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흑인과 라틴 소녀들을 패션쇼에서 볼 수 없는 건가? 미국 대통령도 흑인인 이 시대에!” 흑인 모델 기용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디자이너 리카르도 티시의 바람은 지금 거대한 현상이 되었다.

1 잇걸로 떠오른 FKA 트위그스. 2 최근 주가를 올리고 있는 케냐 출신 모델 말라이카 퍼스. 3 마크 제이콥스 2015년 봄/여름 광고 캠페인 모델 조안 스몰스. 4 버버리 프로섬의 광고 캠페인에 등장한 나오미 캠벨과 조던 던. 5 푸마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된 리한나.  

요즘 패션계에서 가장 ‘뜨거운’ 뮤즈는 FKA 트위그스이다. 외계에서 내려온 것 같은 독특한 비율의 얼굴, 신시사이저 음률을 타고 흐르는 몽환적인 하이 톤의 보컬, 하이패션을 날것처럼 소화해내는 동시대적인 스타일 감각이 혼연일체를 이룬다. <타임>지는  2014년 올해의 앨범으로 FKA 트위그스를 선정하며 가장 인상적인 데뷔 앨범이라고 호평했고, 그의 데뷔 앨범인 의 노래들은 런웨이에 울려 퍼졌다. 게다가 트위그스는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자리를 밀어내고 로버트 패틴슨의 마음까지 차지했다(기사를 쓰고 있는 지금 둘의 약혼 뉴스가 떴다!). 새로움에 언제나 목말라 있는 하이패션계가 이런 대어를 놓칠 리 있겠는가. FKA 트위그스는 , 매거진의 표지를 장식하더니 최근에는 미국판 <보그>의 지면을 장식하면서 명실공히 ‘잇걸’로 등극했고, DKNY의 2015년 봄/여름 컬렉션은 트위그스의 90년대풍 헤어 스타일을 고스란히 재현했다. 그런데 우리가 트위그스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이유는 FKA 트위그스가 현재 우리가 원하는 시대상의 요소를 모두 갖추었기 때문이다. 뼛속까지 하이엔드이면서 그 따위는 별거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심드렁한 심리와 그것을 가능케 하기 위해 비주류를 껴안아 전복된 것처럼 혼선을 주는 시대 말이다. 정의하자면 2010년대가 온통 ‘쿨’한 것에 미쳤다는 뜻이기도 하다. 1990년대의 스트리트 아이템이 부활하고, 여배우보다는 여가수가 패션 브랜드의 러브콜을 받고, 흑인의 힙합정신이 고스란히 영감으로 작용하며, 타투가 새로운 액세서리가 된 현상, 이 모든 것이 그 결정적 증거이다. FKA 트위그스는 흑인 뮤지션이며 쿨한 방식을 하이패션적으로 신선하게 표현하며 동시대가 원하는 정확한 지점을 관통하고 있다. 여기에 온통 ‘쿨’한 것에 미친 지금의 현상을 뒷받침해주는 아이콘이 하나 더 있으니 바로 리한나다. 보디 슈트에 트레이닝 팬츠와 보머 재킷을 걸치고 주렁주렁 체인 목걸이와 반지를 가득 낀, 룰에 얽매이지 않은 그의 스타일은 톰 포드와 알렉산더 왕에게 영감을 주었고 샤넬, 랑방, 알투자라, 알렉산더 왕, 디올, 잭 포즌, 미우 미우의 프런트 로를 석권하기에 이르렀다. 리한나의 질주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배드걸 리리’라는 이름으로 1500만 명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거느리며 뮤즈를 넘어 거침없이 패션 속으로 돌진하고 있다. 지난 2013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영국 브랜드 리버 아일랜드의 디자인을 맡았고 발맹의 2014년 봄/여름 시즌의 광고 캠페인과 코스메틱 브랜드 맥의  ‘비바 글램’의 얼굴이 되기도 했다. 올해는 푸마의 크리에이티브이자 글로벌 앰배서더로 도발적인 스타일링을 선보일 예정. 푸마 글로벌 뷔욘 굴든 회장의 리한나 예찬은 이렇다. “그녀는 전 세계인을 매료시키는 카리스마와 독창성을 지녔죠. 자신감이 넘치고 확고한 동시에 즐거움을 잃지 않는 푸마의 가치와 일치합니다. 리한나를 선택한 것은 당연한 결과예요.” 



6 랑콤의 뮤즈가 된 루피타 뇽. 7 지방시는 올 시즌에도 흑인 모델을 광고 캠페인에 내세웠다. 8 칼 라거펠트의 단편 영화 <환생>에 등장한 퍼렐 윌리엄스. 9 발맹 남성복 광고 캠페인은 킴예 커플이 차지했다. 10 2015년 봄/여름 마르니 런웨이에 선 에멀리 몬테로. 11 리카르도 티시가 찬양하는 뮤지션 에리카 바두. 12 샤넬 컬렉션을 통해 루키로 떠오른 빈스 왈튼.

