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은 계절보다도 빠르게 지나간다. 그러나 그런 트렌드의 폭풍 속에서도 느긋하게 옷장 한 칸을 차지하고 있는 가방이 있다. 주인과 함께 10년, 그리고 그 이상을 함께하며 같이 나이를 먹어가는 가방들. 패션 피플 10인이 자신의 오래된 가방을 꺼냈다. 어떤 가방은 주인보다 나이가 많다.



1 휴가지에서 생긴 일

나의 오래된 가방 스카프가 장식된 구찌의 레드 스카프백은 2006년 구찌 크루즈 라인의 백인 듯하다. 여름에 들른 뉴욕에서 구입했다. 휴가 중에 사용할 가볍고 넉넉한 사이즈의 숄더백이 필요해서 단숨에 구입했던 기억이 난다. 꽃 장식이 달린 구찌의 플로라 미니백은 같은 해 구찌에서 인턴으로 첫발을 떼었을 때 구입했다. 티비에서만 보던 패션쇼 피스들을 보는 것 자체가 너무 신기하고 신나던 때였다. 샘플세일 중에 저렴한 가격에 산 후, 내 보물이 되었다. 

간직하고 있는 이유 스카프 디테일의 디자인이 독특해서 마음에 들기도 하지만 이제는 패션의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구찌의 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프리다 지아니니의 히트 아이템이기에, 전 직장에 대한 추억과 함께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다. 미니 클러치백 역시 섬세한 꽃 장식과 메탈 프린지, 그리고 구찌의 아이코닉한 뱀부 소재 클로저까지 다 마음에 드는 가방이다. 방울뱀 소재로 튼튼하기까지 해서 나중에 딸을 낳으면 물려주고 싶다. 

가방의 추억 레드와 네이비 컬러의 조합이 휴양지에서의 마린 룩과 너무 잘 어울려서 보는 친구들마다 휴가 갈 때 빌려달라고 너도나도 졸랐던 기억이 난다. 한여름에 마트에 갔다가 정말 무겁고 커다란 수박 한 통을 거뜬하게 담아서 집으로 가져오기도 했다. 이건 가방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지금 이 가방을 든다면 화이트 컬러의 상의에 네이비 컬러 와이드 팬츠, 웨지힐과 매치해도 좋을 것 같지만, 오늘이라면 풀사이드에서 네이비 컬러 수영복과 맨발에 들고 싶다. 

갖고 싶은 새 가방 얼마 전 세일 유혹을 못 이기고 메탈 디테일이 유니크한 스페인 브랜드 ‘엠투마예티에르(M2malletier)’의 가방을 구입해서 당분간은 자제할 생각이다.

– 김소영(막스마라 홍보팀) 

 

2 고마운 선물

나의 오래된 가방 골드 장식이 화려한 프랑코 벨리니(Franco Bellini)의 새틴 가방은 배우 고소영이 오래전 내 생일에 선물한 것이다. 처음 받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해진 곳도 없고, 변색된 곳도 없이 한결같은 모습이다. 마르니의 초록색 클러치백은 10년 전 매장에서 처음 본 순간 그 자리에서 구입했다. 유니크한 아크릴 소재에 선명한 초록색 컬러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간직하고 있는 이유 지금까지 다양한 자선 벼룩시장을 여는 동안 소장품을 많이 처분했고, 지인들에게 안 쓰는 가방을 주기도 했지만 이 가방만큼은 오래 간직하고 싶다. 선물한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가방의 추억 프랑코 벨리니의 가방은 중요한 행사나 파티에서 자주 든다. 마르니의 가방은 비즈니스 미팅에도 손색없고, 사람들이 호기심을 보여 쉽게 대화를 이어갈 수도 있다.   

지금 이 가방을 든다면 프랑코 벨리니의 가방을 들 때에는 꼭 신발을 소재에 맞춰 블랙 새틴 슈즈를 신는다. 가방과 슈즈만 매치하면 다른 옷은 대 부분 잘 어울린다.  

갖고 싶은 새 가방 수납공간이 매우 많고 가벼운 가방. 이제는 무거운 가방이 귀찮고 성가시다.

