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서둘러 종이 시대의 종말을 말하고 있지만, 세상의 미디어들은 잡지를 닮으려 애쓴다. 잡지는 여전히 건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잡지를 읽는다. 우리는 왜 잡지를 읽을까?



그의 ‘어디’가 그렇게 좋은가?
“창섭아, 네가 보고 싶다고 해. 알았지? <꿈나라>는 너 같은 유치원생이 보라고 나온 거야. 그러니까 네가 엄마한테 사 달라고 해.” 나는 동생을 꼬드겼다. 표지에 ‘미취학 아동을 위한 월간지’라고 쓰여 있는 <꿈나라>가 갖고 싶었다. 올컬러. 갖가지 그림들. 오려서 접거나, 색칠하거나, 선을 긋는 페이지들. 초등학교 3학년인 나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유치원에 다닐 때에는 이런 잡지가 없었어.’ 그달에 이미 <소년중앙>과 <어깨동무>를 샀고, <꿈나>는 미취학 아동을 위한 잡지니 엄마에게 사 달라고 조를 수 없던 나는 동생을 달마다 꼬드겼다. 1975년이었다. 내 방의 벽이 생각난다. 큰 달력 뒷면을 쭉 이어 벽에 붙이고, 그 위에 그달 <새소년>, <어깨동무>, <소년중앙>에서 마음에 든 페이지들을 조심스레 잘라서 붙였다. 그 위에 그림도 그리고 밑줄도 그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인가 내 방에는 달마다 바뀌는 잡지의 벽이 있었다.
2000년 <야후 스타일> 창간을 앞두고 온갖 방향을 생각할 때 안상수 선생님의 부름을 받고 연구실로 갔다. 인터넷을 다뤄야 하는 종이 잡지. 이 아이러니를 이기려면 종이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요즘 아이들이 가장 즐겨 사는 잡지가 뭔지 아느냐. 문방구에서 파는 잡지다. 스티커도 있고, 잘라서 뭘 만들 수 있는 페이지도 있다. 연구실에서 나오며 나는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인터넷이 줄 수 없는 종이의 맛.
“야, 이경진도 이렇게 나올 수 있구나”. 한길서점 아저씨는 <멋> 포스터를 펼치며 감탄했다. 아저씨가 서점 쇼윈도에 잡지 포스터를 붙이는 동안 나는 한참 <멋> 표지를 들여다보았다. 창간호 표지의 이희재도 색달랐지만 ‘예쁘다’는 말이 절로 나오기에는 두 번째 호인 9183년 11월호의 표지가 윗길이었다. 고등학생인 나는 <멋>이 동아일보사로 넘어가기 전, 1983년 10월부터 1984년 2월, 다섯 권의 책을 매달 손꼽아 기다렸다. 1984년 11월, <샘이 깊은 물> 창간호가 나오기 전까지 나는 심심했다.
엄마의 방에는 늘 <주부의 벗>, <아름다운 방> 같은 일본 잡지가 있었다. 나는 반지르르한 종이를 넘기며 이국의 집치레와 물건들에 빠져들었다. 서울 명동 중앙우체국 옆길, 엄마가 외국 잡지를 사러 갈 때면 어린 나도 같이 갔다. 고등학생이 된 나는 혼자 그곳에 가서 일본 영화 잡지를 샀다. <로드쇼>와 <스크린>에서 가타카나로 적힌 영어 인명과 작품명을 보며 가타카나를 익혔다. 나는 <월간 팝송>을 읽었고, 한국 <로드쇼>와 <스크린>을 읽었고, <키노>를 읽었다. 때로 잡지는 나에게 읽을 것이었다.
아이패드를 산 뒤 교보문고 외국잡지 코너에 매달 가는 것을 멈췄다. 환율 환산 가격의 두세 배를 주고 사야 했던, 항공편으로 날아온 미국 영국 잡지를 훨씬 싸게 구독할 수 있게 됐다. 그래도 애니 레보비츠나 브루스 웨버의 사진이 실린 <베니티 페어>나 <인터뷰>를 보면 종이 잡지로 다시 사지 않을 수 없다.
몇 해 전, 좁은 집으로 이사하게 되면서 그동안 모은 잡지를 거의 처분했다. 어떤 기간의 <디테일스>, 일본판 <에스콰이어>, <브루투스>와 <카사 브루투스>, <아웃> 등등 아끼던 잡지를, 역시 그 잡지를 아낄 만한, 잡지 만드는 일을 하는 더 젊은 친구들에게 주기도 했다. 그냥 폐지로 내놓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그래도 아직 <인터뷰>, <월페이퍼>는 책꽂이 한 칸씩을 차지하고 있고, 다시 일본 잡지들이 책꽂이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멋> 다섯 권, <샘이 깊은 물> 세 권과 함께 모아놓은 창간호 자리도 있다. 가끔 그때 누구에게 준, 집 앞 폐지함에 넣은, 이제 내 옆에 없는 잡지들도 몹시 아쉬워진다. ‘우리는, 나는 왜 잡지를 읽는가’. 나는 논리적인 대답을 내놓을 수 없다. 그저 내 삶의 한 부분이 잡지일 뿐.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 사람의 ‘어디’가 그렇게 좋은가?” 하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 조동섭(작가, 번역가)

모던보이가 손에 쥔 그것
우리에게 잡지의 역사는 근대화의 그것과 거의 일치한다. 근대화의 기수이면서 동시에 친일 행적의 대표적 인물인 최남선의 경우를 보면, 고작 10대 후반의 나이에 <소년>이라는 잡지를 창간하면서 천재성의 양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는 소년 시절 스스로 만든 잡지를 통해 시를 발표했고, 나이가 더 들어 아저씨가 된 후로는 동료들이 만든 잡지를 통해 일제에 부역하는 글을 내놓았다.
