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영화 창고를 열었다. 무엇보다 생생한 맛으로 눈과 혀끝을 두드린 음식이 떠올랐다. 음식은 접시 위에서 영화 속의 또 다른 주인공이 되곤 했다. 아름다운 영화 속에 존재한, 가장 선명한 맛은 무엇일까?



1 헬프 | 2011

여전히 인종차별이 선명한 1963년의 미국 남부 미시시피 잭슨. 작가를 꿈꾸며 신문사에 취직한 스키터는 살림 정보 칼럼을 위해 베테랑 흑인 가정부 에이빌린에게 도움을 구한다. 살림 노하우를 전수해주던 에이빌린은, 자신과 같은 흑인 가정부의 삶을 써보라는 제안을 받고 고민에 빠진다. 여기에 주인집의 화장실을 썼다는 이유로 해고당한 미니도 합세한다. 영화는 에이빌린과 스키터, 미니와 셀리아의 우정을 담고 있다. 미국 남부 지역의 풍요로운 가정식 요리도 쉴 새 없이 등장하는데, 여자들의 삶과 교감을 상징한다. 또 음식으로 복수를 하기도 한다! “멕시코에서 가져온 바닐라와 아주 특별한 걸 넣었거든요.” 과연 그녀는 힐리에게 준 파이에 무엇을 넣었던가. 궁금하다면 영화 속으로.      

 

치킨 백인 상류층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셀리아. 그녀는 다른 백인 여성과 달리 늘 흑인 가정부들에게 친절하다. 어느 날,  미니는 셀리아에게 치킨 만드는 비법을 알려준다. 두 사람의 우정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난 한 번도 치킨을 태운 적이 없어”, “치킨은 꼭 크리스코로 튀겨야 해” 등 이 남부 여인들은 치킨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하다. 크리스코는 식물성 기름을 말한다. 영화에는 다양한 음식이 등장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분명히 치킨집으로 뛰어가게 된다. 영화 속 치킨은 또 등장한다. 미니가 처음으로 치킨을 태우게 되는 장면도 있다. 영화 속 비밀 이야기를 하자면, 셀리야 역을 맡은 제시카 차스테인은 실제로 채식주의자다. 그래서 영화 속 치킨은 닭이 아닌 채식주의자용 치킨이라는 사실.  





2 집으로 | 2002

영화 <집으로>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추억 상자를 다시 연다. 우리는 어렸기 때문에, 단지 너무 어려서 모든 것에서 이기적이었기 때문에 할머니의 무한한 사랑을 알 수도, 돌려줄 수도 없다. 어머니와 떨어져 버스도 잘 오지 않는 산골 외갓집에 맡겨진 상우는 모든 게 못마땅하다. 건전지도 팔지 않는 구멍 가게, 게다가 재래식  화장실은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 그렇지만 어느덧 상우와  할머니는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할머니는 다시 혼자가 되어 굽은 허리로 고갯길을  오른다. 영화는 세상 모든 할머니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다시금 보여주고, 우리 안의 회한을 뜨겁게 마주하게 이끈다.  영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 땅의 모든 외할머니께 이 영화를  바칩니다.’ 

 

닭백숙 은비녀를 훔쳐 건전지를 사려던 상우는 이번에는 치킨이 못 견디게 그립다. 말도 못하고 글도 읽지 못하는 외할머니에게  손짓발짓으로 치킨을 설명한다. 그러나 할머니가 장에서 사온 닭은 한 그릇의 닭백숙이 되어 상에 오르다. “누가 닭을 물에 빠트리랬어!” 또 한번 외할머니에게 패악을 부리는 상우. 그러나 상우는 오밤중에 혼자 일어나 정신없이 닭을 뜯는다. 잘 손질한 닭을 마늘, 양파, 찹쌀을 넣고 푹 끓인 백숙은 할머니의 사랑을 상징하고, 상우의 마음을 여는 매개체가 된다. 영화 속, 할머니가 손자에게 가장 먼저 뜯어 건네는 닭다리는 탐스럽지만, 입에 침이 고이기 전에 눈물부터 고인다.    





