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미국 전역을 뜨겁게 달군 세포라의‘ K- 뷰티’ 캠페인의 뒤에는 바로 한국인 이보영 상무가 있었다. 뿐만 아니다. 이미 꽤 많은 한국 여성이 글로벌 브랜드의 아시아 태평양 지역을 총괄하는 마케팅 디렉터로 활약하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하지 못할 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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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의 화장품 브랜드가 집결해 있는 세포라에서 근무하는 이보영이 가장 사랑하는 한국의 제품들.

세계를 움직이는 크리에이터 | 이보영
세포라의 책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세포라의 전반적인 비주얼부터 매장, 스토어, 콘텐츠 프로덕트 등 크리에이티브 팀을 총괄하고 있다. 지난 10월, 미국 전역의 세포라를 장식한 K-뷰티 캠페인의 그림을 그린 주인공이다.

그동안의 경력이 궁금하다. 
대학 때 미국으로 유학 왔다가 그래픽디자인에 흥미를 느껴 영국의 RCA(Royal College of Art)에 진학했다. 그곳에서 비주얼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한 후 미국 <나일론> 잡지를 거쳐 슈에무라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로 일했다. 이후 한국에 들어와 신세 계에서 신세계백화점, SSG 등의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툴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에서 3~4년을 지내니 고인 물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당시 한국 시장은 아직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직업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않아 전략 기획팀, 마케팅 파트의 한 업무로 분류되기 십상이었다. 고민이 많던 차에 세포라에서 연락이 왔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가?
‘Thought Reader’, ‘Brand Builder’, ‘Story Teller’. 브랜드의 콘셉트를 만들고, 철학과 스토리를 입히며, 브랜드가 나아가야 할 방향까지 그림을 그리는 역할이다.

세포라를 선택한 이유는?
아버지가 화장품 원재료를 수입하는 일을 하셨다. 덕분에 어릴 때부터 화장품과 가깝게 지냈다. CD로서의 첫 프로젝트 역시 RCA에 다닐 때 기획한 분스파였고, 이후 뷰티는 나와 늘 친숙한 산업이었다. 무엇보다 여자로서 ‘ 여자들의 놀이터’라는 세포라의 콘셉트가 마음에 들었다.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세포라에서 한국인 CD를 기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10여 년 전 미국 슈에무라에서 CD로 일할 당시 마케팅 파트너가 완전 신입이었다. 공들여 업무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해주고, 서로 의기투합하여 각종 프로젝트를 진행했었는데, 알고 보니 그 친구가 세포라로 이직하여 나를 추천했더라. 이후 세포라에 출근했더니 내 이름을 기억하는 동료들이 많아서 깜짝 놀랐다. 미국에서 한국에 들어왔을 때 미국 내 커리어가 단절될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열심히 일한다면 언젠가는 그 노력이 긍정적인 부메랑이 되어 다시 날아온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얼마 전 K-뷰티 캠페인을 디렉팅하며 화제의 중심에 올랐다.
3년 전 면접을 보기 위해 세포라 본사를 찾았을 때 그들은 이미 나에게 -K뷰티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냈었다. 마케팅 파트에서 K-뷰티의 핵심을 스킨케어로, 그중에서도 핵심을 ‘Dewy Skin’, 즉 촉촉한 피부로 규정해왔더라. 여기서 나의 역할은 한국의 스킨케어에 효과적인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툴을 적용해 이슈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가장 한국적인 이미지를 형상화하기 위해 가채를 두르고 한복을 입은 한국 모델을 촬영했다.

메이크업이 아닌 스킨케어에 집중한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은 뷰티의 시작점이 스킨케어다. 반면 서양은 얼굴에 색칠을 하는 것부터를 뷰티로 인식한다. 요가를 하고 난 후 한국 여자라면 세안을 하고 공들여 스킨케어를 하지만, 미국 여자들은 땀을 닦고 바로 립스틱을 바른다. 그게 차이점이다. 한국 여자들의 고운 피부 비결은 스킨케어에서 시작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 내부적으로는 케이팝 가수를 모델로 내세우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반대했다. 화려한 케이팝 가수가 한국 뷰티의 아이덴티티를 상징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네 엄마들이 정성 들여 스킨과 로션을 바르던 그 전통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 캠페인으로 인해 한국 화장품뿐 아니라 세포라 전체의 스킨케어 매출이 상승했다.

