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언젠가는 40대를 지나 50대로, 그리고 언젠가 호호백발의 할머니가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여기 닮고 싶은 여자들처럼, 그 시간에 맞는 아름다움을 갖게 되길. 그때를 위해 롤 모델을 찾았다.



1 수잔 손택 / 1933~2004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수잔 손택이 쓴 <타인의 고통>은 전쟁과 기아, 또는 질병 등 타인의 실제적 고통을 미디어를 통해 소비의 수단, 유흥으로 삼는 미디어와 문화의 이면을 규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영화 <러브 스토리>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지금도 수많은 백혈병 환자들이 고통을 받고, 목숨을 잃고 있지만 우리에게 <러브 스토리>는 애절한 사랑 이야기일 따름이다. 수잔 손택은 생전 뉴욕 지성계의 여왕, 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 미국 문단의 다크 레이디로 불렸다. 또 소설가이자 수필가, 예술평론가, 극작가, 연극연출가, 영화감독, 사회운동가로 활약했고, 페미니스트이기도 했다. 인권과 사회 문제에도 거침없는 비판과 투쟁으로 맞서는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던 그녀는 1988년 올림픽 무드로 넘실대던 서울에 국제펜클럽 지부회장으로 방문해, 정치범으로 구속되어 있던 김남주, 김현장 시인 등 문인들의 석방을 촉구하기도 했다. 골수성 백혈병과 싸우면서 마지막까지 펜을 놓지 않은 그녀의 마지막 날은, 동반자인 애니 레보비츠의 사진으로 남았다.

2 프랑수아즈 사강 / 1935~2004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 자신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
이곳에 있는 다른 롤 모델과 달리 프랑수아즈 사강은 자기 멋대로 살았다. 어느 날, 시간의 흐름에 굴복해 차분하고 자연적인 삶을 살았다는 동화책 같은 이야기는 없다. 죽을 때까지 맘대로였고, 코카인, 도박, 카레이싱 등 위험한 취미를 놓지 않아 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다. 프랑수아즈 사강은 20대에 발표한 <슬픔이여 안녕>으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에 올랐다. 그후 <어떤 미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등 걸출한 작품을 내놓으며 20세기 현대 프랑스 작가 중 가장 많은 독자를 보유했다. 이들 작품으로 사강은 막대한 인세 수입을 벌어들이게 되었는데, 그 인세의 대부분을 도박과 사치에 사용했다. 23세 때 결혼했으나 곧 이혼하고, 27세 때 재혼을 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지만 다시 이혼했다. 그녀의 마지막 작품 중 하나인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에는 그녀의 인생관이 잘 드러나 있다. 어쨌든 한 번뿐인 인생이기에 즐겨야 했으며, 후회 없이 살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자유주의자로 살다가, 자유주의자로 죽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의 인생은 그녀 자신만의 것이었다.

 

3 제인 버킨 / 1946~
“늘 웃어라! 어린 친구들은 아직 깨닫지 못하겠지만 나중에 다른 사람보다 10년 정도는 더 젊어질 것이다. 세상을 향한 호기심과 유머감각도 노화를 늦추는 데 도움이 된다.”
제인 버킨은 아주 특별한 삶을 살고 있다. 9170년대를 상징하는 뮤지션이자 배우였고, 패션 역사에 길이 남을 아이콘이며, 언제나 뜨거운 사랑을 했다. 세 번의 결혼으로 엄마의 아름다움과 재능을 닮은 세 딸도 있다(큰딸은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런 그녀가 음악 외에 가장 열정을 쏟는 일은 이 지구를 위해 좀 더 나은 일을 하는 것이다. 환경과 인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온 제인 버킨은 일본 지진 피해자를 위한 월드 투어를 진행하기도 했고, 그 일환으로 한국에서 공연을 열기도 했다. 최근 제인 버킨은 악어로 된 버킨백을 만드는 잔인한 과정에 대해 에르메스 측에 항의했다." 내 이름이 붙은 가방을 만들기 위해 악어들이 잔인하게 죽고 있다. 국제적인 표준이 정착될 때까지 ‘버킨백’이라는 제품명을 바꾸기를 요청한다”고 성명서를 통해 발표했다. 톱스타인 제인 버킨은 여전히 소박하고 따뜻한 삶을 말한다. 그녀는 <얼루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족이나 이웃을 돌볼 수 있고, 좋은 어머니나 아버지가 되는 걸로도 자신의 역할을 다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하는 일도 의무감이나 희생에서 온 것은 아니었다. 내가 이 일을 함으로써 행복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 공연에서 팬츠와 화이트 셔츠 차림으로 무대에 선 그녀의 마지막 말은 이랬다. “Keep Warm. Take Care Yourself.”

