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이 달라지고 있다. 아니다. 한식은 늘 대중의 요구에 맞춰 변화해왔다. 지금, 가장 인기 있는 레스토랑의 식탁에 앉아 우리가 즐기고 있는 한식을 생각했다.

1,3 기름 로스터리숍을 표방한 청춘참기름 방유당. 2 방유당의 명란마늘비빔밥. 4 성수동에 위치한 소녀방앗간. 5 소녀방앗간의 오늘의 밥상. 고춧가루로 양념한 제육불고기와 함께 간단한 반찬이 함께 나온다. 

어디에서 왔나요?
분당 판교와 정자동에 지점을 둔 ‘방유당’은 이름이 길다. 정식 이름은 ‘청춘참기름 – 방유당’이다. ‘기름 로스터리’를 표방하는 이곳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은은하게 감돈다. 입구에는 참깨와 들깨를 가득 담은, 말 그대로 포대가 층층이 쌓여 있고, 갓 짠 참기름과 들기름이 딱 좋은 크기의 병에 담겨 진열되어 있다. 하지만 이곳은 참기름만 파는것에 그치지 않고 갓 짠 참기름을 듬뿍 넣은 음식을 차린다. 무창포에서 온 주꾸미, 서산에서 온 꽃게, 제주에서 온 무와 브로콜리 등. 재료의 산지를 표시하는 건 세계적인 미식 트렌드다. 그 지역에서 자란 재료를 먹는다는 건, 산업화 이전에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지만 시대가 달라졌다. 생산지와 동떨어진 삶을 사는 도시 사람들은 이제 자신이 무엇을 먹는지에 관심이 있다. 가장 맛있는 것, 가장 신선한 것. 어디서 거두어 짰는지 모르는 대량생산으로 만든 참기름보다 방유당처럼 이름표가 달린 참기름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 방유당의 음식을 의미하는 ‘방유당 식탁’에서는 떡갈비 상추비빔밥, 월과채약고추장 비빔밥, 명란마늘비빔밥, 시래기 표고버섯 들깨탕 등 참깨와 들깨, 참기름이 꼭 필요한 메뉴를 선보인다. 비빔밥을 한입 먹었다. 늘 당연하듯 넘겼던 참기름이 든든하게 느껴진다. 식사 후 주전부리와 생강 향이 알싸한 식혜도 잊지 말길.

뷔페의 주역이 된 한식
한식 뷔페라니. 처음에는 테헤란로나 충무로쯤, 오피스 빌딩의 뒤편 호프집에서 점심장사를 위해 차려둔 뷔페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 한식 뷔페가 외식 기업들의 효자 종목이 되었다. 과거 뷔페는 특별한 음식을 맛보기 위해 찾던 곳이었다. 뷔페 식당은 앞다투어 회와 초밥, 해산물, 스테이크 등으로 고급화에 나섰다. 하지만 이들 음식은 더 이상 특별하지 않고, 품이 많이 드는 한식의 가치는 오히려 올랐다. CJ푸드빌의 ‘계절밥상’은 요즘 CJ푸드빌 브랜드 중 가장 인기가 많다. 늘 만날 수 있는 한식 요리와 함께, 그달의 특별한 재료로 특별 요리를 내는 것이 특징이다. 월4에는 주꾸미 구이와 민들레 나물을 넣은 국수, 바지락 미나리전을 선보였다. 이랜드파크는 자연별곡을, 신세계는 올반을 전개 중이다. 이 한식 브랜드의 주요 고객은 중년 여성과 그 가족이다. 직접 요리를 하는 여자들은 나물 하나를 무치는 데 드는 수고를 누구보다 잘 안다. 이들은 나물이나 곤드레솥밥 등 손이 많이 가는 한식을 맛보기 위해 한식 뷔페를 찾는다.

6,7 통영의 맛을 선보이는 오통영. 동부이촌동에 이어 최근 청담동에 문을 열었다. 점심시간이면 패션 피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8 오통영의 모둠전과 전복솥밥, 우럭구이. 2인분으로 나오는 전복솥밥은 전복을 잘게 자른 뒤 골고루 섞어 달래장에 비벼 먹는다. 마지막에 먹는 누룽지가 일품이다. 9,10 아시아 베스트 레스토랑에 선정된 서울신라호텔 라연의 전복젓국갈비.

