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일에 열정적인 남자는 섹시하다. 20대의 모험가, 소방관, 목수 등 호기심을 자극하는 직업을 가진 7명의 남자를 만났다. ‘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들의 가치관과 취향, 목표가 고스란히 묻어났다.

김간지가 입은 재킷과 팬츠는 푸시 버튼(Push Button). 운동화는 아디다스 오리지널스(Adidas Originals). 선글라스는 에드워드 마틴 바이 씨샵(Edward Martin by C Shop). 나잠 수가 입은 재킷과 팬츠는 푸시 버튼. 운동화는 아디다스 오리지널스. 안경은 트리플 포인트 바이 비씨디 코리아(Triple Point by BCD Korea).

뮤지션 김간지 × 나잠 수
29세, 30세, 5인조 밴드 술탄오브더디스코 멤버

2014년은 ‘술탄오브더디스코(이하 술탄)’의 해였다. 국내 록 페스티벌을 휩쓴 그들은 지난해 영국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 일본 슈퍼소닉의 무대까지 점령했고, 700석 규모의 단독 콘서트는 하루 만에 매진됐다. 드러머 김간지, 그리고 보컬이자 술탄의 곡을 쓰는 나잠 수는 카메라 앞에서 잔뜩 신이 나 있었다.

 

글래스톤베리 이후 술탄의 위상이 달라진 걸 체감하나?
(김간지) 없다. 그보다 지난 12월에 발표한 ‘웨ㅔㅔㅔㅔ’에서 피처링을 해준 블랙넛 덕분에 새로운 리스너가 영입된 것 같다. 군대 간 스윙스를 대신해 저스트 뮤직의 사장이 된 친구다.

‘웨ㅔㅔㅔㅔ’의 가사는 짜증나게 하는 사람에 대한 내용이다. 실제로 어떤 타입의 사람이 짜증스럽나?

(나잠 수) 인터넷에서 아는 척하는데 실제로는 아는 게 없는 사람. 사람들이 불편해하는데, 자기는 그것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막상 만나면 안타까워서 마냥 욕할 수는 없다.

공연을 많이 하고 술탄으로서 자리를 잡았는데도 여전히 ‘투잡’을 하는지 궁금하다.

(김간지) 항상 레슨을 한다. 만약 다른 생계 유지 수단이 없다면 술탄에 혼신의 힘을 쏟게 되고, 성과가 없으면 스트레스를 받을 테니까. 목숨 걸고 열심히 하는 건 ‘간지’가 안 나기도 하고.

(나잠 수) 술탄의 다섯 명 멤버 모두 동의하는 지점이다. 그래도 <무한도전>에라도 나가서 ‘대박’이 나면 일 그만두고 딴 걸 할지도 모르지. 성형도 하고.
(김간지) 성형한 나잠 수를 상상하니 토할 것 같다.

예전에는 아랍, 술탄 같은 가상의 콘셉트를 강조했는데 어느 순간 곡과 무대 스타일이 바뀌었다.

(나잠 수) 예전 콘셉트가 재미있었는데 왜 그만뒀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가끔 보니까 웃긴 거지 몇 년째 같은 콘셉트를 잡으니 정작 우리는 너무 재미가 없는 거다. 지금은 80년대 흑인 힙합이 콘셉트다.

 

서로를 칭찬한다면?

(나잠 수) 김간지는 유기견을 키운다. 사람에게는 냉정하지만 동물에게는 따뜻한 남자다. 나는 원래 칭찬을 잘 한다.

(김간지) 하지만 나잠 수가 나를 칭찬해도 내겐 별 의미가 없다. 나잠 수가 뭔데! 칭찬을 들어도 ‘그래, 너는 이걸 좋아하는구나. 그런데 나는 나의 길을 갈게’ 이런 느낌이다.

과연 아무도 팔로잉하지 않는 남자답다.

(나잠 수) 김간지는 트위터 팔로잉하는 방법을 몰랐을 뿐이다. 트위터는 팔로잉한 사람들의 타임라인을 봐야 재미있는 건데.

(김간지) 그래서 내 핸드폰에 남은 나잠 수 계정의 타임라인을 살피고 있다. 두 사람도 그렇지만 다른 멤버들도 개성이 뚜렷하다.

 

그런데도 함께 밴드를 잘 유지하는 비결이 뭘까?

(김간지) 완전한 합의점은 없지만 느슨한 연대가 있다. 그리고 좋은 것과 ‘구린 것’에 대한 다섯 명의 반응이 크게 다르지 않다. 개인 취향과는 별개로 이건 잘했고, 저건 별로라고 느끼는 지점이 비슷하다. 

 

<무한도전>에 출연하고 싶은가?

(나잠 수) 그런 고민은 전혀 안 한다. 글래스톤베리도 목표로 삼았던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된 거다. 어쨌든 우리는 주어진 일에는 최선을 다하는 성실하고 건실한 청년들이니까. 

화이트 셔츠는 커스텀멜로우(Customellow). 스니커즈는 코치(Coach). 팬츠는 본인 소장품.