– 이경민(메이크업 아티스트





3 나보다 나이가 많은

나의 오래된 가방 복주머니를 떠오르게 하는 귀여운 가방은 로에베의 제품이고, 대나무로 만든 손잡이가 돋보이는 노란색 캔버스 가방은 구찌의 제품이다. 각각 30년과 20년 정도 된 가방이니 로에베 가방은 나보다도 언니인 셈이다. 엄마는 준 적이 없다지만, 어느새 내 것이 됐다. 엄마가 빼앗긴 다른 수많은 가방처럼. 

간직하고 있는 이유 최신이 좋은 건 테크 기기뿐, 물건을 쉽게 버리지 않는 편이다. 좋은 가방을 구입해서 곁에 두고 오래 드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가죽 가방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한층 깊어지는 색감과 자연스럽게 지는 주름으로 고유의 표정이 생긴다. 빳빳한 새 가방보다 훨씬 멋스럽다.

가방의 추억 내 가방 안에는 이름표처럼 꼭 볼펜이나 연필, 화장품 자국이 묻어 있다.

지금 이 가방을 든다면 목선이 둥근 보트넥 니트 스웨터 아래 시가렛 팬츠를 입고, 로퍼를 신은 다음 어깨를 가로질러 메고 싶다. 구찌의 가방은 일자로 떨어지는 긴 니트 카디건과 통이 넓은 바지, 양말, 네모진 모양의 나무 굽이 달린 샌들과 함께 스타일링해도 좋을 것 같다.

갖고 싶은 새 가방 새로운 가방이 필요치는 않다. 내게 가방은 늘 필요가 아닌 욕망의 대상이므로. 

– 강민지(<에스콰이어> 패션 에디터)

 

4 첫 작품

나의 오래된 가방 이 1970년대 빈티지 디올 자카드 백은 어머니가 오래전에 물려주신 것이다. 가방에 와인을 쏟아서 얼룩이 생겨서 그것을 가리려고 2005년에 빈티지 레이스와 테이프를 덧달아 직접 리폼했다.

간직하고 있는 이유 어머니가 물려주신 가방이라는 데 의미가 있기도 하고, 내가 처음으로 만든 빈티지 리폼 백이기도 하다. 이 리폼 작업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된 셈이라 내게는 더욱 의미가 있다.

가방의 추억 처음 이 가방을 만들었을 때만 해도 빈티지 가방을 만드는 일이 나의 새로운 직업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얼룩이 생긴 가방을 버리기 아까워서 리폼한 것인데, 들고 다닐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칭찬을 해주고 어디서 구입할 수 있는지 물어봐주었다. 그러면서 빈티지 가방을 재창조하는 작업을 하게 될 용기가 생겼다.

지금 이 가방을 든다면 하얀 티셔츠, 데님 팬츠, 심플한 펌프스와 함께.  

갖고 싶은 새 가방 이미 많은 가방을 가지고 있어서 나를 위한 새로운 가방에 대한 욕구는 없다. 올해 9월이 내가 빈티지 가방을 만드는 일을 시작한 지 10년이 되는 해다. 파리의 패션위크 기간에 프랑스 프레스와 바이어를 상대로 이벤트를 할 계획인데 그 이벤트를 위해 멋진 가방을 만들고 싶다.

– 류은영(아티스트)

 

5 매일 함께하는 가방

나의 오래된 가방 대학생 시절, 영국 여행 중 본드 스트리트의 샤넬 매장에서 구입한 지 딱 10년이 되었다. 멋진 매장을 보고 이곳에 내 이름 하나, 추억 하나를 남기고 싶다는 충동에서 구입했는데 그 후로 꾸준히 애용하는 가방이 되었다. 

간직하고 있는 이유 흔하지 않고, 사람들이 샤넬 제품인지 잘 모른다. 사이즈가 작아서 옆으로 메면 로고 등이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는다. 

가방의 추억 가방을 그때그때 바꿔 드는 것을 귀찮아한다. 그래서 한번 손에 잡힌 가방을 몇 달씩, 때론 반년씩 그냥 사용하곤 한다. 그러면서 이 가방이 어디든 잘 어울린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금 이 가방을 든다면 티셔츠, 팬츠, 슈즈 등 정말 아무렇지 않은 일상의 차림. 

갖고 싶은 새 가방 가볍고, 크고, 수납공간이 많은 에코백이면 좋겠다. 

– 정승진(갤러리 지익스히비션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