전 세계적으로 K-뷰티가 성공한 비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외모에 많은 돈을 투자하고, 그만큼 결과로 바로 나타나기를 바라는 한국인의 성향 덕에 국내 화장품 시장 자체가 엄청나게 성장했다. 그리고 유명한 글로벌 화장품 브랜드의 제조 공장들이 한국에 위치해 있다. 이미 화장품 제조 기술이 수준급에 올랐다는 의미다. 여기에 과거와 달리 현 세대는 브랜드를 만들고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충분한 창의력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한류의 여파로 세계의 관심이 한국에 쏠려 있지 않나. 그러니 한국의 화장품이 성공할 수밖에! 국내 시장을 살펴보면 투쿨포스쿨, 이니스프리, 더 히스토리후처럼 브랜드의 정체성을 잘 확립한 브랜드들이 까다로운 한국 여자들의 니즈를 만족시키며 성장해가고 있다. 오히려 진입이 너무 어려운 시장이 되었을 정도다.

특히 좋아하는 한국의 화장품이 있다면?
⇢ 빌리프의 더 트루 크림 아쿠아 밤. 요즘 꽂힌 제품. 그 촉촉함에 첫눈에 반했다.
⇢ 아모레퍼시픽의 안티에이징 컬러 컨트롤 쿠션. 언제 어디서나 사용한다. 집, 차, 사무실, 가방 등 4개가 필요할 정도로 애용한다.
⇢ 손앤박의 립 크레용. 발색이 뛰어나고 촉촉해서 좋다. 물론, 컬러도 너무 예쁘다.

다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에 대한 얘기로 돌아가보자.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출하는 작업이다. 프로젝트를 맡았을 때 어떻게 트렌드를 짚고 방향을 좁혀나가나?
시장과 고객의 니즈를 읽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프로젝트가 주어지면 일단 그 시장을 완벽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각종 리서치 자료 및 해당 분야에 대한 잡지를 섭렵해서 전문적인 지식을 쌓는다. 여기에 그간 일하면서 쌓인 본능적인 감을 더한다. 책 속의 문장 하나, 전시회나 영화 속의 특정 장면 등 감이란 어디에서든 얻을 수 있다.

그래도 트렌드를 한발 앞서서 읽어내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나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니다. 팀이 함께 이뤄가는 것이다. 나는 브레인스토밍을 가장 중요시 여긴다. 일단 책을 많이 읽는다. 우리의 프로젝트에 국한하지 않고, 시장의 전반적인 흐름을 보고 듣고 읽으며 시야를 넓혀야 한다. 그런 다음, 팀원들이 모여 이를 정리하다 보면 각자가 감지한 키워드가 모아진다. 그중 공통점을 살펴보면 방향이 좁혀진다.

어떤 책을 얼마나 읽나?
마케팅, 브랜딩 관련 책부터 인간 행동 심리 관련 서적까지 책을 정말 많이 읽는다. 유통도 결국은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아야 한다. 오디오 북(듣는 책)을 출퇴근 차 안에서도 수시로 듣는다. 이것이 나에게는 생존 기술이 되었다. 디자인을 전공해서 마케팅이나 비즈니즈 용어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데, 오디오 북으로 끊임없이 들으며 그런 단어와 표현을 입에 붙게 했다. 덕분에 비즈니스 파트너 앞에서 해야 하는 프레젠테이션이 좀 더 수월해졌다. 물론, 전반적인 영감을 얻는 데도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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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수가 추천하는 제품은 다이내믹한 글로벌 마케터의 생활 방식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글로벌 뷰티 마케터 | 정은수
에스티 로더 컴퍼니즈 아시아 태평양의 바비 브라운 아시아 마케팅 총괄 디렉터. 한국, 중국, 일본, 싱가포르 등 아시아 국가들과 호주, 뉴질랜드 등 아시아 태평양 총 13개 국가를 담당하고 있다. 홍콩에서 거주 중. 담당 국 가들의 전반적인 마케팅 전략을 세우는 역할로 미국 본사에는 아시아 국가의 입장을 대변해주고, 담당 국가에는 본사의 전략을 현지에 맞춰 가이드하는 것이 주요 업무다.

어떻게 이런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나.
화장품 시장에서만 14년 이상 근무했다. 한국에서 대학 졸업 후 프로덕트 매니저로 입사하여 차근차근 단계를 밟았다. 더 바디샵 코리아에서 첫 업무를 시작하고 이후 디올, 조르지오 아르마니 등을 거쳤다. 로레알 코리아에서 조르지오 아르마니 및 디자이너 향수 파트의 브랜드 제너럴 매니저로 승진했고 이후 홍콩으로 이주해 슈에무라의 아시아 마케팅 총괄로 근무했다.

