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열의 스케치북> 녹화가 있는 화요일, KBS 공개홀의 하루는 유난히 일찍 시작된다. 이른 아침, 공개홀의 텅 빈 객석에 앉아 이 프로그램이 지니는 몇 가지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지난 5년간 변함없이 <유희열의 스케치북> 무대에 오른 MC 유희열.

지난 5년간 변함없이 <유희열의 스케치북> 무대에 오른 MC 유희열.

 

 

아침 일찍부터 모여든 스태프들은 각자의 일로 조용히 분주한 모습이다. 복도를 바쁘게 뛰어다니지만 시끄러운 소리는 들리지 않는, 예상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장면들. 시간은 고요히 정확하게 흘렀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출연자들이 하나 둘 도착했다. 곧 한 팀씩 무대에 올랐고 음향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객석의 중앙, 앞자리에 일찌감치 자리를 잡은 이는 <유희열의 스케치북>의 음악감독 강승원이다. 김광석 ‘서른 즈음에’의 작곡가이기도 한 그는 지난 4월, ‘강승원 1집 만들기 프로젝트’의 주인공으로 이적, 존박과 함께 <유희열의 스케치북>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무대가 아닌 객석에 앉은 그의 모습은 더 편안하고 평화로웠다. 그의 묵직한 뒷 모습이 오랜 시간 이어온 그의 음악 인생만큼이나 견고하게 느껴졌다.

 

1 3집 컴백 무대를 위해 <유희열의 스케치북>을 찾은 십센치. 2, 4 듀오 무대를 선보인 효린과 주영. 3 효린과 주영의 신곡 ‘지워’의 피처링을 맡은 래퍼 아이언. 5 리허설을 마치고 관객을 기다리는 객석.

1 3집 컴백 무대를 위해 <유희열의 스케치북>을 찾은 십센치. 2, 4 듀오 무대를 선보인 효린과 주영. 3 효린과 주영의 신곡 ‘지워’의 피처링을 맡은 래퍼 아이언. 5 리허설을 마치고 관객을 기다리는 객석.

 

 

십센치와 조은, 효린과 주영, 임창정이 오늘의 게스트다. 언제나 그렇듯, 이제 막 새로운 앨범을 발표했다는 공통점을 지닌 출연자들이다. 얼마 전 3집<3.0>을 발매한 십센치가 가장 먼저 무대에 올랐다. 강승원 음악감독은 악기 하나하나의 소리를 꼼꼼하게 체크했다. 노래하는 권정열과 기타 치는 윤철종은 차분히 자신들의 의견을 전달했다. 그들의 의견을 반영해 한 번 더 사운드 체크를 마친 후에야 5년 만에 새로운 앨범을 들고 온 조은이 무대에 올랐다. 리허설 무대에서조차 긴장하는 듯 보였지만 앨범을 튼 것처럼 완벽하게 노래했다. 이어 콜라보레이션 음반을 발매한 효린과 주영, 임창정도 차례로 리허설을 마쳤다. 한 곡이 아닌 여러 곡을 라이브로 불러야하는, MR이 아닌 <유희열의 스케치북> 밴드와 호흡을 맞춰야 하는 프로그램인 만큼 음향 리허설은 꽤 오랜 시간 진행되었다. 잠깐의 휴식 후, 헤어 메이크업과 의상까지 완벽하게 한 뮤지션들이 카메라 리허설을 위해 다시 무대에 올랐다. 긴 시간 리허설이 진행되는 동안 유희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녹화 시간은 7시 반. 유희열은 6시가 되어서야 공개홀에 도착했다. 바로 대본 미팅을 가진 그는 한 시간 뒤 여유롭게 미팅룸을 빠져나왔다. 5년 동안 매주 화요일이면 반복되는 일, 그러는 동안 ‘MC’라는 수식어는 ‘뮤지션’이라는 수식어만큼이나 그에게 익숙해졌다. 십센치와 조은, 임창정은 리딩을 마친 유희열을 찾았고 그들은 한참 동안 인사를 나눈 후 앨범을 나눠 가졌다. 유희열은 지난 11월, 7년 만에 정규 앨범 를 발매했다. 모두가 그가 <유희열의 스케치북> 무대에서 컴백 무대를 가질 거라 예상했지만 그는 끝내 무대에 오르지 않았다. 본인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곡을 홍보하는 모양새가 보기 좋지 않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음악 프로그램 출연 없이 각종 음원 차트 정상에 앨범의 타이틀 곡 ‘세 사람’이 올랐다.

