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간 필모그래피와 함께 삶의 궤적을 쌓아온 여배우들은 우리가 오랜 시간, 흠모하며 지켜본 대상이다. 중년에 이른 지금까지도 활발하게 활동 중인 여배우의 이름을 모았다. 그리고 그녀들을 사랑하는 이유에 대하여.

 

 

케이트 블란쳇, 인간계에 발붙인 엘프
인간계 기준으로 그분의 나이를 셈하는 게 불경스러운 일은 아닐까? 케이트 블란쳇을 떠 올리면 이런 생각이 먼저 든다. 우아함이라는 단어를 의인화한 듯한 <반지의 제왕>과 <호빗> 시리즈의 엘프, 갈라드리엘은 무려 8 천여 살이다. 온화한 미소와 새하얀 피부, 신비로운 눈동자, 커다란 키, 벌어진 어깨, 무언가를 꿰뚫어보는 듯 형형한 눈빛 등 케이트 블란쳇의 모든 외형적인 조건은 여기에 있을 것 같지 않은 독특한 존재감을 만들어낸다. 어딘가에 엘프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꼭 저런 모습일 거라고 납득해버리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케이트 블란쳇을 정말로 좋아하게 된 건 우디 앨런의<블루 재스민> 덕분이었다. 남편이 사기꾼임이 밝혀지고, 최상위층으로서 누려온 생활이 모조리 무너졌음에도 샤넬 재킷과 에르메스 가방을 끌어 안고 끝까지 일말의 자존심을 버리지 않으려 했던 재스민. 케이트 블란쳇은 여전히 우아하고 아름다웠지만, 그가 연기한 재스민은 끊임없이 술을 마셔대고 천천히 미쳐가는 허영심 많은 여성이었다. 다만, 동시에 품위를 지킬 줄 아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다. 무례할 정도로 껄떡대는 남자들에게 두 눈을 부릅뜨며 거절의 의사를 밝혔고, 아무 일이나 하라고 권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취향과 안목을 살려 인테리어 공부를 하겠다고 일갈했다. 가난하면 주제에 맞게 살아가라고, 품위 같은 건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쉽게 말하는 세상에서 케이트 블란쳇의 재스민은 인간에게 왜 품격이 필요한가를 보여주었다.

한참 어린 여성 테레즈(루니 마라)와 사랑에 빠지는< 캐롤>의 캐롤 역시 압도적으로 매혹적인 여성이자 예의와 품위를 간직한 인간이다. 자신의 장갑을 찾아준 테레즈에게 저녁식사를 대접하고, 사진가를 꿈꾸는 테레즈에게 카메라와 필름을 선물하기도 한다. 원치 않았던 결혼 생활에 괴로워하지만, 레즈비언이라는 성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마침내 자신의 세계를 지켜낸다. 말하자면 케이트 블란쳇이 그려내는 인물들은, 찬란하지만은 않은 현실을 알고 있되 어떤 식으로든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만큼은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스크린 밖에서의 케이트 블란쳇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모른다. 알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그가 작품에서 보여준 삶의 태도만으로도 그녀를 좋아할 이유는 충분하니까. 그리고 아마도, 실제의 케이트 블란쳇 또한 사려 깊고 품격 있는 그의 캐릭터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 엘프의 존재를 믿는 마음으로. – 황효진(웹매거진 <아이즈> 기자)

 

 

몸도 마음도 건강한 배우, 김혜수
‘건강하다’는 올해로 데뷔 30년을 맞은 배 우 김혜수에게 가장 익숙한 수식어다. 재미있는 일이다. 성숙한 외모로 감독의 눈에 띄어 열여섯의 나이에 밤무대 가수 역할로 데뷔한 배우에게 가장 어울리는 단어가 ‘건강’이라니. 어쩌면 세상은 조금 겁이 났을지도 모른다. 십대 소녀가 당당히 내보이던 ‘한국 정서와 맞지 않는’ 성적 매력과 그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있는 성실한 배우로서의 얼굴을 감당하기에, 한국의 80년대는 아직 한참이나 미숙했다.

