 떠나지 않고도 떠남의 유희를 만끽할 수 있다 . 그것도 아름답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