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언젠가는 40대를 지나 50대로, 그리고 언젠가 호호백발의 할머니가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여기 닮고 싶은 여자들처럼, 그 시간에 맞는 아름다움을 갖게 되길. 그때를 위해 롤 모델을 찾았다.

1 가브리엘 샤넬 / 1883~1971
“나는 내 삶을 창조했다. 이전의 삶이 싫었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샤넬, 일명 코코 샤넬은 몇 번의 떠들썩한 연애를 했으나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코코 샤넬은 20세기 여성 패션의 혁신을 선도한 패션 디자이너였다. 코르셋 등으로 여성의 몸을 억압하는 당시 복장은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았다. 샤넬은 답답한 속옷이나 장식이 많은 옷으로부터 여성을 해방시켰다. 트위드, 저지 소재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소재를 사용했고, 몸의 라인을 감추는 실루엣을 만들었다. 샤넬은 가난하게 태어났고, 오바진 수도원의 고아원에서 자랐다. 이 시절은 불행했지만 이후 샤넬의 디자인에 많은 영감을 제공했다. 초기 샤넬에게는 많은 후원자가 있었고, 대부분 부유한 남성들이었다. 그렇게 샤넬은 그녀의 첫걸음이 된 모자 가게를 내게 되고, 승승장구하며 파리의 캉봉 거리에 자신의 부티크를 연다. 가브리엘 샤넬은 부티크, 향수 사업 등으로 부와 명성을 쌓지만 죽을 때까지 디자인 일을 놓지 않았고, 늘 자신의 옷과 주얼리를 즐겨 입었다. 그녀는 9171년, 자신이 싫어하는 일요일에 죽었다. 그녀는 죽기 전날까지도 일을 놓지 않았다.

 

2 제인 구달 / 1934~
“매일매일이 중요하다. 매순간 우리가 하는 선택이 불러오는 결과를 생각해보라.”
제인 구달의 모험은 우연처럼 찾아왔다. 연구보조원 신분으로 아프리카로 떠난 그녀는 침팬지가 육식을 하는 것을 목격한다. 그전까지 침팬지는 채식을 한다고 여겨졌던 것. 이어 나뭇가지를 다듬어 만든 도구를 이용해 흰 개미를 잡아먹는 것을 보며 그녀는 침팬지가 알려진 것보다 훨씬 고등 생물이라는 걸 깨달았고, 평생을 침팬지 연구와 환경운동에 헌신했다. 관찰 대상에게 번호 대신 이름을 붙이기 시작한 것도 그녀였고, 숨어서 지켜보는 대신 멀리 떨어져 자신을 자연스럽게 인식할 수 있게 한 것도 그녀가 최초였으며, 침팬지의 성격, 관계, 행동을 관찰했다. 그녀는 연구 대상을 친구나 자식 돌보듯 했다. 학계는 그녀가 너무 인간적이고 감상적이라고 비난하기도 했으나, 여성 특유의 모성과 헌신은 침팬지에게도, 우리에게도 잘된 일이었다.

 

3 김성령 / 1967~
“여배우가 나이 드는 걸, 얼굴이 변해가는 걸 인정해주었으면 좋겠어요.대중들이 여배우의 주름을 좀 더 너그럽게 봐주면 좋겠어요.”
1988년 미스코리아. 김성령의 20대는 아마 이것으로 설명되었을지 모른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의 타이틀을 가진 배우였지만, 그 외의 커리어는 그리 기억에 남지 않는 배우. 그런 그녀는 40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2012년 드라마 <추적자>는 배우 김성령의 인생을 바꿔놓은 작품이다. 조연으로등장했지만 누구보다 깊은 인상을 남겼고, 특유의 하이톤 목소리 역시 극중 캐릭터를 위한 연기처럼 보였을 정도다. 그후 <야왕>, <상속자들>과 같은 드라마와 <의뢰인> 등 영화, 다소 모험처럼 느껴졌던 연극 <미스 프랑스>까지 종횡무진 중. 대기만성형 배우였다는 걸 증명 중이다. 이제 그녀는 나이 들어서 더 멋진 커리어를 쌓는 여배우로 롤 모델이 되고 있다. 지금 방영 중인 드라마< 여왕의 꽃>은 거의 50대가 된 여배우가 주연을 맡은 흔치 않은 작품이 되고 있다. 한편 김성령은 플랜 코리아 홍보이사로, 꾸준히 필리핀 아동을 후원하고 있다. 어릴 적부터 후원하던 이 아동이 자라 결혼을 할 예정. 김성령은 기쁜 마음으로 필리핀에서 열릴 이 결혼식에 참석할 예정이라고 하니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결혼식은 없을 것 같다.