허둥지둥하던 이들이 다급히 꺼내든 ‘건강’ 카드는 그렇게 오랫동안 배우 김혜수 곁에 머물렀다. 드라마< 순심이>와 <세노야>, 영화 <첫사랑> 등 청순과 가련으로 빚은 초기작들은 물론 드라마 <파일럿>, <사랑과 결혼> 같은 신세대물, 영화 <남자는 괴로워>나 <닥터 봉> 같은 코미디에까지 도전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심지어 <한지붕 세가족>, <짝> 같은 홈 드라마나 영화 <얼굴 없는 미녀>, <분홍신> 같은 극단적인 장르물 도전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에워싼 ‘건강한’ 아우라는 좀처럼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김혜수의 지난 30년은, 데뷔 시절부터 규정된 스스로의 이미지와의 싸움이었다. 그 기나긴 싸움에서 그녀는 기어코 살아남았다. 필살기는 다음과 같다. ‘경기의 우위는 선점한 채, 결정적 한 방을 위한 외부 지원군을 끊임없이 흡수한다.’ 그녀는 배우로서의 욕심을 숨기지 않는 동시에 ‘청룡 영화상’의 섹시하고 매혹적인 안방마님 자리를 2년간 놓지 않았고, <김혜수의 플러스유>나 <김혜수의 W> 같은 토크쇼를 통해 사교적이고 지적인 매력을 꾸준히 어필했다. 수준급 회화 실력이나 넓고 깊은 음악적 소양도 유효 카드로 작용했다. 김혜수의 근사한 취향은 그가 배우로서의 레이스를 지속하게 만들어준 동력이었다.

‘에지 있게!’를 외치는 잡지 기자(<스타일>)나 전무후무한 카리스마를 지닌 조직의 우두머리 ‘엄마’( <차이나타운>), 비밀과 피로를 양 어깨에 쌓은 형사 차수현(<시그널>)까지 최근 그녀가 소화해낸 독보적 캐릭터들은 이렇듯 그저 하늘에서 떨어진 행운이 아닌, 배우 혹은 자연인 김혜수가 부지런히 만들어낸 땀의 흔적들이었다. 만일 그 성실한 세월의 흐름을 ‘건강’이라는 단어로 대표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대로 기쁠 것이다. 섹시와 호감이 여전히 공존하기 힘든 이 땅에 이토록 ‘건강’한 배우가 실재한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 김윤하(대중문화평론가)

 

 

이토록 영리한 리즈 위더스푼
리즈 위더스푼이 똑똑하지 않은 적이 있었나? 14살에 연기를 시작한 이래 그는 늘 기막히게 영리했다. <일렉션>과 <아메리칸 사이코>로 연기력을 입증하고 곧이어 <금발이 너무해>를 골라내는 안목이라니. 젊은 여성에게 덧씌워진 편견을 유쾌하게 전복한 이 사랑스러운 코미디를 통해 리즈 위더스푼은 미모와 지성을 동시에 갖춘 할리우드의 톱 배우로 떠올랐다. 그 이후에 선보인 조니 캐시와 준 카터의 전기 영화 <앙코르>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 <앙코르>가 리즈 위더스푼에게 안겨준 수많은 상에는 오스카 여우주연상도 있었다. 못하는 게 없는 야무진 똑쟁이. 그것이 2000년대 리즈 위더스푼의 이미지였고, 사실이기도 했다.