1930년대 경성의 모던보이들은 주로 <삼천리>나 <신동아> 혹은 <소년중앙>, 그것도 아니면 <조광> 같은 잡지를 읽었다. 또한 신여성들이 읽던 잡지 <양우>도 있었다. 그 무렵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하릴없이 빈둥거리던 사내들의 뒷주머니에는 둥글게 말린 잡지가 꽂혀 있었고, 양산을 들고 도도하게 걷던 젊은 여성들의 핸드백에도 반듯한 잡지가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시대 잡지는 새로운 문물을 가장 근접하게 경험하는 입구였다. 동시에 자신의 천재성을 가장 빠르게 자랑(질)할 수 있는 출구이기도 했다.
시간이 흘렀다. 모던보이와 신여성은 미니스커트와 장발족, 운동권과 위장노동자, 신세대와 오렌지족을 거쳐 힙스터와 패션피플이 되었다. 그럴수록 잡지가 가진 힘은 서서히 약해졌다. 분명히 문학잡지를 통해 시와 소설을 읽던 시대도 있었다. 주간지나 월간지를 통해서 정치 사회의 문맥을 파악하던 시절도 틀림없이 있었다. 낚시를 하는 사람은 <월간 낚시>를, 컴퓨터가 좋은 사람은 <PC통신>을, 영화광은 영화 잡지인 <키노>, <스크린>을, 내 친구는 애니메이션 잡지 <뉴타입>을, 나는 만화 잡지 <영챔프>를 매달 사서 보던 때도 있었다. 뭐 누군가는 야한 잡지를 시시때때로 구매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오늘이라는 강물에 발을 담근 우리는 세상을 대면하는 데 있어 더 이상 잡지라는 출입구를 통하지 않게 되었다. 네이버 캐스트를 열면 양질로 편집된 정보를 만날 수 있고, 다음 아고라에 가면 온갖 시사 토론과 각종 음모론을 만날 수 있다. 트위터는 잡지보다 빠르고, 페이스북은 잡지보다 따뜻하다. 이런저런 블로그에는 각 분야의 준전문가들이 만들어놓은 포스트가 무궁무진하고, 특별하거나 이상한 것들 혹은 아주 야한 것들 또한 인터넷을 잘만 뒤지면 어디선가는 찾을 수 있다. 굳이 잡지를 뒤적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제 잡지는 역사의 뒤안길로 스산하게 사라져야 할 운명이란 말인가? 운명이라는 말을 함부로 쓸 필요는 없어 보인다. 여러 열악한 정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잡지는 출간되고 있으며, 그것을 구독하는 독자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럼 도대체 당신과 나를 포함한 그 독자라는 인간들은 왜 잡지를 사고 읽는 것이란 말인가. 다시 1930년대로 간다. 당시 잡지를 읽던 이들은 시대의 첨단을 요구하던 사람들이고, 자신의 몸과 정신이 전위이길 바랐던 사람들이다. 그들을 대중이라 하기는 힘들 것이다. 지금의 독자 또한 대중목욕탕의 부창부수는 아니다. 아직 남아 있는 독자는 잡지를 통해 다른 세계에 진입하고자 한다. 자신이 잘 아는 세계의 안쪽 다락문을 잡지를 통해 열고, 자신이 잘 모르는 세계의 현관문을 잡지를 부여잡고 노크 한다. 잡지는 여전히 세상과 세계를 여는 게이트웨이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거리를 더욱 폼 나고 멋지게 걷기 위해 잡지를 읽는다. 남들과 같게 걷자면 DMB로 일일드라마를 보는 게 낫지 않겠는가. 이러한 고급 독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잡지는 시나브로 늘어난 자신의 라이벌들에게 적절하게 대항해야 한다. 지면의 처음부터 끝까지 정확한 정체성과 매력적인 색깔을 갖고 편집에 임해야 한다. 때로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매체의 전통과 안정성을 지켜야 한다. 잡지가 세계를 보여주는 문이 되기 위해서는 시원한 창과 단단한 틀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문의 고리를 돌리기 위해, 오늘도 잡지를 읽는다. – 서효인(시인)

잡지라는 타임캡슐
