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아줌마를 아주머니를 낮추어 부르는 말’이라고 정의한다. 현실은 좀 더 적나라해서, 한때는 친근한 표현이었던 아줌마는 억척스럽고, 부끄러움을 모르며,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상실한 존재를 가리키는 말로 추락했다. 모성을 칭송하는 우리 사회가 왜 남의 엄마인‘아줌마’에게는 가혹한지, 아줌마에 대해 생각했다.

“한국 남자들은 나이 먹으면 남 일에 참견해도 된다는 국가 자격증이라도 발급되나 보죠?” 영화 <이층의 악당>에서 2층에 세든 창인(한석규) 이 집주인 모녀의 사생활을 꼬치꼬치 묻자 연주(김혜수)는 이렇게 받아 친다. 일명 ‘꼰대질’에 대한 일침이었다. 한국의 중장년층 남성들은 가정 에서는 외로울지언정 사회적으로는 가장 막강하다. ‘꼰대질’은 기본이 요, 습관적으로 성희롱과 언어폭력을 일삼고 주사를 부리는 일부 아저씨들을 가리키는 ‘개저씨’라는 말이 등장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아저씨’ 는 여전히 로맨스 그레이가 되기도 하며, 지식인이고, 주류다. 반면 ‘아 저씨’와 짝을 이뤄야 하는 ‘아줌마’는 어떤가. 지하철에 나란히 앉아 시끄럽게 수다를 떠는 아줌마, 공공장소의 물품을 집에 챙겨가는 아줌마, TV라고는 드라마밖에 보지 않는 아줌마, 물건값을 깎는 아줌마, 똑같은 파마 머리에 꽃분홍색 등산복을 입은 아줌마, 아줌마, 아줌마들! ‘아줌마’라는 단어는 중장년층 여성에 대한 멸시를 포함한다. 누군가는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러면 아줌마를 아줌마라고 부르지 뭐라고 부르겠냐’ 고. 하지만 아줌마들 역시 현재 ‘아줌마’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함의를 충 분히 알고 있다면 어떨까? 한 일간지의 특별취재팀이 서울시내 일대에서 40~60대 여성 120명을 대상으로 한 실험의 결과는 흥미롭다. 60명에 게는 ‘아줌마’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다른 60명에게는 ‘아주머니’라고 부르며 말을 건 이 단순한 실험의 결과는 놀라웠다. ‘아줌마’라고 불린 60 명 중 18명은 불쾌해하거나 대답조차 없이 지나간 반면, ‘아주머니’라 고 불린 60명 중 그냥 스쳐 지나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더 친 근하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여성성을 잃어버린 기분이 든다’, ‘사회적 지위와 인격을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느낌’이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아줌마는 왜 아줌마가 됐나 