그러나 순탄하게 계속될 듯했던 리즈 위더스푼의 전성기는 갑작스럽게 끝나버렸다. 한 여배우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남성 중심적 대규모 블록버스터에 돈이 몰리고 슈퍼 히어로 붐이 일어나면서 여배우들에게 돌아올 역이 더 줄어든 탓이었다. 리즈 위더스푼 같은 배우가 이제는 왜 좋은 영화를 안 하지? 팬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동안 그는 인생의 새로운 단계를 준비하고 있었다. 오지 않을 기회를 기다리는 대신 직접 여성들을 위한 영화를 만들어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렇게 ‘퍼시픽 스탠더드’사가 탄생했다. 베테랑 여성 제작자 브루나 파판드리아와 리즈 위더스푼이 함께 설립한 이 소규모 제작사가 지난해 선보인 첫 두 작품, <나를 찾아줘>와 <와일드>는 모두 홈런을 날렸다. 본인이 직접 출연하기까지 한 <와일드>로 <나를 찾아줘>의 주인공 로자먼드 파이크와 함께 2015년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 나란히 오른 것이다. 둘 다 원작의 가치를 빠르게 알아본 리즈 위더스푼의 기민함 덕에 탄생한 작품들이었다. 초심자의 운이 아니다. 평소 열렬한 독자로서 축적해온 경험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HBO에서 방영을 앞둔 TV 드라마 <커져버린 사소한 거짓말(Big Little Lies)> 역시 리안 모리아티의 유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작품이다. 리즈 위더스푼과 마찬가지로 제작자로도 활동 중인 니콜 키드먼과 손을 잡았다. 이어서 바비 인형을 만든 루스 핸들러의 전기 영화 역시 모습을 드러낼 준비를 하고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리즈 위더스푼이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럴지 몰라도 그의 행보를 오래 지켜본 여성 팬들에게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십수 년 전, <금발이 너무해>의 엘 우즈가 ‘머리가 텅 빈 금발미녀’라며 자신을 무시했던 전 남자친구에게 “하버드 로스쿨? 별로 안 어렵던데?”라며 능청을 떠는 명장면을 몇 번씩 돌려보며 환호했던 우리가 아니던가. ‘퍼시픽 스탠더드’는 핑계만 많고 변화에는 굼뜬 할리우드에 리즈 위더스푼이 날리는 통쾌한 반격이다. “여성을 위한 영화 만들기? 별로 안 어렵던데?” 멋있어도 너무 멋있다. 덕분에 나도 이렇게 외칠 수 있게 되었다. 언니, 제 돈 가져가세요! – 와조(칼럼니스트)

 

 

줄리안 무어의 성숙한 아름다움
줄리안 무어가 영화배우로 활동하기 시작한 건 서른 살을 넘어서였고, 주연을 맡은 건 30대 중반부터였다. 막 활동을 시작한 90년대에도 이 배우에게 ‘나이는 들었지만 예쁜’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42번가의 바냐>나 <요람을 흔드는 손>에 나오는 무어를 보면 ‘참, 풋풋하다!’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지만 그래도 그건 우리가 습관적으로 생각하는 여자연예인의 20대 젊음과는 거리가 있다. 기억력 좋은 일부 관객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시절의 무어를 알지 못한다.

‘어디까지가 젊은이인가’처럼 무의미한 질문은 없다. 하지만 젊음의 기준과는 별도로 내 기억의 줄리안 무어는 언제나 어른이었다. 꼭 성숙하거나 현명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많았다. <에브리바디 올라잇>의 줄스나 <세비지 그레이스>의 바바라를 성숙한 사람들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무어의 연기는 그런 어른스러운 성숙의 환상이 깨질 때에 오히려 빛을 발한다. 그 환상은<파 프롬 헤븐>이나 <디 아워스>에서처럼 우아하고 섬세하게 부서지기도 하지만 <세비지 그레이스>에서처럼 천박하게 폭발하기도 한다. 그 어느 경우에도 무어의 캐릭터는 안정된 중도의 길을 걷지 않는다. 캐릭터가 아슬아슬하게 본래의 궤도로 돌아온다고 해도 관객들은 무어의 연기를 통해 그 과정의 상처를 본다.

줄리안 무어는 오페라 프리마돈나와 같은 배우이다. 자신을 감추는 것은 배우로서 무어의 미덕이 아니다. 영화 속에서 무어가 가장 아름다울 때는 언제나 한 편의 아리아를 부르는 오페라 가수처럼 보인다. 그리고 대부분의 오페라 아리아가 그렇듯, 그 텍스트가 보여주는 것은 극단적인 하강이나 상승이다. 무어는 하강에 능하다. 꼭 그 오페라에서 포르테로 고함을 지를 필요는 없다. <스틸 앨리스>의 클라이맥스는 작디작은 피아니시모로 끝나지만 그 울림은 얼마나 크던가.

많은 여성 연예인의 팬들은 그녀들이 나이 먹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제 50대 중반에 접어든 무어는 헬렌 미렌이나 메릴 스트립처럼 축복받은 예외이다. 나이 듦은 무어에게 새로운 연기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기회일 것이며 팬들은 진심으로 그 단계를 기다린다. 단지 할리우드가 그런 역할을 꾸준히 제공할 만큼 성숙해질 수 있을지는 다른 문제이다. – 듀나(영화평론가, SF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