정확히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친 그해 겨울 방학을 기점으로 두발 자유화가 시작되었다. 자유화라고는 하지만 고작 단발머리, 커트머리, 땋은머리 이 세 가지 선택뿐이었지만 우린 그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환호했다. 방학식 다음 날이면 동네 미용실은 핀컬 파마와 커트를 하려는 패키지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루었고, 좀 논다 하는 친구들은 과감히 화장까지 하고 싸돌아 다녔다. 내내 교복 안에 갇혀 있던 자유로움에 대한 열망이 헤어 스타일의 변화를 시작으로 첫 단추가 풀린 걸까? 확실한 것은 그때가 ‘멋’이라는 걸 본격적으로 내기 시작했고, ‘개성’이라는 것이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수용의 폭도 하루가 다르게 넓어져갔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그 당시 전문서점에서만 유통되던 <스크린>, <로드쇼>, <논노>, <앙앙>, <뮤직라이프> 등의 외국 잡지들이 있었다. 꽤 긴 시간 자유로운 사고와 표현이 억눌려온 시대적 배경 탓인지 갑작스럽게 풀려난 포로처럼 엉거주춤 자리를 못 잡았던 시대. 온통 경직된 우리의 긴장을 풀어주고 문화 전반의 실질적인 정보와 방향을 제시한 것은 두꺼운 전문서적도 매일 아침 배달되는 신문도 아닌 여러 명이 돌려보던 바다 건너온 잡지들이다. 초반에는 무조건 추종하고 보는 부작용도 없진 않았으나, 점차 우리들의 문화로 정착되어갔다. 1980년대 초반의 일이다.
해외의 유명 벼룩시장에 가면 옛날 신문이나 잡지를 내다 파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처음에는 “뭘 저런 것까지 들고 나오나?” 했는데 언젠가 같이 간 친구가 자신이 태어난 1975년에 발행된 잡지 한 권을 재미 삼아 산 적이 있었다. 둘이 카페에 앉아 킥킥거리며 한 장 두 장 넘겨보니, 보통 재미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보다 더 훌륭한 타임머신이 있을까 싶게 낡은 잡지 안에는 그 시절의 삶의 모습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베트남 전쟁, 마릴린 먼로, 알랭 들롱, 지방시, 판탈롱, 데이비드 보위. 빅 프레임 선글라스, 위대한 개츠비, 웨지힐, 새로 나온 음료수, 연극 정보…. 그 시대의 관심사가 한 권의 잡지에 가득 실려 자연스럽게 1975년이라는 낯선 과거를 친근하고 생생하게 추억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카페에서 1975년을 봤다. 잡지를 말할 때는, ‘잡지를 읽는다’고 하는 대신 ‘잡지를 본다’고 한다. 단순히 책이나 신문에 비해 비주얼이 많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잡지를 대하는 독자의 의중 자체가 그다지 진지하거나 무겁지 않은 것도 이유인 듯하다. 잡지를 통해 대단한 지식과 깨달음을 얻게 된다든가, 어떤 문제의 결정적 단서를 제공받는 일은 많지 않다. 그보다는 생활 속의 다양한 주제에 관해 지식보다는 지혜로, 강요보다는 추천으로, 주장보다는 공감을 이끌어내는 재미있고 재주 많은 오랜 친구 같아서 언제부턴가 격의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현재의 가장 뜨거운 이슈들만 모아놓은 잡지를 통해 관심 분야를 다룬 페이지에 오래 머물기도 하고, 또 ‘타인의 취향’에는 그냥 지나치기도 하면서 아이스크림처럼 골라 먹는 재미를 누릴 수 있기도 하니 각종 책임과 의무에 억눌리듯 살아가는 독자에게는 잡지를 보는 시간만큼은 정말 청량감 넘치는 가벼움 아닐까?
요즘 대대적으로 집 인테리어를 바꾸는 중인 패션 스타일리스트는 몇백 권이나 되는 패션 잡지를 껴안고 고심 중이다. 오래 사용해온 집안 살림은 가차 없이 처분하면서, 유독 오래된 잡지만큼은 선뜻 버릴 마음이 안 선다는 것이다. 20여 년 그녀의 스타일리스트 인생에 가장 큰 조력자이며 친구였고, 동반자였을 테니 나라도 이별이 쉽진 않을 것 같다. 단단히 정리하자로 마음먹다가도 옛날 잡지를 한두 장만 넘기면 추억이 방울방울 올라와 정리는커녕 원래 목적은 새까맣게 잊고 어느새 방바닥에 엎드려 보다 보면 한두 시간이 후딱 지나가버린단다.
잡지는 그런 것이다.
오징어 땅콩처럼 친근하다고 가볍게 여길 것이 아니다. 늘 곁에 한두 권씩은 있어 친숙한 대상인 잡지, 그 잡지가 우리가 사는 세상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아주 소중한 임무를 맡고 있는 것이다. – 허미하(홍보대행사 나비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