셰프 이진호
32세, 애슐린 라운지 헤드셰프

14살에 요리를 시작했지만 이진호는 요리가 자신의 전부라고 말하지 않는다. 기타를 즐겨 치고, 직접 사진을 찍어 요리책도 만들며, 방송에도 출연하는 그는 24시간이 모자란다. 요리를 굉장히 일찍 시작했다. 재능을 일찍 발견한 걸까? 4살 때부터 태권도를 시작해 어릴 때 영어, 미술, 음악 등 학원만 7개를 다녔다. 취미로 하던 요리가 어느 순간부터 너무 하고 싶어서 중학교를 중퇴하고 요리학교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부모님의 반대는 없었나?

가족이 뉴질랜드로 이민을 왔을 때였는데, 뉴질랜드에서도 19살 미만이 요리학교에 들어간 전례가 없어서 우여곡절 끝에 입학했다. 뉴질랜드의 요리학교는 한국과는 완전히 다르다. 워낙 과정이 혹독하다 보니 개강 일주일 만에 학생 중 절반은 포기하더라. 자격증을 딸 때까지 과제로 300개가 넘는 요리를 했던 것 같다.

‘재즈 요리사’라는 이름으로 블로그를 운영했다. 왜 재즈 요리사였나?

좋아하는 게 워낙 많긴 하지만 재즈는 마니아 수준으로 즐긴다. 한국에서 살던 때 13년 동안 옆집에 살던 부부가 아내는 기타리스트, 남편은 기타 제작자였다. 생일 선물로 아저씨가 기타를 만들어 주셨는데 그때부터 조금씩 치기 시작해서 지금도 취미로 연주하곤 한다. 

지난해 홍대 호우에서 청담동 애슐린 라운지로 레스토랑을 옮겼다. 새로운 레스토랑을 택한 이유는 뭔가?

레스토랑에 얽매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었다. 17년째 요리를 하다 보니까 내 관심사나 생활이 모두 요리에 맞춰지는 게 어느 순간 조금 두렵고 갑갑하게 느껴지더라. 지금도 직접 요리를 하지만 늘 주방을 지키는 것보다 메뉴 구성처럼 좀 더 큰 그림에 참여하는 게 적성에 맞는 것 같다. 

 

하고 싶은 일이란 어떤 것인가?

나는 내 요리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으면 좋겠다거나 완벽하길 바라는 욕심은 없다. 미디어 산업에 관심이 많아서 물방울 하나, 소스 하나까지 예술적으로 담아낸 영상을 선보이는 채널도 만들고, 요리 잡지도 내고 싶다. 일본의 스시 장인인 ‘스키야바시 지로’의 지로처럼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지하철을 타고 출근해 항상 같은 요리를 하는 요리사도 있지만, 난 그런 타입은 아닌 것 같다. 

 

다양한 일을 할수록 나만의 원칙이 필요할 것 같다.

착하게 사는 게 제일 중요하다. 같이 일할 사람을 뽑을 때도 성실한가, 선한가를 먼저 본다. 그래야 일을 하는 동안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열정페이’ 같은 건 말도 안 된다. 나랑 같이 일하는 사람에게 줄 돈을 아껴서 생긴 돈 같은 건 필요 없다. 지금도 내 밑에 있는 셰프가 나보다 월급을 더 많이 받는데, 레스토랑에 있는 시간이 나보다 훨씬 기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재킷은 코오롱 스포츠(Kolon Sport). 데님 셔츠는 갭(Gap). 롤업 팬츠는 컨버스(Convers). 워커는 팔라디움(Palladium). 시계는 파슬 와치(Fossil Watch).

모험가 이동진
27세, 청년모험가

이동진은 ‛당신은 도전자입니까?’라고 묻기를 서슴지 않는다.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이 청년은 철인 3종부터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오지 탐험대, 독도 릴레이 수영, 아시아 최연소 아마존 마라톤 완주, 자전거 미대륙 횡단을 완료한 것에 이어 얼마 전에는 몽골 대륙을 말을 타고 가로질렀다.

졸업을 앞두고 몽골에 다녀왔다. 다시 떠난 이유는 무엇인가?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취업해야 한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한번 더 내 자신에게 묻고 싶었다. 그래서 마음의 소리는 들었나. 하루는 웃통을 다 벗고 전속력으로 말을 타는데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이렇게 질주하면서 살아야 하는구나’ 하고. 콤플렉스에서 도전 의식이 비롯됐다고 했다. 내가 공부를 조금만 더 잘하고, 조금만 더 인기가 있고, 하다못해 집에 조금 여유가 있었다면 나를 바꾸고 싶은 절실함이 그토록 크지 않았을 것 같다. 대학에도 떨어지니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재수를 결심했고 결과적으로 그게 내 첫 번째 도전이 됐다.

 

무엇에 도전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좋아하는 일이 뭔지,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에게는 하기 싫은 것을 극복하는 것부터 시작해보라고 권한다.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뭐든 바뀔 텐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문제다. 남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건 재미있는 영화를 보거나, 좋은 노래를 듣고 감동받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당신의 도전이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 때는 없었나?