3 소울 키친 | 2009

지노스는 함부르크의 오래된 창고에서 레스토랑 ‘소울 키친’을 운영한다. 음식은 늘 냉동 식품을 조리해서 내놓는 게 다지만, 불만 없이 먹는 손님들이 더 기이하게 느껴진다. 레스토랑처럼 그의 삶도 엉망이다. 애인은 성공을 꿈꾸며 상하이로 떠났고, 세무서에서는 밀린 세금을 독촉하고, 위생국은 낡은 주방을 트집 잡는다. 그러다 고집불통 성격 때문에 예전 직장에서 잘린 셰프를 새롭게 고용한다. 그런데 이 셰프, 달리 천재가 아니다. 그가 주방에서 마법처럼 만들어낸 음식에 손님들이 속속 찾아와 낡은 주방은 번쩍이는 스테인리스 주방으로 바뀌기에 이른다. 냉동 식품이여 안녕. 

 

라비올리 지노스는 여자친구가 있는 상하이로 떠나려고 결심하고, 셰프는 지노스를 위해 만찬을 준비한다. 그중 가장 정성 들여 만드는 음식이 라비올리다. 이탈리아식 만두이며 파스타의 일종인 라비올리를 만드는 과정이 자세하게 등장한다. 밀가루에 달걀을 깬다. 반죽을 해 피를 만들고, 네모로 자른 피 위에 동글게 빚은 고기 소를 올린 뒤 귀퉁이를 접는다. 우리나라처럼 라비올리 역시 여러 재료가 한데 어우러지는 음식이다. 그 밖에도 정어리 요리, 양갈비 스테이크, 온갖 디저트의 향연이 펼쳐진다. 구운 가지 요리도 있다. 평범한 가지가 이토록 맛있어 보이다니.       





16 아이 엠 러브 | 2009

러시아 출신으로 밀라노의 상류층 재벌가문인 레키 가에 시집온 엠마는 아내이자 세 남매의 자상한 어머니이다. 그러나 시아버지의 생일날, 남편 탄크레디와 아들 에도아르도가 집안의 공동 후계자로 지명되며 서서히 가문에 균열이 일기 시작한다. 화려하지만 어딘가 결핍되어 있는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끼던 엠마는 아들의 친구인 요리사 안토니오를 만나면서 새로운 삶, 아니 잊고 있던 과거에  눈뜬다. 그 둘의 매개가 된 음식이 있다. 안토니오는 부엌을 찾아온 엠마에게 토치로 디저트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한다.  

 

러시안 수프 여주인공을 사로잡은 남자의 직업은 하필 요리사다. 요리는 두 사람의 새로운 언어가 된다. “언젠가 에도아르도가 러시아 수프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산레모의 둘만의 공간에서  그녀는 안토니오에게 러시아 수프를 만들어준다. 그녀는 아내와 어머니이기 전의 인생을 떠올린다. 엠마라는 이름조차 남편이 지어준 이름이었다. “원래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아”라면서 자신의 이름이 ‘키티쉬’라고  말해준다. 미술품을 수집하는 남편에게 수집된 것 같은 자신의 삶을 한 그릇의 수프로 깨닫게 된다. 러시아  수프로 가장 유명한 것은 비트가 들어가 붉은색을 띠는 보르시치지만 엠마의 러시아 수프는 생선과 야채로 끓인  우하 수프다. 한편 이 수프는 두 사람의 관계를 타인들이 눈치 채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안토니오는 밀라노의 만찬에서 엠마가 산레모에서 만들어준 러시아 수프를 준비하고, 아들은 엄마가 고향이 그리울 때 만든 수프라는 걸 인식하는 순간 모든 것을 깨닫게 된다.





17 밀리언 달러 베이비 | 2004   

한때 잘나가던 권투 트레이너 프랭키. 그는 늘 딸에게 편지를 쓰지만 답장은 오지 않는다. 아마도 젊은 시절, 가족에게 크게 잘못한 일이 있는 듯하다. 고독하게 살아가는 그의 체육관에 여자 복서 지망생 매기가 찾아온다. 31살이 된 여자가  발레리나를 꿈꾸지 않듯 복싱 선수를 꿈꾸어도 안 된다며  냉정하게 그녀를 돌려보내지만, 매기의 끈기와 열정에 감복해 그녀의 트레이너가 되기로 한다. “항상 자신을 보호하라”고 늘 매기에게 말하는 프랭키. 어느덧 매기는 최고의 자리를 다투는 복서가 된다. 두 사람은 이제 아버지와 딸 같은 관계다. 그는 매기에게 ‘나의 혈육’이라는 뜻의 아일랜드어 ‘모큐슈라’라는 별명을 지어준다.