하이패션이 사랑하는 두 남자
리한나만큼 패션계가 협업을 애원하는 두 남자가 있으니 바로 ‘킴예’ 패밀리의 가장 카니예 웨스트와 세상에서 가장 해피한 남자 퍼렐 윌리엄스. 두 힙합 뮤지션의 행보는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팽팽한데 전력으로 본다면 2012년 자신의 이름을 건 레이블을 낸 카니예 웨스트가 조금 우위에 있다. 물론 그 레이블이 혹평 속에 자취를 감추었지만 디자이너들에겐 여전히 매력적인 대상이다. 그의 영원한 친구 지방시의 리카르도 티시는 킴 카다시안에게 웨딩드레스를 선물했고, 발맹의 올리비에 루스탱은 올 시즌 발맹의 남성복 광고 캠페인에 킴예 커플을 등장시켰다. 여기에 진한 로맨스는 덤. “킴과 카니예는 스타일 아이콘이자 나의 친구들이죠. 그들의 사랑, 아름다움, 그리고 다양성을 향한 존경을 캠페인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들은 새로운 모더니티이며 발맹의 새로운 선언이기도 합니다.” 시행착오를 거친 카니예 웨스트의 패션을 향한 열정은 아디다스 오리지널스의 2015년 가을/겨울 컬렉션으로 귀결되었다. 지난 2월 13일 아티스트 바네사 비크로프트가 구성한 퍼포먼스로 꾸며진 쇼케이스에서는 가지각색의 인종, 체형을 지닌 50명의 모델이 일렬 종대로 서 있었다. 밀리터리 룩을 바탕으로 디자인한 의상은 종전의 것보다 친숙하고 현실적인 모습이었다. 특히 보디 스타킹을 이용해 각 인종의 피부톤을 강조했는데, 이는 컬러, 성명, 인종 등 계급적 판단과 차별을 배제하기 위해서였다고. 쇼케이스는 성공적이었고 카니예의 주가는 더욱 올라갔다! 카니예 웨스트와 음악적으로나 패션적으로 라이벌 관계인 퍼렐 윌리엄스는 샤넬의 2014년 파리-잘츠부르크 공방 컬렉션에 맞추어 칼 라거펠트가 감독한 단편 영화 <환생>에 출연하며 하이패션계와의 돈독한 우정을 과시한 바 있다. “이 모든 것은 퍼렐 윌리엄스, 카라 델레바인과 제랄딘 채플린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특히 영화의 OST ‘CC The World’를 직접 작사, 작곡한 퍼렐과의 완벽한 예술적 협업이었죠. 그는 천재라는 수식어로는 부족한 아이콘입니다.” 퍼렐 윌리엄스를 사랑하는 건 칼 라거펠트뿐만이 아니다. 프랑스 럭셔리 백 브랜드인 모아나는 퍼렐과 함께 동심을 불러일으키는 레진 소재 ‘트레인 백’과 ‘트레인 클러치백’을 선보였고, 아디다스 오리지널스는 헤리티지 모델인 스탠 스미스에 커다란 물방울 무늬를 더한 유쾌한 버전을 출시했다.

 

흑진주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다

흑인 뮤지션의 파워는 패션의 얼굴을 바꾸어놓는 영향력을 발휘하기에 이르렀다. 그 누구도 하지 못한 패션계의 평등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다. 패션은 주기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얼굴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꾸었으며 2010년대는 한나, 비욘세, 리타 오라, 레이디 가가 등 금발미녀가 아닌 뮤지션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 흐름을 적극적으로 이끄는 이는 지방시의 리카르도 티시이다. “나는 대가족 속에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며 자랐고 우리는 모두 똑같다고 배웠어요. 왜 흑인과 라틴 소녀들을 런웨이에서 볼 수 없는 거죠? 미국 대통령도  흑인인 이 시대에 말이에요. 사람들은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여전히 피부색으로 차이를 만들죠.” 그는 2010년 조안 스몰스를 발굴했고, 2012년 오트 쿠튀르에서는 아프리카, 남미, 동남아 계열의 모델들만 캐스팅했으며 지난봄 광고 캠페인에는 흑인 소울 뮤지션 에리카 바두를 아이콘으로 낙점하며 흑진주를 전면에 내세웠다. 앙골라 출신의 마리아 보르게스 역시 지방시의 익스클루시브 모델로 서며 혜성처럼 등극한 주인공. 미우치아 프라다 역시 새로운 모더니티는 다양성이라는 진실을 자각한 디자이너이다. 2012년 시즌 나오미 캠벨 이후 19년 만에 처음으로 흑인 모델 말라이카 퍼스를 광고 모델로 발탁한 이래 2014년 봄/여름 시즌 프라다 광고 캠페인에 요즘 대세인 흑인 여배우 루피타 뇽을, 미우 미우의 2014년 리조트 컬렉션에서는 도미니크 공화국에서 날아온 에멀리 몬테로를 익스클루시브로 내세우며 이슈를 낳았다. 프라다가 이번 시즌 익스클루시브 모델로 독점 계약한 모델 역시 흑진주이다. 코트디부아르 출신의 프랑스 국적을 가진 아야 존스도 우아하면서도 쿨한 매력의 신인이다. 유일하게 올봄 시즌 마크 제이콥스 광고에 캐스팅되며 갈색 페이스 시대에 힘을 싣는다. 흑인 모델 기용에 인색하기로 소문 난 피비 파일로도 이제 피부색이 진할수록 더욱 근사해 보인다는 것을 알아챈 걸까. 그동안 흑인 모델을 찾아볼 수 없었던 세린느의 런웨이에서는 초콜릿색 피부가 반짝이는 빈스 왈튼, 이사우니 브리토, 마리아나 산타나가 당당하게 걸어 나온다. 패션계 밖이나 안이나 완전한 평등은 아직 멀었다. 흑인, 동양계라는 수식어가 붙는 자체가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어쩌면 그런 날이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민한 패션계는 알고 있다. 지금은 모든 것을 포용해야 하는 때임을. 나는 하얗고 너는 까만 것이 아니라  단지 조금 밝고 어두운 것뿐이라는 인식이 차별을 넘는 날이 언젠가는 오기를 기다리며. 지금은 바야흐로 뉴 블랙 파워 시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