수영을 잘 할 줄 모르면서 울진해협을 건너는 3박 4일 릴레이에 참여했는데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아찔하다. 6박 7일간 아마존 정글 마라톤에 참가했을 때는 늪지대에 빠져 허리까지 잠긴 적도 있다. 정말 ‛몰라서’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가족은 당신의 도전을 지지해주나?

아버지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결국 취업을 잘 하겠지라고 생각하셨다. 하지만 아들이 TV에 나오고, 대통령상도 받으니까 ‛이젠 나도 모르겠다’고 하시더라. 아버지가 알던 삶의 루트에서 내가 벗어나버린 거다. 

 

당신도 실패 경험이 있나?

금융 전문가 출신이 쓴 <나는 세계일주로 경제를 배웠다>를 읽고, 나도 돈을 벌면서 세계 일주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돈의 흐름이 보이지 않더라. 추진력이 좋을 뿐이지 매사 완벽한 것은 아니다.

지금은 그때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나?

자전거로 미국을 횡단할 때, 비행기로 세계를 여행하고 싶다는 내 말을 듣고 200억짜리 제트기를 빌려주겠다고 한 사람이 있었다. 세상에는 비전이 보이는 한, 재미있는 일에 투자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많다. 음료수가 100병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한 병을 주는 건, 납득할 만한 명분만 있다면 사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다음에는 어떤 일에 도전하고 싶은가?

비행조종사가 된 뒤 비행기로 세계 100개국을 다닐 예정이다. UN에 청년기구도 만들고, 나중에는 민간우주사업에도 뛰어들고 싶다. 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소방관 이승연
28세, 서울 강남소방서 구조대

소방관이 되기로 결심한 이후, 이승연은 오직 소방관이 되기 위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왔다. 다른 사람을 도울 때 느끼는 뿌듯함이 삶의 가장 큰 원동력이라고 말하는 2년 차 소방관은 자신의 선택에 한 점의 후회도 없다.

 

소방관이 되기로 결심한 것은 언제인가?

중학생 때 친구들과 지나가던 할아버지의 리어카를 밀어드린 적이 있다. 그때 남을 도울 때의 뿌듯함이 오래 남는다는 걸 깨달았다. TV에 나오는 소방관의 모습을 군대에서 보고, 내 일이라고 생각했다. 

 

소방관이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

워낙 공부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필기 시험은 3년 동안 다섯 번을 떨어졌다. 하지만 소방관을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 없다. 판매수익으로 어린이 화상환자를 돕는 ‘몸짱’ 소방관 달력 촬영에 참여했다.

 

운동을 꾸준히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복싱을 해서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소방학교에서 처음으로 체력의 한계를 느꼈다. 내 몸도 가누지 못하는데 어떻게 사람을 들쳐 업고 뛸 수 있겠나. 그때부터 체력을 단련하기 위해 힘썼다. 

 

당신이 하는 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

소방공무원은 앰뷸런스 구급대원, 진압대원, 그리고 구조대원으로 나뉜다. 나는 인명구조를 최우선으로 하는 구조대원이다. 교통사고 현장에서 사람을 꺼내고, 화재 현장에도 가장 먼저 들어간다. 

 

꿈을 이루고 나서,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점도 있나?

내가 근무하는 강남소방서는 하루에 출동만 스무 건이 넘는다. 몸은 힘들어도 그만큼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기회나 배울 점이 많다. 하지만 잠긴 문을 열어달라는 것 같은 단순 출동 때문에 위급한 출동에 늦을 때가 있다. 일분일초가 아까운데 말이다. 

 

최근 이야기되는 소방공무원의 장비와 처우 개선에 관련한 당신의 의견이 궁금하다.

소방관은 국가직이 아니라 지방직이기 때문에 지방예산에 따라 예산이 좌지우지된다. 소방차, 들것, 방화복까지 소방은 장비가 중요한데, 예산이 적게 편성되면 장비가 열악해질 수밖에 없다. 내부에서도 국가직 전환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는 상태다.

가장 괴로웠던 경험은 무엇인가?

한 고등학생이 투신을 했는데 어머니와 동생이 오열하는 것을 목격했다. 나도 누나를 잃은 경험이 있기에 정말 마음 아팠다. 구조대원은 의사의 판단이 있기 전에는 무조건 환자가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 맥박이나 호흡이 없어도 심폐소생술을 일단 하고 보는 거다. 트라우마가 생기지는 않나? 보기 힘든 현장일수록 팀원들과 더 많이 이야기하려고 한다. 혼자 곱씹는 건 좋지 않으니까. 

두려울 때는 없나?

훈련을 열심히 받고, 스스로 준비가 됐다는 자신감이 생기면 두려움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구조대원에게 가장 필요한 건 사명감이다. 사람을 구해야 하는 상황에서 마스크가 하나밖에 없다면 환자에게 씌울 수 있을 정도로 소방관으로서의 사명감을 갖는 게 가장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