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는 고루함을 거부하며 독창을 가능케 한다. 웃음이 심각하고 어려웠던 패션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면 과장일까? 동시대가 원하는 가장 트렌디하고 쿨한 것은 ‘웃긴 것’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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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1 비누 거품이 나오는 세차장으로 변신한 모스키노의 런웨이. 2 재미있는 남자 제레미 스콧의 2016 봄/여름 컬렉션. 3 통통 튀는 색상의 그래픽 패턴이 돋보이는 미우미우 슈즈.

해가 지날수록 나이는 드는데 일상은 점점 유치해지고 있다. 아이를 키우기 때문일까? 집 안을 점거한 어벤저스 스티커와 공룡 피규어 때문인가? 어느 정도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본질은 나를 둘러싼 패션이 그렇게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스키노의 유리 세정제 휴대폰 케이스, 화난 얼굴을 하고 있는 펜디의 버그 명함 지갑, 스마일 마크를 부착한 조수아 샌더스의 슬립온은 우울한 일투성이인 일상에 ‘픽’하고 웃음이라도 지을 수 있는 말랑한 여유를 안겨준다. ‘우리는 옷을 파는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를 판다’라고 말하며 때때로 하이패션적 유머를 구사하는 미우치아 프라다처럼, 엉뚱하고 기발한 접근 방법은 패션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사실 유머가 시즌의 트렌드가 된 적은 이전에도 종종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단순히 올해의 유행이라고 말하기 무색할 정도로 웃기고 재미난 것들만이 넘쳐난다. 패션은 본래 그저 가벼운 유희였던 것마냥. 평등이 재미를 불러들이다 젠체하던 패션 피플들은 모두 어디로 간 걸까? 무채색의 옷을 차려입고 모든 것이 심드렁하다는 무표정한 얼굴로 런웨이를 바라보던 이들 말이다. 2000년대 초만해도 하이엔드 패션은 대중들이 경제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접근하기 어려운 대상이었다. 그런데 패션쇼의 풍경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어떤 디자이너가 얼마나 심오한 주제로 복잡한 재단 기술을 통해 대단한 옷을 만들었나에 대한 관심은 프론트로를 차지한 셀러브리티들에게 집중되거나 팔색조처럼 차려입고 쇼장을 찾는 이들에게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주목을 끌어 카메라에 포착되기 위해 더 자극적이고 익살스러운 요소가 필요했다. 시선을 끄는 문구나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만화 캐릭터 같은 것을 더하면 파급 효과가 배가 됐다. 실시간으로 전파되는 스마트폰과 SNS 덕분에 이미지는 대중화되고 개인화되었다. 마치 팝아트가 예술의 아우라를 붕괴시킨 것처럼 하이패션 역시 대중에게 신비의 권력을 내주게 된 것이다. 결과 스트리트 패션이 전통의 하이패션 하우스를 점거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힙합 아이콘이 패션을 움직였고, 사람들은 스냅백을 쓰기 시작했다. 글로벌 브랜드들은 너도나도 젊고 어리며 재미난 것들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그것이 스트리트 문화의 핵심인 유머가 이토록 유행하는 이유이다.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
2016년 봄/여름 컬렉션에도 웃음을 전하는 재미난 퍼포먼스와 의상, 긍정의 무드가 가득하다. 유머에 있어서는 부동의 1위, 모스키노는 역시나 재기발랄함을 무대에 올렸다. 실용 가치에 대한 평가는 뒤로하고 아이디어만으로는 끝내주는 옷들이 런웨이에 펼쳐졌다. 맥도널드, 바비, 테디베어로 이어진 디자이너 제레미 스콧의 익살스러움은 세차장과 공사장을 모티브로 구성한 이번 시즌에 정점을 찍었다. 바리케이드, 공사장 신호판, 거품 방울을 내뿜는 세차기가 설치된 무대 위로 모델들이 쏟아져 나올 때 쇼를 보던 사람들은 일제히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촬영을 시작하고, 자신의 SNS에 사진을 올리느라 정작 ‘패션’은 뒷전이고 ‘쇼’만 즐기는 분위기였다. 퍼포먼스로 치자면 돌체앤가바나도 빠지지 않는다. 고국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듀오 디자이너는 ‘Italia is Love’ 를 테마로 이탈리아 작은 마을 광장을 쇼장에 재현했고, 각 지역을 대표하는 관광 명소 프린트의 의상을 입은 모델들이 런웨이를 누볐다. 뭐 이 정도쯤이라면 모스키노에 대적할 수 없다. 하지만 반전은 여기서부터. 모델들은 핸드폰을 들고 연신 ‘셀피’를 찍었고 런웨이와 백스테이지에서 그들이 직접 찍은 사진은 실시간으로 무대 위 스크린과 돌체앤가바나의 소셜 플랫폼을 채웠다. 지금의 트렌드를 위트 있게 반영한 영민한 센스는 돌체앤가바나가 역시 세계 최고! 하지만 웃긴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패션 아이콘은 따로 있다. 바로 마크 제이콥스. 지금에야 스트리트 아티스트와의 협업이 흔해 빠졌다지만 무라카미 다카시, 스테판 스프라우스 등 팝아티스트와의 협업으로 알록달록한 스피디 가방을 만들어내며 가장 먼저 센세이션을 일으킨 인물은 루이 비통 시절 마크 제이콥스였고, 상업의 최전선에서 유르겐 텔러와 비상업적인 광고 캠페인을 처음 선보인 것도 그였다. 피날레에 스폰지밥 가방을 들고 나오고 치마를 입고 다니는 그는 언제나 유머로 하이패션을 비트는 것을 좋아한다. 마크 제이콥스의 가벼운 유머는 2016년 봄/여름 컬렉션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시퀸을 장식한 성조기 가방, 미국적인 요소를 상징하는 와펜과 브로치,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캐릭터 미키마우스가 뒤엉켜 마크 제이콥스 표 맥시멀리즘을 완성했다. 캣워크 중 모델들이 갑자기 넘어졌다 일어나 춤을 추는 예상치 못한 광경을 선보인 오프닝 세레모니, 밥 말리를 연상시키는 크로셰 비키니를 입은 지지 하디드가 물속으로 뛰어드는 퍼포먼스를 보여준 타미 힐피거, 별무늬 복면을 쓴 모델을 내세운 가레스 퓨 등 디자이너들은 점점 더 의상보다는 쇼를 흥미롭게 보여주는 방식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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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모스키노 컬렉션에서는 ‘윈덱스’ 스프레이 모양의 향수를 선보이기도 했다. 5 마크 제이콥스는 영화 <사이코>를 팝아트적으로 의상에 접목시켰다. 6 하나, 둘, 셋 찰칵! 셀피를 찍는 돌체앤가바나의 모델. 7 펜디의 버그 키링. 8 샤넬의 깜찍한 비행기 브로치. 9 유아적이기까지 한 지암바 컬렉션. 10 대중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플레이 노모어의 샤이 스타.

