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집밥’에 대해 이야기할수록, 집밥이라는 말이 자꾸만 멀게 느껴졌다. 우리에게 집밥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집밥에 대한 기억은 우리 모두에게 공평한가?

‘집밥 같은’이라는 수식어를 단 식당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을 때 식당에서 이야기하는 ‘집밥’이라는 표현은 다음과 같은 수식어를 포함했다. 건강한 밥, 엄마가 해준 것 같은 밥. 잡곡 몇 가지를 더 섞은 밥에 국, 반찬 몇 가지가 쟁반 하나에 같이 담겨 나오는 ‘집밥 식당’의 음식 차림새는 급식 용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맛은 내 입맛엔 지나치게 심심하기 일쑤였지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본디 ‘건강한 한 끼’는 저염을 기본으로 하는 법이니까. 그리고 좋은 재료를 썼다고 하니까. 우리 엄마가 해준 ‘집밥’은 이렇지 않다고 어렴풋이 느꼈지만 자취 생활 10년 차, 밖에서 이런 한 끼를 먹은 게 어디냐 싶었다. 

 

그러다가 최근 집밥이라는 단어가 또 다른 의미로 화두에 오르며, ‘집밥’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집밥 백선생> 때문이다. 두부김치찌개, 오징어볶음 등 흔히 먹는 반찬과 찌개류를 ‘요리 못하는 남자’들을 데리고 만드는 법을 가르치는 이 프로그램을 보고 남편이, 아빠가 처음으로 요리를 했다는 인증샷과 증언이 쏟아졌다. 심지어 오랫동안 요리를 해온 주부도 ‘백종원식 레시피대로 카레를 만들었더니 그동안 내가 만든 어떤 카레보다 맛있었다’는 간증을 SNS에 올리고 있다. 흥미로운 지점은 <마이리틀 텔레비전>에 이어 <집밥 백선생>으로 식탁을 점령한 백종원의 요리는 몸에 좋은 재료를 쓰지도, 유난히 정성스럽지도 않다는 것이다. 꽁치는 통조림으로 대체되고, 조미료와 설탕도 거리낌 없이 쓴다. 그간 레스토랑들이 집밥을 ‘건강한 맛’으로 추어올리며 심심한 요리를 선보인 것과는 정반대지만 사람들은 그의 레시피에 열광한다. 쉬울뿐더러 무엇보다 익숙한 맛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진짜 집밥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엄마의 집밥 역시 마트에서 쉽게 손에 잡히는 조미료와 재료를 써서 만들어온 것이 대부분이다. 집밥은 정성도, 엄청나게 건강한 요리도 아니었다! 특별한 날을 제외하면 우리는 엄마가 잘하는 몇 가지 찌개와 반찬을 돌려 먹고 데워 먹기 일쑤였고, 엄마가 싸준 도시락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반찬은 케첩을 뿌린 비엔나소시지나 용가리였다. 그런데 이런 집밥을 향한 열광에 집밥의 재정의를 요구하는 이들이 있다.   

 

<문화일보> 오피니언 코너에 실린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의 글, ‘백주부, 백종원에 열광? 맞벌이엄마 사랑 결핍 때문’은 백종원을 향한 젊은 세대의 열광을 어린 시절, 맞벌이 엄마를 둔 탓에 엄마의 손맛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 어머니에 대한 결핍을 ‘대체 엄마’인 백종원의 레시피에서 찾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바깥일을 하니 엄마는 늘 바빴다. 아침은 토스트와 콘플레이크로 대충 때우고 부부는 각자의 일터로, 아이는 어린이방으로 가야 했다. 저녁이면 엄마는 지쳐 있었다. 피자, 햄버거, 치킨. 전화 한 통이면! 그러니 엄마의 음식을 받아 먹은 기억이 없다. 엄마의 사랑을 받아 먹은 기억이 없다.’ 한국처럼 맞벌이 주부의 가사노동 부담률이 턱없이 높은 나라에서 엄마를 요리하지 않는 존재로 단정 짓는 것도 의아하지만 그보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요리’를 ‘엄마의 사랑, 모성’과 너무나도 자연스레 연결 짓는 지점이다. 모성과 집밥을 동일시하는 그의 무의식은 곳곳의 표현에서 드러난다. ‘맛있는 음식의 수는 이 세상 어머니의 수와 같다, 누군가 멋을 부려 만든 말인데, 단순히 줄이면 ‘엄마의 음식은 무조건 맛있다’이다. 이때 엄마란 각자의 엄마다. 내 엄마의 음식이 내 입에는 늘 딱 맞다’, ‘포근한 어미의 품에서 사랑스러운 어미의 눈길을 받으며 먹는 음식은, 자식에게는 음식이 아니라 엄마의 사랑으로 각인된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엄마의 음식을 맛있다 하고, 평생을 엄마의 음식 같은 음식을 찾아 헤매게 되는 것이다.’ 

