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칵, 신이 넘어가고 잔잔했던 여배우의 눈빛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연륜이 켜켜이 쌓인 여유 있는 눈빛. 김해숙이 그려가는 인생 역시 그렇게 평온하고 아름답다.

화이트 셔츠와 팬츠는 브루넬로 쿠치넬리(Brunello Cucinelli). 로퍼는 자라(Zara).

배우 김해숙을 생각하면 자연스레 엄마가 떠올랐다. 그 이름 두 글자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하고 괜스레 미안해지는 뜨거운 존재. 드라마 <가을동화>, <부모님 전상서>, <장밋빛 인생>, <소문난 칠공주>까지 그녀가 연기하는 엄마는 강한 듯하지만 한없이 연약하고,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내 편이지만 가끔은 창피하기도 했던 현실 속 우리네 엄마 모습과 그대로 닮았으니까. 하지만 김해숙이 보여주는 드라마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영화 <우리 형>, <박쥐>, <무방비도시>, <도둑들>에서 보여준 전설적인 소매치기부터 퇴물 연기파 도둑 그리고 히스테릭한 시어머니까지, 그녀의 연기에 한계란 존재하지 않아 보인다. 60대의 나이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1974년 데뷔, 김해숙이라는 이름을 아로새길 작품은 이미 수없이 많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녀를 영원히 엄마로 기억할 것이다. 세월의 흐름을 성숙하게 안은,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드라마 <여자를 울려>와 영화 <아가씨>의 촬영을 병행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건강 관리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저처럼 건강 안 챙기는 사람도 없을 거예요 .연기가 좋아서 버틴다는 표현이 맞을 거예요. 작품을 위해서는 뭐든 기꺼워지는데, 개인의 삶으로 돌아가면 아무것도 안 하는 스타일이거든요. 일에 에너지를 쏟는 대신 일상에서는 힘을 빼요. 굳이 꼽자면 홍삼을 십 년 동안 꾸준히 먹어온 것 정도? 지구력과 면역력이 좋아지거든요. 이제 홍삼만으로 버티기 힘든 나이가 된 것 같아요. 작품 때문에 살을 빼기 위해 운동을 할 때도 있었는데 확실히 몸이 가벼워지고 근력이 생기더군요. 운동의 필요성을 이제야 느끼고 있어요.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자전거라도 타보려고요.

거의 데뷔 40년 차, 쉬지 않고 달리는 게 쉽지는 않았을 거예요.
배우 김해숙이 아니라 인간 김해숙은 정말 무미건조해요. 그것 때문에 한동안 힘들었던 적도 있었죠. 내 삶에 일을 빼면 뭐가 남을까 하는 후회 같은 것 때문에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살아 있구나’ 하고 느끼게 하는 것은 연기밖에 없더라고요. 그래서 이젠 깊이 생각 안 하려고 해요. 몸이 힘들어도 누가 시켜서 이 일을 하는 건 아니니까, 내 존재감을 느끼기 위한 희생이라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니까요. 아직도 새로운 역할을 받을 때면 너무 설레어서 밤잠을 설쳐요. 그 짜릿한 흥분은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죠.

 

 



스웨터는 H&M. 팬츠는 김서룡옴므(Kimseoryong Homme). 시계는 미셸 에블랑 바이 갤러리어클락(Michel Herbelin by Gallery O’Clock).

‘국민 엄마’로 불리고 있어요. 그럼에도 세상의 모든 엄마 역할을 해보고 싶다 말했어요. 엄마 역할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영화를 찍으며 매번 새롭게 배워요. 세상엔 정말 수많은 엄마가 있다는 사실을요. 생각해보면 엄마의 사랑은 결국 하나예요. 각자 성격이 다르고, 처한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그 사랑이 표현되는 방식이 다를 뿐이죠. 엄마는 여자이자, 누군가의 아내이고 또 무엇보다 한 명의 사람이죠. 그렇기에 엄마라는 단어 안에는 수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어요. 영화 <무방비도시>의 엄마처럼 자식을 위해 죽을 정도로 뜨거운 모정을 가진 경우도 있고 반대로 자식을 버리는 무정한 엄마도 있을 거예요. 모정이란 남녀 간의 사랑만큼이나 복잡한 형태로 발현되니까요. 결국 세상에서 가장 많은 걸 표현할 수 있고 가장 많은 연기를 할 수 있는 게 엄마예요.

 

수많은 역할 중에서도 특히 마음에 묻어둔 엄마 역할이 있다면?

특히 기억에 남는 건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워킹맘이지만 자기 안엔 내재된 우울함이 있어요. 단지 가족을 위해 그걸 표현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거죠. 아마 그게 우리나라 대부분의 엄마 모습일 거예요. 그 역할에 실제 두 딸의 엄마이기도 한 지금의 내 모습을 많이 투영해봤던 것 같아요.

실제로는 어떤 엄마인지 궁금해요.
전 무남독녀 외동딸인데 엄마가 너무 무서우셨어요. 그래서 제 자식들에겐 절대 그러지 않고 싶었거든요. 두 딸과는 친구처럼 지내요. 가끔 후회할 때도 있죠. 너무 친구 같아서 부모의 위엄이 없어지는 건 아닌가 싶어서.(웃음) 일을 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성장해갈 때 함께하지 못한 것이 항상 마음에 아려요. 내 안의 반만 딸들에게 준 것 같아서 .마냥 철없는 줄만 알았던 어린 딸들이 이제 엄마를 옆에서 지켜주는 든든한 조력자가 되었어요. 아마 딸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김해숙은 없었을지도 몰라요. 