스타워즈가 패션이 되다
한없이 가볍고 유쾌한 패션은 2년 전 제레미 스콧이 모스키노에서 처음으로 맥도널드 세상을 만들고, 펜디가 복슬복슬한 털을 지닌 버그 참을 처음 선보이고, 샤넬이 파리의 그랑 팔레를 슈퍼마켓으로 변신시켰던 거기까지가 딱 좋았다. 이건 키덜트적인 취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생기발랄했고 신선했다. 스트리트 브랜드 SSUR이 언어유희로 꼼데가르송을 꼼데퍽다운(Comme Des Fuck Down)이라고 표현하거나 브라이언리히텐버거가 세린느를 펠린느(Feline)로 표기한 타이포그래피 티셔츠는 해학을 담아서 좋았고, 미키마우스, 스누피 등 캐릭터와의 협업은 순수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어린 시설을 상기시켜 치유의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소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스타그램을 열면 온갖 캐릭터가 난무하는 아이템이 가득하고 사람들은 ‘귀요미’에게 무조건 반사적으로 ‘좋아요’를 누르는 듯하다. 아니 어쩌면 반대로 ‘귀요미’들이 ‘좋아요’를 갈구하는 것일지도. 이런 시류를 타고 패션에서 상종가를 친 건 다름아닌 캐릭터 산업이다. 2015년 한 해만 해도 ‘리미티드 에디션’이라는 명분으로 옷, 신발, 액세서리를 넘어 화장품 패키지에서 술까지 얼마나 많은 캐릭터 컬래버레이션이 쏟아져 나왔는지 생각해보라. 새로운 해가 시작되자마자 카카오 프렌즈가 자체 캐릭터 액세서리 라인을 선보인다는 소식을 전해왔고, 에센셜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커밍스텝은 <쿵푸 팬더>와 함께했다. <스타워즈>는 캐릭터가 패션의 주축이 되었음을 다시 한 번 실감케 한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캐릭터가 아닌 ‘덕후’들의 상징이었던 다스 베이더가 패션계를 점령한거다. 신세계 백화점은 크리스마스 콘셉트를 <스타워즈>로 잡았고 21개의 패션 브랜드와 협업하여 연말 선물을 선보였다. 아디다스도 유니클로도, 어그도 <스타워즈>를 택했다. “리미티드 에디션의 가치가 예전보다 떨어진 것은 확실해요. 그렇지만 브랜드의 입장에선 이보다 안전한 마케팅은 없죠. 한정된 제품을 제일 먼저 소유했다는 것은 소셜 미디어에 과시하기 좋은 ‘템’이니까요. 게다가 캐릭터의 개런티가 그렇게 비싸지 않다는 거예요. 상업성도 검증되었고 그러니 너도나도 캐릭터들과 협업을 하는 거죠.” 이름을 밝히길 꺼려한 어느 브랜드의 홍보 담당자는 캐릭터 산업은 불황을 어떻게든 넘겨보자는 브랜드의 마케팅 전략이라고 말한다.

세상은 웃음거리로 넘쳐나도 디지털 세상에서 살기는 더 피곤해졌다.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과 만난 소셜 미디어는 모든 사람이 브랜드화되기를 강요하는 듯 더 재미있고 웃긴 것을 탐닉하게 만든다. 피곤해서 세상이 재미있어진 건지, 세상이 재미있어져야 해서 피곤한 건지, 어떤 것이 먼저인지는 도통 모르겠지만 소비 패턴이 변화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비싸고 어려운 것보다는 저렴하고 재미있으며 향유하고 금방 잊어버려도 되는 것들이 사랑받고 있다. 시대적 변화에 유연 하게 합류하는 코드는 웃음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 소설가 임어당은 <유머와 인생>에서 이렇게 말했다. “반전이 있더라도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겉도는 웃음이 되고 만다. (중략) 유머는 연습이나 반짝 아이디어라기보다는 삶의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