이에 동조하는 또다른 이들은 수많은 과정을 손쉽게 뛰어넘는 백종원의 집밥은 진짜 집밥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손맛’을 마법의 주문 취급하는 이런 식의 발언은 집밥도 엄연한 기술이 필요한 일이며, 노동이라는 사실을 쉽게 간과한다. 그저 엄마의 사랑과 모성은 그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수할 것이라고 여긴다. 엄마의 요리가 최고라는 이상한 낭만만큼이나, 상을 차리기 위해 드는 노동은 당연시 된다. 이송희일 감독은 <씨네21>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엄마는 지금에 와서야 이렇게 술회하곤 한다. 시집와서 밥 짓고 살아온 게 그렇게 고통스러웠다고, 지금에서야 좀 평화로워졌다고. 할아버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자식들도 다 분가해서 ‘밥을 지어서 올려야 할’ 대상들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자식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 지어 주고픈 마음이야 인지상정이겠지만 이에 대한 엄마의 대꾸는 정곡을 찌른다. 명절에 시집간 딸이 오면 참 반갑지. 근데 그 딸이 가면 더 반갑지.’ 

집밥을 모성과 연결 짓는 논리는 따뜻한 밥상에 대한 기억이 없는 수많은 이들을 소외시킨다. 황교익은 80~90년대생을 결핍된 세대로 지칭하며 ‘어떤 음식을 맛있다고 기준을 잡을 것인지 몸의 기억으로 각인할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외식업의 수준이 지금 시대처럼 발전한 적이 있었나? 세계 곳곳의 다채로운 음식을 맛보고, 소위 핫플레이스부터 오래된 식당까지 맛집을 순례하는 게 일상인 지금 세대를 ‘입맛에 기준이 없어 백종원의 요리를 엄마의 요리로 기억하는’ 세대로 정의하는 것은 동의하기 힘들다. 

 

통계청에 따르면 1980년, 결혼 적령기인 25~29세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이미 30%가 넘었다. 그리고 2013년, 25~29세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70%, 30~39세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56.9%를 기록했다. 바쁜 엄마들의 가사노동을 덜어주기 위해 온갖 맛을 내는 조미료와 손질된 재료들, 판매용 김치의 종류와 판매량이 꾸준히 상승한 것은 당연한 현상이며, 이게 우리의 집밥이다. 조미료를 사용한 요리와 모성의 부족을 탓하는 것은 오히려 요리하지 않는 손위 세대의 남성들이다. 1988년생인 광희는, 마트에서 판매하는 재료로 요리를 하는 프로그램인 <마트당> 출연 당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엄마 밥 진짜 맛없어요! 아니 근데 그게 나빠요? 우리 엄마 엄청 좋은 엄마예요. 그리고 능력 있는 도시여성! 사먹고 그러면 되죠!” 그리고 광희의 이 말은 ‘일하는 엄마’, 혹은 ‘요리 못하는 엄마’를 가진, 그래서 ‘난데없는 집밥을 향한 향수’가 어리둥절한 이들의 심정을 대변한다. 앞에서 언급한 이송희일 감독의 글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엄마에게 따뜻하게 집밥 지어서 올려봐라, 얼마나 좋아하시는데’. 그 말이 맞다. 집밥을 둘러싼 건강한 음식, 엄마의 손맛, 정성 어린 반찬, 유년의 기억 등 모든 논쟁은 무의미하다. 이제 집밥에서 엄마를 떼어내야 한다. 이제는 우리가 우리 먹을 집밥을 스스로 차릴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