집밥을 찾아서
우리에게 요리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는 한 ‘집밥’을 내는 식당의 인기는 계속될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밥의 중요성에 대해 듣고 ‘식사하셨습니까?’가 인사말로 쓰일 정도로 밥에 남다른 의미를 두는 우리에게는 잘 먹어야 한다는 강박은 있는 반면 도무지 요리할 시간은 없어졌다. 이런 형국이니 집에서 만든 것처럼 심심하게 만든 ‘집밥’에 사람들은 열광한다. 때로 너무 싱거워서 탈인 집도 있지만, 기존 식당과 달리 ‘싱겁다’는 게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게다가 한참 전에 지었다가 스테인리스 밥그릇에 넣어 영혼을 빼앗긴 밥을 주는 여느 식당과 달리 집밥을 표방하는 가게들은 대부분 갓 지은 밥을 제공한다. 그것만으로도 황송하다. 패션 피플에게 ‘집밥’을 제공한 빠르크는 ‘핫한’ 식당만 입점이 가능하다는 신세계 본점에 입성했다. 일호식, 무명식당, 쌀가게, 순수식당, 미수식당은 동네 주민뿐만 아니라 일부러 찾아오는 식당이 되었다. 요즘 가장 인기 있는 집밥 식당 중 하나인 소녀방앗간은 성수동의 작은 주택가 골목길에 있다. 청송에서 채취한 나물을 넣은 산나물밥과 참명란비빔밥, 시골된장찌개 등 매일 바뀌는 음식으로 하루 두 가지 음식만 선보인다. 취나물을 우린 차를 마시며 벽에 붙어 있는 나물 그림 등을 구경하다 보면 밥이 나온다. 제각기 향이 다른 나물을 넣어 만든 밥에 간장을 넣어 비벼 먹었다. 마치 외할머니가 차려준 밥상처럼 구수하다.

지역의 맛
불황에도 사람들은 ‘즐거움’을 위해 지갑을 연다. 요즘 그 즐거움을 차지하는 건 여행과 미식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결합하여 강력한 시너지를 내는데, 바로 여행에서는 미식이 빠질 수 없고, 미식이 여행을 떠나는 목적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도다리쑥국을 먹기 위해 통영으로 떠나고, 새조개를 맛보기 위해 남당항으로, 갯장어 샤브샤브를 먹기 위해 여수로 향하는 식이다. 제주 여행을 떠난 사람들의 SNS는 바다보다 ‘먹방’ 사진으로 채워지곤 한다. 이렇듯 지역의 맛에 눈뜬 우리. 하지만 그 음식이 먹고 싶을 때마다 서너 시간 이상을 달려갈 수는 없는 일이다. 택배로 주문하기도 하지만 그곳에서 먹은 것만 못하다. 최근 한식은 바로 이 지역의 맛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강남역의 술집인 ‘장 서는 날’은 전국의 재래 시장과 계약을 맺고 소래포구 조개탕, 광주 말바우 시장 찹쌀육전 등 전국 각지의 장에서 맛볼 수 있는 지역 음식을 선보인다. 동부이촌동에 이어 지난달 청담동에 문을 연 ‘오통영’은 통영 음식을 프랑스산 그릇에세련되게 담아낸다. 충무김밥, 멍게비빔밥, 굴밥, 전복솥밥 등 통영을 대표하는 그 음식이다. 특히 충무김밥에는 시락국을 곁들이는데, 통영의 어느 아침에 서호시장에서 먹은 바로 그 맛이다. 터프하게 구워낸 우럭구이와 모둠전에 와인을 곁들일 수도 있다. 통영까지 운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안도하며 성게비빔밥을 쓱쓱 비볐다.

약진하는 한식
지난 3월 9일 발표한 ‘아시아 베스트 레스토랑 50’에서는 익숙한 이름을 여럿 발견할 수 있었다. 정식당은 아시아 베스트 레스토랑 순위에서 작년보다 10계단을 올라 10위를 차지했고, 라연은 38위와 함께 ‘주목할 만한 시선’ 격인 ‘One to Watch’ 부문에 선정되었다. 정식당의 뉴욕점은 한식 최초로 미슐랭 별 2개를 획득하기도 했다. 세계적 미식의 각 축장인 뉴욕에서도 미슐랭 별 2개짜리 레스토랑은 10곳이 채 되지 않는다. 라연은 서울 신라호텔에서 대대적인 리뉴얼과 함께 새롭게 선보인 정통 한식 레스토랑이다. 주요 특급호텔들이 수익성 저하를 이유로 모두 한식 레스토랑의 문을 닫은 상황에서 라연을 시작한 것에 대해 관심이 쏠렸다. 한식의 오트 쿠튀르를 표방한 라연은 셰프의 고민과 재능을 집대성한 것 같은, 세심하고 정갈한 한식을 낸다. 깊은 맛을 추구하면서 제철 재료에 집중해, 음식으로 계절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순위에 회의적인 반응도 있다. 미슐랭이 일본 음식과 프랑스 음식에 후하다는 비판도 꾸준히 제기된다. 하지만 여기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건 사실이다. 그 나라를 여행할 때 세계 레스토랑 순위나 미슐랭 별을 받은 레스토랑에서 한 번쯤 식사하려고 부지런히 예약 메일을 보내니 말이다. 이 리스트를 통해 정식당과 라연, 밍글스에 다른 나라의 손님이 가득 찬다면, 그 또한 뿌듯한 일이다. 내년에는 더 많은 이름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