 

레몬 파이 두 사람은 함께 어느 길거리 식당에서 레몬 파이를 먹는다. 식당은 허름하지만 레몬 파이 맛은 일품이다. “이제는 죽어서 천국에 가도 여한이 없겠어.” 두 사람은 언젠가 이 가게를 인수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두 사람의 가장 눈부신 한때다. 그러나 매기는 경기 중 사고를 당하고, 프랭키는 그녀를 위해 어려운 결정을 해야만 한다. 영화의 마지막, 그는 그 식당에서 홀로 레몬 파이를 먹고 있다.





18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 2003

영화는 마치 로맨스 영화처럼 포장되어 개봉했지만, 이 영화는 원제처럼 ‘통역이 사라진’ 곳에서의 만남과, 소통할 수 없는 사람들 그리고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의 소통을 말하고 있다. 한때 잘나가던 배우 밥은 산토리 위스키 광고 촬영을 위해 도쿄에 오지만, 모든 것이 낯설 뿐이다. 샬롯은 사진작가인 남자친구를 따라 도쿄에 왔지만 혼자 호텔에서 시간을 보낼 뿐이다. 파크하얏트 도쿄에서 머무는 동안 호텔 바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서로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함께 도쿄 거리를 거닐며 시간을 보내게 된다. 

 

샤브샤브 밥에게 화가 난 샬롯. 두 사람이 간 곳은 한 식당이다. 여전히 말은 통하지  않고, 밥은 사진을 보고 대충 주문한다. 이윽고 도착한 건 생고기와 생야채. 화해 후 밥은 말한다. “최악의 식당이었어. 손님에게 요리를 시키다니.” 샤브샤브는 늘 완성된 접시만 서브하는 서양식 식탁에서 볼 수 없는 모습이다. 가다랭이포와 다시마 등으로 국물을 우린 뒤, 그 국물에 각종 야채, 고기, 해산물을 익혀서 먹는 샤브샤브는 몽골의 징키즈칸에서 유래해 우리나라, 중국, 싱가포르, 태국에서 각각의 문화를 따라 발전되었다. 샤브샤브는 흔들어 먹는다는 뜻.    





19 그린 파파야 향기 | 1993 

베트남과 프랑스의 합작 영화로 칸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한 이 영화는 서양인의 시각에서 가장 정갈하고 아름다운 베트남을 찾는다. 베트남인으로 부유한 집의 식모로 들어온 열 살의 무이. 가장 큰 일과는 매일 음식을 만드는 것이다. 말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해내는 무이는 점점 자라 스무 살의 여인이 되고, 어린 시절부터 자신에게 장난을  일삼던 주인집 아들과 사랑을 시작한다. 이따금 비가 내리고, 풀벌레가 울고, 모기장이 필요한 그곳. 무이는 어릴 때도 그랬듯 성장해서도 정갈하게 그린 파파야를 썰며 샐러드를 만든다. 마치 그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듯이 말이다. 

 

그린 파파야 샐러드 주황색으로 익기 전 파파야는 싱그러운 오이 색깔이다. 무이는 싱싱한 그린 파파야를 가른 뒤 그 속의 씨앗을 가만히 만져본다. 속에 가득 든 씨를  털어내고 과육을 정갈하게 잘게 채 썬다. 무이의 이마에서는 물방울 같은 땀이 난다. 채 썬 그린 파파야에 코코넛 슈거와 토마토, 쥐똥고추, 콩줄기, 땅콩, 피시소스를 더해 쿵쿵 찧는다. 더운 동남아 날씨 속에서 맵고, 짠맛으로 입맛을 돋우는 샐러드가 완성된다. 특히 고기 요리와 잘 어울려 베트남은 물론 태국, 캄보디아 등 더운 나라에서 즐겨 먹는다. 현지에서나 맛볼 수 있는 음식이었지만 요즘은 우리나라 태국 식당에서도 맛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