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에 많은 영감을 주는 영화, 그중에서도 여행에 관련된 것만 모았다. 여행지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다양한 홀리데이 룩을 볼 수 있는 스타일리시한 여행 영화.

태양은 알고 있다 | 1969
알랭 들롱, 로미 슈나이더, 제인 버킨, 모리스 로네. 프랑스 영화계에서 가장 스타일리시하기로 손꼽히는 배우들이 모인 영화다. 생트로페 인근의 수영장이 딸린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던 네 남녀가 치정과 살인, 애증으로 얽히는 이야기인데, 아무도 없는 수영장의 고요한 표면처럼 겉으로는 평온한 일상을 보내지만 은밀한 감정이 끊임없이 오간다. 이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칙칙하지 않게 만드는 건 배우들의 멋진 스타일. 사이키델릭 프린트 드레스와 선명한 파란색 셔츠 등 로미 슈나이더의 글래머러스하고 화려한 의상과 크로셰 니트 수영복, 깨끗한 티셔츠 같은 제인 버킨의 화이트 일색인 서머 룩은 웬만한 요즘 영화 속 의상보다 세련돼 보인다. 그리고 원제목인 <La Piscine(수영장)>에 걸맞게 네 남녀가 수영장에서 보여주는 다양한 스윔웨어 또한 올여름 휴가를 위한 쇼핑에 많은 영감을 준다.

올모스트 페이머스 | 2000
록스타들의 전성기였던 1970년대, ‘스틸워터’라는 록 밴드를 둘러싼 그루피들과 주변의 어설픈 와일드차일드들, 그리고 그들의 투어를 따라다니며 밀착 취재하는 <롤링 스톤즈>지의 어린 리포터에게 가장 중요한 건 지금 당장 유명 밴드의 백스테이지에 들어가는 일이나, 제목처럼 ‘거의 유명한’ 스틸 워터가 대박을 터뜨려서 정말로 유명해지는 것이다. 있는 척, 자유로운 척 허세를 부리는 록스타의 특성상 그들은 자신들만의 의상 코드와 ‘쿨’한 애티튜드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그 중심에는 페니 역의 어린 케이트 허드슨이 있다. 크롭트 톱에 털이 잔뜩 뭉친 시어링 코트를 매치하거나, 에스닉한 튜닉 블라우스에 스웨이드 미니스커트를 입고, 브래지어는 절대 하지 않는 뼛속 깊이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그녀는 한여름 페스티벌 룩의 본질을 보여준다.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 1959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는 늘 스타일리시하다.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역시 서스펜스와 스타일을 잘 섞은 그의 수작 중 하나인데, 주인공 로저 손힐로 분한 캐리 그랜트의 흠잡을 데 없는 회색 슈트 덕에 옷 좀 입는다는 남자들 사이에서 필수 감상 영화로 손꼽힌다. 평범한 남자가 간첩으로 오인받으며 쫓기는 신세가 되어 미국 중심부를 횡단하는데, 총알을 난사하는 비행기로부터 도망치는 장면이나 러시모어 산의 거대 대통령상에 매달리는 장면만 보면 딱 남자들을 위한 액션 영화 같다. 하지만 여주인공 에바 마리 세인트가 등장하는 순간, 영화는 섹시해진다. 자로 잰 듯 날카로운 테일러링과 우아한 실루엣을 자랑하는 그녀의 다양한 의상이야말로 이 영화의 ‘스타일’을 책임지는 핵심 요소다.

리플리 | 1999
이탈리아 남부의 해안가 마을에서 휴양하듯 생활하는 재벌 2세 딕키와 그의 고상하고 예쁜 약혼녀 마지는 재즈를 즐겨 듣고, 날씨가 좋을 때는 요트를 타러 가거나 로마에서 쇼핑을 하는 등 세련된 라이프스타일을 누리고 있었다. 한편 그들의 삶을 동경한 리플리는 창백했던 피부를 태우고, 재즈를 좋아하는 척하며 그들과 가까워지지만, 입고 있던 재킷의 재단이 얼마나 촌스러운지 알아채지 못해 딕키의 세계에 완벽히 흡수되지는 못한다. 사실 리플리는 클래식 음악에 조예가 깊고, 고전 문화를 사랑하지만 딕키를 만난 후부터 그 취향은 숨겨야 할 것이 되었다. 영화에서 스타일은 열등감을 나타내는 바로미터다. 딕키와 마지가 입고 먹고 즐기는 모든 것이 지극히 아름다운 반면, 리플리가 몰래 딕키의 옷을 입어보다 들키는 장면은 타인의 멋을 향한 헛된 욕망이 사람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지 보여준다.

일 포스티노 | 1994
이탈리아의 섬마을 우체부 마리오와 망명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이야기는 스타일과 동떨어져 보이지만 마리오가 동네에서 제일 예쁜 아가씨 베아트리체를 만나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진다. 돌체앤가바나의 광고 이미지에서 막 걸어 나온 듯한 그녀는 육감적인 몸매에 도발적인 눈빛을 가진 전형적인 이탈리아 미녀인데, 속옷이 슬쩍슬쩍 보이는 깊은 데콜테의 프린트 원피스와 몸에 착 감기는 카디건으로 여성미를 한껏 드러낸다. 마리오가 베아트리체의 마음을 얻기 위해 시를 배우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되니, 그녀의 존재감에 대해서는 굳이 말이 필요 없다. 풍류를 아는 시인 네루다와 그의 아내 또한 시종일관 근사한 리조트 룩을 선보인다.