 

연기가 실생활과 연결되면 좋은 연기가 나올 수 없다고 말했어요.
제가 지향하는 연기는 나를 벗어던지고 그 사람 안으로 온전히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개인적인 한이나 슬픔은 김해숙 자신의 감정이거든. 우는 것도 상황에 따라 다 다르잖아요. 소리 없이 또르르 눈물만 흘리는 사람도 있고, 가슴 찢어지게 우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본인의 한을 연기에 투영하면 그때부터 한계가 생기는 거예요. 그러니 나의 엄마에 대한 영감, 내 인생의 한이 연기에 대입되면 안 되는 거죠. 비슷한 맥락에서 전 원작이 있는 시나리오라도 원작을 절대 안 봐요 .왜냐하면 그걸 읽다 보면 저절로 머릿속에 상상하게 되고 그 틀 안에 갇히게 되니까. 어떤 역할이든 오롯이 저만의 색깔로 그려내고 싶거든요.

 



스웨터는 반 하트 디 알바자(Vanhart Di Albazar).

영화 <무방비도시>, <박쥐>의 섬뜩한 눈빛, 영화 <도둑들>의 화려한 변신이 새로웠어요.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스타일은 무엇인가요?
영화 <도둑들>이겠죠. 진짜 여배우가 된 느낌이었거든요. 이 나이에 키스신을 찍을 수 있는 배우가 몇이나 되겠어요.(웃음) 그 역으로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받았는데 그때 수상 소감에서 이렇게 말했었어요. 난 그간 항상 누구의 엄마일 뿐이었는데 나를 여배우로 만들어줘서 감독님께 감사하다고요. 이렇게 나를 반짝이게 하는 작품은 꼭 다시 해보고 싶어요. 

 

함께 촬영한 후배 배우들이 엄마라고 부르거나, 김해숙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아요.

제가 데뷔한 1970년대만 해도 1~2년은 무조건 연수 기간처럼 단역 시절을 거쳐야 했어요. 갑자기 주연으로 떠오르는 경우는 거의 없었죠. 가정부, 다방 아가씨 같은 이름 없는 역할을 수없이 반복하며 나에게 기회가 오기를 간절히 기다렸죠. 그래서 작은 배역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 건지, 그 기다림이 얼마나 힘겨운지 알아요. 요즘 어린 배우들이 고생하는 걸 보면 가슴 아플 때가 많아요. 불안한 미래를 그리며 긴 시간을 견뎌내는 모습에서 어린 날의 내가 떠오르거든요. 제가 엄마이기 때문에 누
군가의 소중한 아들딸인 그들이 더 눈에 밟히기도 할 거예요. 그래서 전 함께 작품을 하는 후배들을 아들딸처럼 생각하고 싶어요. 어른으로서 연기를 가르쳐주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 그런 소소한 마음을 예쁘게 받아들여준 후배들이 오히려 고맙죠.



슈트는 바톤 바이 권오수(Barton by Kwon Oh Soo). 실크 셔츠는 김서룡옴므. 로퍼는 자라.

김해숙이 생각하는 여배우의 아름다움이란 어떤 것인가요?
여배우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외모를 유지하는 것, 또 주어진 역할을 위해 그 외모를 과감히 포기할 수 있는 것. 그 두 가지가 모두 여배우다운 것 아닐까요? 전 그저 후자를 택한 것뿐이에요. 매니저가 가끔 물어요.“ 왜 이렇게 거울을 안 보세요?”라고. 하지만 거울을 보는 건 꼭 제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상황에 몰입하는데 립스틱이 조금 지워지고, 주름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민낯인지가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눈물로 지워진 거친 피부, 입가에 패이는 주름도 연기의 일부분인 걸요. 배우는 언제나 배우다워야 해요. 폐지를 줍는 사람이면 실제로 그런 사람처럼 보여야 하고, 이렇게 화보를 찍을 때는 카리스마 넘치는 여자가 되기도 해야 해요. 전 지금처럼 쭉 계속하고 싶어요. 그냥 이렇게 세월의 흐름을 온순히 받아들이면서요. 연기의 폭이 한정되는 것이 싫은 것처럼 표정이 한정되는 건 참을 수 없으니까요. 사실 예뻐지기 위한 시술의 고통을 참을 자신이 없는 것도 문제예요. 아픈 게 너무 싫거든요.(웃음)

60대라는 나이를 믿기 힘들 정도로 고운 피부를 갖고 있어요.
우리 딸이 “엄마는 무슨 자신감으로 맨날 그렇게 민낯이야?”라고 구박해요. 늘 화장기 없는 얼굴을 고수하거든요. 카메라 앞에 서지 않을 때만이라도 피부가 숨을 쉬게 하고 싶어서예요. 그래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파우치 속에는 쿠션 팩트 하나와 펜슬 아이라이너, 립스틱을 챙겨둬요. 아이 섀도 대신 펜슬 아이라이너로 아이라인을 잡은 다음 손가락으로 쓱쓱 문질러 음영을 표현하죠. 그리고 립스틱으로 마무리하면 끝. 여배우의 화장치고는 참 단출하죠?

나이가 든다는 건 생각보다 두려운 일 같아요. 인생의 선배로서 지금의 20대와 30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요즘은 어르신들을 보면 거기에 내 얼굴을 대입해보곤 해요. 나중에 제가 나이가 들면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를 끊임없이 고민하죠. 결국에 모든 건 마음먹기에 달려 있어요. 전 뭐든 과하게 욕심 내지 않으려 노력해요. 물론 사람이 욕심이 없으면 그건 죽은 목숨과도 같을 거예요. 내가 말하는 욕심 내지 않는 삶이란 60대인 내가 30대나 40대가 되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지금보다 3년만 젊게 살려고 애써야 한다는 의미예요. 욕심이 커지면 그만큼 행복이 멀어지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