 

4 오드리 헵번 / 1929~1993
“어린이 한 명을 구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어린이 100만 명을 구하는 것은 신이 주신 기회입니다.”
오드리 헵번은 영국인 은행가 조지프 앤서니 러스턴과 네덜란드 귀족 가문인 엘라 판 헤임스트라 부인의 딸로 태어났다. 하지만 부모는 오드리 헵번이 어릴 적에 이혼을 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유럽 전역을 덮쳤다. 이 당시 오드리 헵번은 먹을 것이 없어 영양실조가 심했다고 한다. 그녀는 평생 마른 몸이었고 다크서클이 심했는, 데전쟁 당시 영양실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또 그녀는 발레를 전공했으나 부상으로 발레를 그만두게 된다. 그녀는 여배우 캐서린 헵번 대신< 로마의 휴일>에 캐스팅되었는데, 당시 무명이었던 까닭에 포스터에는 남자 주인공인 그레고리 펙만 올라와 있었다. 그레고리 펙은 영화 시사회가 끝난 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포스터에 오드리 헵번의 이름을 꼭 넣으시오. 안 그러면 내가 쪼잔한 남자로 보일 거요.” 오드리 헵번은 그 후 할리우드의 공주가 되지만 개인사는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두 번 결혼했고, 두 번 이혼했으며 자식을 많이 갖고 싶어 했지만 두 명의 아들만 남겼다. 오드리 헵번의 말년은 수많은 아이를 위해 채워졌다. 1988년, 오드리 헵번은 자신의 명성이 자선 기금 조성에 도움이 된다는 걸 깨닫고 유니세프 활동을 자원한다. 그 후 유니세프 친선 대사가 되어 구호활동에 열정적으로 매달렸다. 1993년, 스위스의 작은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오드리 헵번의 마지막 작품은 1989년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혼은 그대 곁에(Always)>로, 천사 역할을 맡았다. 그녀는 출연료를 유니세프에 기부했다.

 

5 메릴 스트립 / 1949~
“긴 세월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면 굳이 눈으로 보지 않고도 사랑하게 된다.”
메릴 스트립이 비교적 젊은 시절 출연한 영화로 <죽어야 사는 여자>가 대표적이다. 이 영화는 늙지 않으려는 여자들이 젊어지는 묘약을 먹으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블랙코미디다. 주인공인 메릴 스트립과 골디 혼은 서로 젊어지려고 싸우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그러나 실제 메릴 스트립은 아주 자연스럽게 나이 들고 있다. 1949년생인 그녀는 현존하는 최고의 배우라는 수식어를 가지고 있다. 미국 뉴저지 버나즈 고등학교를 졸업한 메릴 스트립의 졸업앨범에는 “메릴 루이스 스트리프…. 아름다운 금발, 쾌활한 치어리더, 우리들의 축제 여왕, 수많은 재능, 언제나 소년들에게 둘러싸인 인기 많은 소녀”라고 써 있다. 그녀는 아카데미상에 열아홉 번 후보에 올랐고, 세 번 수상했으며, 골든글러브는 물론 칸 영화제, 세자르 영화제, 베를린 영화제 등 세계의 상이란 상은 다 휩쓸었다. 젊은 시절, 그녀는 아름다운 배우로 불리지 못했다. 하지만 최고의 연기는 물론 상대 배우가 누구든 최고의 호흡을 보여줬다. 60대에도 로맨틱 코미디의 주연을 맡고 있는 메릴 스트립. 또 그녀는 할리우드에서도 안정적인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네 명의 자식을 두었으며, 그녀의 뒤를 이어 딸 마미 검머 역시 배우가 되었다. <어바웃 리키>에서 실제 모녀의 모녀 연기를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