어게인스트 | 1984
나이트클럽 사장인 제이크는 사라진 여자친구 제시를 찾기 위해 은퇴한 미식축구선수 테리를 고용하는데, 정작 제시를 찾아낸 테리는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도 그럴 것이, 경쾌한 짧은 머리에 길고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는 제시는 스타일마저 좋았던 것이다. 멕시코의 작은 섬, 코주멜(Cozumel)로 꽁꽁 숨어버린 그녀는 면 소재의 튜닉을 자유자재로 다양한 룩에 응용하고, 커다란 밀짚 모자나 어깨를 드러내는 프릴 블라우스를 무리 없이 소화하는 등 현지의 드레스 코드를 적극 반영한 세련된 옷차림을 선보인다. 또 두 사람의 가장 행복한 순간과 냉정한 이별의 순간을 함께한 붉은색 수영복과 시내의 퍼레이드를 보는 장면에서 입고 나오는 화이트 수영복은 심플한 원피스 수영복이 얼마나 강력한 서머 아이템인지 새삼 깨닫게 한다.

언제나 둘이서 | 1967
여행을 통해 일종의 ‘커플 테라피’를 하는 부부의 이야기다. 10년 차 부부인 마크와 조안나는 프랑스 남부로 로드 트립을 떠나는데 그 과정에서 지난 10년간 두 사람이 함께했던 여행을 회상한다. 그 과정에서 여행지마다 조금 다른 풍경, 유행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는 그들의 스타일을 보는 것이 이 영화의 쏠쏠한 매력. 커플 룩의 다양한 예를 볼 수 있고, 또 조안나 역의 오드리 헵번이 선보이는 심플하고 편안한 여행 룩은 당장 이번 휴가철에 응용해도 될 만큼 여전히 세련돼 보인다.

리오의 연정 | 1984
원제는 <Blame i t on Rio>로 제목부터 심상찮다. 리오를 탓하라니. 중년의 남자가 죽마고우와 함께 여행하다 친구의 어린 딸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다는 줄거리치고 아주 뻔뻔하다. 하지만 영화의 배경이 된 리우데자네이루는 젊음의 에너지로 뜨겁고, 주인공 마이클 케인을 유혹하는 어린 미셸 존슨은 너무나 매력적이다. 형광색 비키니, 허리 부분을 동그랗게 말아 묶은 탱크톱과 짧디짧은 쇼츠를 입은 그녀는 건강하고 섹시한 전형적인 1980년대 미녀였다. 구릿빛 피부의 젊은이들이 반라로 코파카바나 해변을 거니는 모습을 본다면 저절로 뜨거운 만남을 꿈꾸게 될지도 모를 일. 그러고는 말하게 될 거다. 이게 다 섹시한 도시, 리오 때문이라고.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 | 1968
역사상 가장 스타일리시한 남자, ‘The King of Cool’ 이라 불리던 스티브 매퀸의 대표작이다. 소형 비행기 조종도 할 줄 알며, 사륜구동 사막 바이크를 즐겨 타는 백만장자 토마스 크라운이 그저 ‘심심해서’ 벌인 은행절도는 미모의 보험수사관 빅키가 개입되면서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게 된다. 크라운을 의심한 빅키가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 주변을 맴돌며 심리전을 펼치다 되레 서로에게 매혹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남자를 잡자니 마음이 아프고, 풀어주자니 적과의 게임에서 지는 것 같아 딜레마에 빠지는 이 매력적인 여자는 당대 최고의 여배우 페이 더너웨이가 맡아 열연했다. 물론, 넓은 챙모자를 쓴 미니 드레스 룩이나 화이트 팬츠에 캐멀색 터틀넥 스웨터를 입은 드라이빙 룩 등 패션 화보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근사한 옷을 입고서 말이다.

4월의 유혹 | 1991
그림처럼 아름다운 미장센을 자랑하는 이 영화는 1920년대를 배경으로 서로를 잘 알지 못하는 네 명의 영국 여자가 이탈리아의 한적한 시골 저택에서 4월 한 달간 함께 지내는 과정을 그렸다. 지긋지긋한 비, 말이 안 통하는 남편으로부터 도망쳐온 그녀들은 마치 천국에라도 온 듯 여유를 찾고 자신을 돌아보며 역시나 삶의 새로운 희망을 찾는다. 하지만 뻔하지 않은 건 그녀들의 의상이다. 꽃무늬를 수놓은 실크 가운이라든가, 편안한 서머 드레스에 선글라스와 챙 넓은 모자 같은 액세서리를 적재적소에 매치했는데, 낮아진 허리선, 코르셋 없이 일자로 떨어지는 1920년대 실루엣이 의외로 아주 근사한 휴양지 룩을 만든다는 것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