왜 우리는 중장년층 여성의 특정 행동에 미약한 혐오와 멸시를 보일까? 애초에 ‘아줌마’라는 단어에 덧씌워진 부정적인 이미지들이 합당하긴 한 걸까? 왜 아줌마는 아줌마가 됐을까? 한국에 살고 있는 두 외국인의 시선은 이런 질문에 제법 훌륭한 대답이 된다. 지금의 우리가 아줌마 라고 부르는 세대들은 1950년대에서 70년대에 태어난 이들이 대부분이다. “가족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 부족한 한국 사회에서 자녀를 키우고, 시부모님과 친정 부모님을 뒷바라지하고, 살림하고, 게다가 직장까지 다녀야 하는 아줌마들, 즉 한국의 어머니들은 스스로 강해질 수밖에 없었 다는 생각이 든다.” 네팔 출신으로 홍대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검비르 만 쉬레스터가 일간지의 칼럼에서 내린 답이다. 숙명여대 교수이자 연극 <엄마열전>의 극본을 쓴 월 컨 교수 역시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에서도 남녀가 완벽하게 평등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서는 정도가 심해요. 한국 여성은 자신의 재능을 낮춰 보고 스스로 비하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여성도 자신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으며, 그들이 걱정하고 말하는 것이 남성의 그것과 동등한 가치가 있음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줌마들이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너무나도 잘 안다. ‘아버지’나 ‘아저씨’처럼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쌓아오지 못한 그녀들의 가사 노동과 가정에서의 역할 수행이 가족들로 부터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상을 차려주고 빨래를 해주는 엄마에 대해 ‘고맙다’거나 ‘훌륭하다’고 가끔이라도 말해주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엄마는 강하다’고 하지만, 그 강인함이 사회적인 정으로는 이어지지 않는다. 리암 니슨이 딸의 납치범에게 ‘널 반드시 찾 아내서 죽일 것이다’라고 말하는 동안, <오로라 공주>, <돈 크라이 마미>, <세븐데이즈>, <더 파이브> 등 한국의 수많은 영화에서 아이를 위해 두 팔 을 걷고 나서는 것은 엄마들이었다. 영화 <엄마>, <친정 엄마>, <마더> 역시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한국의 모성 신화를 그린다. 하지만 우리는 나의 엄마의 씩씩함이 바깥에는 억척스러움으로, 알뜰함이 궁상맞음으로 비춰져 ‘아줌마’로 비하되는 것을 못 본 체한다. 심지어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고 두려워하고 피한다. 많은 이들에게 엄마는 자식에게 절대적으로 헌신하고, 믿어주며, 베풀어주는, 가장 편안한 대상이지 먼저 이해하고 베푸는 대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김여사’의 등장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의 아줌마도 변했다. ‘아줌마’로 분류되는 40~ 50 대 중장년층 여성 중 상당수는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갖췄고, 그들 중 일부는 첫 여성 임원, 이사, 간부가 되어 한국의 유리 천장을 깨는 데 일조 했다. ‘억척스럽고 궁상맞지 않은’, 경제력이 있는 아줌마를 비하하는 새로운 프레임이 등장했으니 바로 ‘김여사’다. 중장년층 여성 운전자를 비 하하는 이 단어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성별, 연령과 상관없이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실수를 특정 계층의 특징인 것처럼 정의한다는 것이다. 여성 운전자를 향한 ‘집에서 애나 볼 것이지’라는 폭언은 ‘차를 운전하는 여자’에 대한 불편함을 드러낸다. 독일에서 운전 면허 따기가 어렵다는 기사의 제목이 왜 ‘독일에도 김여사가 있을까?’여야 할까. 심지어 교통사고 동영상의 운전자 성별이 확인되지 않은 경우에도 무조건 ‘김여사’일 것이 라고 생각한다. 자동차 불법 좌회전으로 오토바이가 넘어진 사건이 발생하자 국내 언론 대다수가 ‘좌회전 김여사’라는 제목으로 보도한 경우도 있었다. 나중에 운전자는 남자로 밝혀졌지만, 정정 보도는 없었다. 교통안전공단의 2010년 조사결과를 보면, 한국 남성은 여성보다 평균 5 배 넘는 교통사고를 저지른다. 운전면허 소지자 100명당 교통사고 발생 건수를 봐도, 남성이 여성보다 3.3배나 높았다. 여성의 장롱면허 비율을 감안한다고 해도 여자가 더 많은 사고를 낸다고 판단하기 어렵다. 반면, 같은 해 금융감독원과 보험연구원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가정주부의 주행거리는 사무직의 절반인 데 비해 사고경험은 1.5배 높았다고 한 다. 중장년층 여성 전체에 대한 통계가 아닌 ‘가정주부’에 한해 적용되긴 하지만 가정주부가 운전 실력이 서툴다는 증거로는 참고할 만한 통계다. 그러나 이런 사고의 대부분은 마트 주차장이나 주택가에서 발생 하는 경미한 접촉사고다. 음주운전으로 인한 일가족 몰살 사고, 다중 연쇄 추돌사건처럼 심각한 교통사고와 똑같이 1회로 계산될 뿐이다. 그리고 이런 대형사고의 운전자가 남성일 경우, 언론은 날씨나 차체 결함, 운전자의 상태에서 원인을 찾지 성별을 부각하지는 않는다. ‘김여사’ 는 중장년 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가사 노동, 섬세한 작업 등 전통적으로 ‘여성의 영역’이라고 불리는 업무에서 는 능력을 발휘할지 모르지만, ‘남성의 영역’인 기계를 다루는 일이나 규 칙을 이해하는 데는 서툴 것이라는 뿌리 깊은 인식이 여성 운전자를 맘 껏 비웃을 수 있는 사고의 근간이다. 물론 중장년층 여성의 능력을 비하 하는 이런 식의 프레임은 낯설지 않다. 1970~ 80년대에 남편보다 부동 산과 재테크에 능숙했던 여성들은 ‘복부인’이라는 존중과 멸시가 뒤섞 인 호칭으로 불렸다. 지난 교육감 선거에 출마한 고승덕 후보의 높은 초 기 지지율을 두고 어떤 이들은 ‘유명한 사람이 나오면 뽑고 보는 아줌마들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조사 결과 학부모인 중장년층의 고승덕 후보 지지도는 30% 미만이었으며, 절반에 가까운 지지율을 보인 것 은 20대 청년층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아줌마를 껴안아야 하는 이유 

1930~40년대 자유연애와 여성해방을 외치던 젊은 여성을 가리키는 ‘모 던 걸’. 그러나 그녀들 역시  ‘못된 걸’이라고 비하해 부르는 사람들의 시선을 견뎌야 했다. 그리고 지금의 젊은 여성들은 온갖 ‘○○녀’가 되어 세상에 굴러다닌다. 어느 시대이건 여성들은 구분 지어지고, 능력은 폄하 된다. 이런 프레임이 바뀌지 않는 한 ‘○○녀’라고 불리는 지금의 젊은 여성들 역시 운전석에 앉는 순간, ‘김여사’로 불릴 것이다. 아줌마와 김여사가 중장년층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 전체의 문제인 이유다. 그런 여자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다만 사건이 아닌 성별이 먼저 부각되고,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카테고리화되어 함부로 취급 당하는 것에는 반발해야 한다. 막말을 한 사람, 접촉사고를 낸 사람이 건장한 남자였다면 함부로 핸드폰 카메라를 들이밀지도 못할 사람도 대상이 여자일 때는 맘 편히 카메라를 들이밀고, 맘껏 ‘○○녀’라며 인터넷 에 올려 난도질한다. 회사나 사회생활에서 남성들이 서로를 음해하거 나 권력 싸움을 하는 것을 보고 ‘남자의 적은 남자’라고 하지 않지만 여성이 업무와 일상에서 대립할 경우에는 ‘여자의 적은 여자’가 된다. 슬픈 것 은 많은 여자조차 이런 프레임에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7~8년 전 처 음으로 ‘된장녀’라는 말이 등장했을 때 아무도 이 말을 진지하게 생각하 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많은 여자들은 소위 ‘개념녀’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검열한다. 일부 젊은 여자들이 아줌마의 모습을 부정하고 싶어 하는 것도 어쩌면 비슷한 맥락일지도 모른다. 세상에 아줌마는 없다. 다 만 여자를 그렇게 부르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