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이 있다. 아들러 심리학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어떤 책이 도착했을까? 당신이 보는 물잔에는 물이 반이나
차 있나, 반밖에 없나? 아무리 봐도 물이 반밖에 들어 있지 않은, 불안하고 소심한 비관주의자를 지지하고 위로하는 책.

친구로 부터 문자 메시지가 왔다. “분노조절장애나 불안장애 어떻게 치료해야 해?” “전문가의 상담이나 처방이겠지”라고 답을 보내며, “누군데?”라고 물었다. 물론 답은 예상한 바였다. “나야 나.” 그는 매우 유쾌한 데다가 감정의 기복도 ‘없어 보이는’, ‘Keep Calm and Carry on’이라는 인기 있는 카드 문구와 정말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는 문자로 자신의 소심함과 불안 때문에 돌아버리기 직전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해할 수 있었다. 나역시 안 그래 보이는 ‘소심하고 불안한 사람’이니까. 그러나 걱정 많고,최악의 상황을 생각하는 일 자체가 스트레스이기 때문에, 털털해지고 강해지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부단히 노력해왔다. 그래야 행복하고,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나온 책들은 다른 말을 한다. 걱정 많은 비관주의자들이 더 잘되고 행복하다고 말이다.

여기, 반쯤 물이 들어 있는 잔이 있다. 물이 반이나 차 있을까? 아니면 반밖에 차 있지 않나? 미국 웰즐리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줄리 K. 노럼은 성격 심리학과 낙관주의 및 비관주의 전문가로 불린다. 그녀의 저서 <걱정 많은 사람들이 잘되는 이유>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녀는 ‘반이나 있다’는 사람을 ‘전략적 낙관주의자’로, ‘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방어적 비관주의자’로 진단한다. 나는 물이 반이나 차 있다고 희망차게 생각하다가도, 혼자가 되면 역시 물이 반밖에 없다며 침울해진다. 목 마르면 어떻게 하지? 부족하면 어떡하지? 어디서 물을 구해오지? 이론에 따르면 나는 ‘방어적 비관주의자’다. 예를 들어 나는 한 번도 남자친구들이 나를 영원히 사랑할 거라고 믿은 적이 없다. 남자들은 내가 ‘감정의 영원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걸 싫어했고,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나 같은 비관론자에게는 차라리 그 가능성을 인정하고, ‘연인으로서 사랑하지 않게 되어도, 널 좋은 친구로 사랑할게’라고 말하는 편이 좋은 것이다. 볼테르의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에서는 낙관주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나쁠 때도 모든 것이 최선이라고 우기는 광기.’

노럼 교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며 불안해하는 이러한 비관주의자가 더 현대 사회에 적합하도록 진화된 존재이며, 더 성공할 확률이 높다고 말한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정신과 전문의 크리스토프 앙드레 박사의 <불안을 넘어설 용기>도 궤를 같이한다. 파리 생탄병원 인지행동치료 분과에서 우울증 및 불안장애 치료 전문의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불안과 두려움은 우리 삶의 그림자와도 같지만, 여기에 합리적으로 대처하면 될 뿐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모두 불안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외향성이 롤모델이 되고, 모두가 자기소개서에 ‘긍정적이고 활달한 성격’이라고 쓸 수밖에 없는 시대에 내향성의 힘을 주장한 <콰이어트>는 큰 호응을 얻었다. 더 이상 내성적인 성격이 ‘고치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에 많은 내성적 인간들이 안도했다. <미움 받을 용기>는 모두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욕심을 버릴 것을 조언했고,  <긍정의 배신>은 ‘긍정’은 자본주의가 노동력을 제공하는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는 수작일 뿐이라고 폭로했다. 이제 책은 비관주의자를 위로한다. 불안하고 소심하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니며, 그것 역시 ‘고쳐야 하는 대상’은 아니라고.      

그러나 성공하는 비관주의자가 되려면 ‘행동력’이 필요하다. 일이 잘못될 가능성을 예상하고 방어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적극적으로 기울이는 것이 곧 행동력이다. 이 점이 성공의 동력이 된다. 방어적 비관주의자는 걱정과 근심이 많지만, 그렇기에 끈기 있게 노력하고 세심하게 준비하며 다른 낙관주의자들이나 무심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이 일을 대충대충 하는 동안 혼자 스트레스 받으면서 두세 배로 노력한다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라거나, ‘된다, 된다 안심이 된다!’라거나, ‘생각대로’라는 광고 카피들은 긍정을 강요하는 시대의 나팔수들이다. 잘될 거라고 해서 다 잘된다면 왜 망하는 가게가 생기겠나? 몇 년 전 우리나라를 강타한 베스트셀러 <시크릿>이 말한 바대로 간절히 원하는 힘이 약해서일까? ‘긍정적인 생각과 간절한 믿음이 만났을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이 <시크릿>이야말로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들을 위한 책이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한 달 동안 수많은 실패를 경험해야 했다. 생각대로 될 때도 있지만, 생각대로 안 될 때도 있다. 그 과정을 겪으며 내가 알게 된 것은 ‘모든 일은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라는 것.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실패를 통해 배우고, 실패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또 다음이 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는 것뿐이다. 불안은 인류를 지켜온 힘이다. 불안으로 도리어 강해질 수 있다. 

노럼 교수가 한 권을 통틀어 한 이야기의 결론은 이렇다. 어떤 사람에게는 전략적 낙관주의가 잘 맞고, 어떤 사람에게는 방어적 비관주의가 맞는다. 비관주의자에게 낙관론은 걱정과 불안을 증폭시킬 따름이고, 낙관주의자에게 비관론도 맞지 않는다. 절대적 비관주의자인 <하우스>의 닥터 하우스는, 잠시 행복해지고 싶은 욕망에 정신과 의사를 만나 낙관론을 주입받는다. 행복해진 것 같은 착각도 잠시, 그는 정신과 의사의 진료실을 박차고 들어가서 절망적으로 화를 낸다. “당신이 하라는 대로 했는데 왜 난 행복해지지 않지!” 즉, 이 책은 오래된 격언을 한번 더 공고히 한다. ‘너 자신을 알라.’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비관주의자에게도 다 나쁜 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 비관주의와 낙관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는 말한다. “이러쿵저러쿵 따지지 말고 일합시다. 그것이 인생을 견딜 만하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