과거에 비해 글로벌 브랜드의 요직에 근무하는 한국인이 많아졌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일본이 아시아 시장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아시아의 유일무이한 시장이었다. 그리고 글로벌 브랜드의 아시아 헤드 오피스가 대부분 홍콩이나 싱가포르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지금 나와 같은 업무는 대부분 일본이나 홍콩, 싱가포르 사람들이 담당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인이 각광받고 있는 이유가 있나?
한국인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한국 시장에서의 경험을 높게 평가하더라. 어려운 상황에서도 문제를 해결하고, 끈질기게 목표한 바를 이뤄내는 한국 팀의 성향을 좋게 평가하기 때문인 것 같다. 한국인의 위기 대처 능력을 높게 인정해준다. 화장품 시장은 변화가 급격하고 경쟁이 치열할 뿐 아니라 각 나라의 경제 상황이나 이슈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는다. 때문에 마케터에게 위기 대처 능력이 중요한 덕목일 수밖에 없다.

K-뷰티 붐이 한창이다. 글로벌 브랜드 마케터로서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실제로 2013년부터 아시아를 중심으로 K-뷰티 붐이 시작되었고, 작년에는 유럽 시장까지 확대되었다. 해당 시장의 소비자들이 한국의 화장품을 사랑하게 되면서 글로벌 브랜드들의 입장도 많이 바뀌었다. 특히 한국 브랜드들이 까다로운 중국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했을 뿐 아니라 착실하게 국제 시장에서의 점유율을 높여가는 행보를 보며 한국 시장에 대한 시각이 달라지고 있다. 한국 시장의 트렌드가 중국에 미치는 큰 파급 효과 때문에 더 관심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전지현 립스틱 등 2 014년에 불어온 스타 립스틱의 열풍을 통해, 한국에서 일어난 트렌드가 글로벌 비즈니스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이미 증명된 바 있다. 이런 관심은 앞으로도 분명 더 확대될 것이다.

외국에서, 글로벌 그룹에서 일할 때 한국인이기 때문에 갖는 장점 혹은 단점이 있다면?
업무를 하는 데 국적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국제적인 경험을 얼마나 쌓았느냐, 마케터로서의 자질이 어떠한가가 더 중요하다. 굳이 꼽는다면, 역동적인 성향에 까다로운 취향을 가진 한국 소비자를 만족시킨 경험 자체가 한국 출신 마케터들의 업무 능력 및 추진력을 직간접적으로 증명해주는 것 같다. 반대로 특유의 급한 성격과 추진력 때문에 한국인들이 지나치게 공격적이거나, 장기적인 그림을 그려가는 뚝심이 부족하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글로벌 뷰티 마케터로서 반드시 지키고자 하는 본인만의 원칙이 있을 것이다.
여러 나라를 담당하다 보니 생각의 틀에 갇히지 않는 것이 중요하더라. 나라마다 문화가 다르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13개 나라의 문화, 역사를 온전히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되도록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공부한다. 유연함이야말로 글로벌 마케터의 중요한 요건이라 생각한다.

글로벌 뷰티 마케터가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화장품 산업은 겉은 매우 화려해 보이지만, 업무 강도가 매우 높고 업무 환경이 대기업처럼 갖춰지지 않은 경우가 많다. 따라서 데이터 베이스나 각종 자원이 지원되지 않는 한정된 상황에도 기회를 놓치지 않는 순발력과 감각이 필요하다. 장기적인 커리어 플랜도 꼭 미리 짜두라고 권하고 싶다. 업무 강도가 높기 때문에 목표 없이 일하다 보면 일에 잠식당해 지치기 쉽다.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나?
현재 아시아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며 국가별로도 매우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는 중국 시장이 포함된 곳이기도 하다. 아시아 전문가로서 경험과 시야를 탄탄하게 넓혀가고 싶다. 스스로 자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 때까지 아시아 총괄 마케터로서의 업무를 계속할 것이다.

화장품 마케터로서 외모 관리도 중요할 것 같다. 애용하는 제품이 있다면?
⇢ 바비 브라운의 엑스트라 밤 린스. 업무 시간이 길고 피곤한 상태에서 메이크업을 지우기 일쑤기 때문에 피부를 진정시켜주는 밤 타입 클렌저가 필수다.
⇢ 바비 브라운의 립 칼라 9호 번트 레드. 매일 풀 메이크업을 하고 싶지만 숨가쁜 업무 스케줄상 불가능할 때가 많다. 베이스 메이크업을 깔끔하게 하고 레드 립스틱만 하나 바르면 프로페셔널해 보일 수 있어 매일 꼭 챙겨 다닌다.
⇢ 바비 브라운의 엑스트라 모이스춰라이징 밤. 출장이 잦아 비행기 안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다 보니, 피부가 점점 건조해졌다. 리치한 크림을 얼굴에 충분히 바르고 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