 

4 마돈나 / 1958~
“용기 있다는 것은 답례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누군가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을 그저 주는 것이다. 우리는 넘어지거나 쉽게 상처받길 원치 않으므로, 사랑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팝의 황제가 마이클 잭슨이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팝의 여왕은? 그동안 휘트니 휴스턴, 머라이어 캐리, 브리트니 스피어스 등 쟁쟁한 여자 팝 가수가 등장했지만 결국 팝의 여왕은 마돈나의 차지가 된 것 같다. 그녀의 엄청난 지구력 때문이다. 1983년, 그러니까 <얼루어> 독자의 반은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 1집 앨범 <마돈나>로 데뷔한 이후, 그녀는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그 당시 라이벌은 신디 로퍼였고 신디 로퍼가 인기도 더 많았으며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 이후 마돈나의 라이벌은 늘 바뀌었지만 마돈나는 그 자리에 있었다. 또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브리트니 스피어스, 비욘세, 레이디 가가 등이 그녀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고백했고, 함께 무대에 오르며 멋진 퍼포먼스를 보이기도 했다. 이제 예순을 바라보는 그녀지만, 그녀는 여전히 무대 위를 왕성하게 뛰어다닌다. 비욘세만큼 멋진 허벅지로!

5 윤여정 / 1947~
“사람들은 내게 멋있다고 한다. 여배우들은 예뻐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미인이라고 할 수 없으니까 멋있다고 하는 것 같다. 그래도 예쁘다고 하는 것보다는 낫다.” 

윤여정은 한 번도 ‘여배우 트로이카’였던 적이 없다. 당대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배우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에도 지금도 윤여정은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연기를 했다. <화녀>, <충녀> 등은 한국 영화에 길이 남을 작품이 되었다. 이제 우리에게 윤여정은 배우들의 대선배로, 많은 드라마 속 엄마로 남아 있다. 김혜자가 ‘다시다’ 광고로 대표되는 한국 어머니상을 연기했다면, 윤여정은 어머니 나이임에도 여전히 나 자신인 한 여자가 된다.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과 영화 <하녀>, <돈의 맛>, 예능에서의 모습을 떠올려보길. 당시에는 큰 단점으로 받아들여졌던 독특한 목소리도 이제는 그녀만의 개성이 되었다. 동시에 그녀는 배우를 향한 엄숙주의나 판타지를 거부하는 말을 자주 하는데, 그게 또 멋있다. “배우가 혼신의 연기를 다할 때에는 돈이 없을 때다. 그렇게 간절할 때 최고 연기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생계형 여배우다.” 라는 명언을 그녀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6 김혜자 / 1941~
“제가 하는 일은 봉사가 아니에요. 그 아이들을 직접 보면 사람이라면 다 하게 되는 일이에요. 전쟁과 질병에 시달리는 아이들, 고사리 같은 손의 아이들이 사흘에 한 끼만 먹는다고 생각해보세요. 내가 눈을 마주쳤던 아이가 죽었을 수도 있는 거예요.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아세요?”
우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김혜자를 보면서 자랐다. 그녀는 모성의 상징이었고, 위대한 배우였다. 영화 <마더>에서 보여준 헌신적인 엄마의 모습은 다른 배우로 대체하기 어렵다. 최근 <착하지 않은 여자들>에서 김혜자는 또 한번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연기를 선보인다. 진정한 모성은 자식을 넘어서 세상으로 향한다. 남편의 불륜 상대에게 연민을 느끼고, 지난 날 나 역시 잘못한 게 있다는 화해와 반성은 김혜자의 연기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동시에 김혜자는 월드비전과 수십 년간 봉사 활동을 해왔다. 그녀의 활동은 다른 후배 연예인들에게도 귀감이 되었다. 봉사 경험을 써 내려간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녀는 그 인세 역시 모두 기부했다. 우리에게도 이런 배우가 있다.

 

7 캐서린 헵번 / 1907~2003
“나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다. 그것은 멋지고 긴 꿈일 것이다.”
할리우드에서 ‘지성미’를 담당하며 아카데미상을 네 번이나 수상한 캐서린 헵번은 평생 자전거를 즐겨 탔다. 치마만 입던 미국 여자에게 바지를 입게 만든 주인공인 그녀와 자전거는 썩 잘 어울렸다. 그녀의 사생활과 생활 습관에 대해 캐묻는 사람에게는 딱 잘라서 말했다. “난 의사의 딸이고, 내 건강은 내가 알아서 챙겨요”. 그녀는 지극히 자기의 방식으로 인생을 살았고, 이따금씩 영화에 출연했다. 캐서린 헵번은 억만장자 하워즈 휴즈와의 연애 후 배우 스펜서 트레이시와 그가 죽을 때까지 26년간 연인 사이었지만, 그는 가정이 있는 남자였다. 캐서린 헵번에게는 가장 배우다운 배우, 가장 배우 같지 않은 배우라는 말이 따라다녔다. 늘 언론과 대중에 당당했으며, 하고 싶은 말을 했고, 입고 싶은 옷을 입었다. 영화< 황금 연못>을 보면 젊은 시절보다 더 아름다운 70대의 ‘캐서린 헵번 할머니’를 볼 수 있다. 80대에 이르러서도 변함없이 그녀는 자전거를 타곤 했다. 캐서린 헵번은 94세까지 살았다. 우아한 할머니가 되고 싶다면 벤츠 대신 자전거를. 1999년에 미국 영화 연구소는 그녀를 위대한 여자 배우에 1위로 선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