 

6 대기실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십센치의 윤철종. 7 누구보다 진지한 자세로 리허설에 임한 조은. 8 신뢰하는 뮤지션이자 MC 유희열. 9 감기 투혼을 발휘하며 무대를 장악한 임창정.

6 대기실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십센치의 윤철종. 7 누구보다 진지한 자세로 리허설에 임한 조은. 8 신뢰하는 뮤지션이자 MC 유희열. 9 감기 투혼을 발휘하며 무대를 장악한 임창정.

 

 

그는 <유희열의 스케치북>을 통해 인연을 맺은 뮤지션들과 새로운 작업을 이어갔고 늘 그의 앨범에 등장했던 익숙한 몇몇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의 음악은 달라졌지만 토이는 여전히 토이였다. 유희열은 자신의 이름을 앞세운 이 프로그램에 대해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상투적인 표현이 될진 모르겠지만 여기서 내가 흔들리거나 지친다면 많은 부분이 달라질 것 같아요. 뭔가 지키고 싶은 첫 번째 모습, 나한테 시작점 같은 느낌이고,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음악 프로그램이다 보니 사명 의식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에요. 버텨야 해요. 여기서 버티지 못하고 프로그램이 없어진다면 다 없어지는 거니까요. 그렇게 된다면 언젠가 이 프로그램이 기폭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유희열은 프로그램의 출연자와 선곡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지 않았다. 스스로 객관적으로 조언해줄 수 있는 입장이 되어야 이 프로그램이 오래 갈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난 5년, 금요일 밤 12시 20분이면 어김없이 <유희열의 스케치북>이 방송되었다. 그 사이 다른 방송사에서는 수많은 새로운 프로그램이 등장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희열의 스케치북>은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수많은 언더그라운드 밴드와 인디뮤지션들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처음으로 정규 방송의 무대에 서는 기회를 가졌고 래퍼 바스코는 데뷔 12년 만에 가진 첫 무대라며 눈물을 흘렸다. 그들만이 기획할 수 있고 보여줄 수 있는 특집은 많은 관객과 시청자를 울렸다. 무대 뒤에서 수십 년 동안 연주해온 연주자들이 주인공이 되었던, 연주자들에게 헌정하는 특집 ‘The Musician’, 가수들이 팬으로서 좋아하는 가수, 대중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그 가수들의 진가를 발견할 수 있었던 T‘he Fan’ 등은 음악 프로그램의 역사를 다시 썼다. “저는 매주 방송이 재미있어야 하고 커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연인 사이에 가끔씩 이벤트가 있는 것처럼 방송과 시청자 사이에는 특집이 필요하죠. 하지만 <유희열의 스케치북>의 진짜 정체성은 특집이 아닌 지루한 매주 매주에 있어요.” 이번 크리스마스에도 어김없이 화려하고 떠들썩하게 변신할 거다. 그리고 특집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하고 조용하게, 소박하지만 부족하지도 않은 한 주 녹화를 시작할 거다.

아이돌 그룹 일색의 음악 프로그램 사이에서 보는 음악이 아닌 듣는 음악을 선사하는 프로그램, 알려지지 않은 뮤지션에게 기회를 주는 프로그램. 이것만으로도 <유희열의 스케치북>이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10년 후에도 유희열이 얼굴 빨개지며 뮤지션들과 야한 애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한다. 동시대의 다양한 음악을 소개하고 이름 없는 뮤지션을 세상에 드러내 보였으면 한다. 다른 어떠한 곳도 아닌 바로 여기, <유희열의 스케치북>이라는 무대 위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