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트를 파마의 전 단계로만 생각하는 건 아닌지? 잘 자른 커트는 당신의 두상과 머릿결을 예뻐 보이게 하는 마법을 부린다. 자칫 소홀하기 쉬운 커트 다시 보기.

몇 달 전, 지금의 청담동 미용실 문화를 만든 ‘원장님’들이 모인 자리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는 흥미진진했다. “커트만 잘해도 볼륨이 사는 머리가 있어. 굳이 파마를 하지 않아도 되는데, 헤어 디자이너가 해야 한다고 하니까 하는 사람들이 많지”, “대형 미용실이 많아지면서 커트의 기술이 점점 하향 평준화되는 것 같아. 커트는 오랜 수련이 필요한 반면, 염색과 파마는 조금만 가르쳐도 현장에 바로 투입할 수 있어 대충 가르친다잖아”, “그러니까 유명 숍에서 오래 근무했다고 커트를 잘하는 건 아닌 거지.” 이 대화를 듣던 중 그동안 겪은 시행착오가 떠올랐다. 헤어 디자이너와 상담을 하기도 전에 어시스턴트가 머리를 감기고, 파마를 말고 푼 후에 헤어 디자이너의 몇 번의 가위질로 커트를 끝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비싼 파마였지만 마음에 들 리 없었다. 게다가 시스루 뱅으로 자른 앞머리를 다듬기 위해 찾은 미용실에서 시스루 뱅의 흔적을 지워버려 얼굴을 붉혔던 기억까지!
커트가 중요해진 시점은 1960년대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늘면서 쉽고 빠르게 손질 가능한 헤어 스타일을 원했고, 그때 비달 사순이 개발한 파이브 포인트 커트, 즉 ‘보브 커트’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비달 사순은 커트를 ‘가위를 사용하는 예술’이라고 말했고, 커트 기술만으로 얼마나 아름답고 손질하기 쉬운 헤어 스타일이 탄생하는지 보여주었다. 런던에 비달 사순이 있었다면 한국에는 그레이스 리가 있었다. 1960년대 비달 사순과 함께 미국 톱 헤어 디자이너로 뽑힌 폴 미첼의 제자로 일을 시작해 미국 <보그&gt가 뽑은 ‘세계 20대 헤어 드레서’에 이름을 올린 그녀는 오직 커트만 한 스페셜리스트였다. 1971년 한국으로 돌아와 활동할 당시 커트 값에 디자인 값을 포함해 받는다고 반발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레이스 리의 섹션 분할 커트는 차츰 입소문을 탔고, 마침내 전국적인 열풍을 일으켰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기 3년 전, 그녀의 마지막 커트 가격은 무려 30만원이었다. 생전의 인터뷰에서 그레이스 리는 말했다. “스승인 폴 미첼은 커트할 때 얼굴형과 크기, 두상의 생김새, 머리숱, 머리카락이 난 방향 등 수많은 조건을 고려해야 한다고 가르쳤어요. 커트를 잘하려면 많이 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어요.”
베테랑 헤어 아티스트들은 하나같이 커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특히, 지금처럼 머리를 감은 후 타월로 물기를 툭툭 털어 말린 듯 자연스러운 헤어 스타일이 인기일 때는 커트 기술이 더욱 중요하다. 패션 피플 사이에서 커트의 고수로 불리는 제트 살롱의 제트 윤 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요즘 우리나라 여자들은 프랑스 여자들처럼 부스스한 헤어 스타일을 좋아하는데, 이 헤어 스타일은 무척 신경 써서 잘라야 해요.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고, 가르마를 바꾸어도 커트의 끝선이 균일하게 맞아야 하기 때문이죠.” 그레이스 리를 사사한 이희 헤어앤메이크업의 이희 원장은 “부스스한 헤어 스타일은 볼륨이 매우 중요해요. 하지만 동양인의 뒤통수와 정수리는 납작하고, 관자놀이는 꺼져 있죠. 커트 디자인으로 이 결점을 감춰야 해요”라고 조언한다.
그렇다면, 잘 자른 커트는 어떤 것일까? 커트의 고수들은 빗이 달린 틴닝가위나 헤어 칼이 아닌 가위로 머리카락을 조각하듯 입체적으로 자른다. 두상의 모양, 헤어 컬러, 모발이 자라는 속도, 모발의 방향, 모발의 분포 정도, 머리를 감는 시간, 키와 메이크업 스타일 등을 고려해 자르는데, 1시간은 족히 소요된다. 프리랜스 헤어 스타일리스트 권영은은 이렇게 공들여 자른 머리는 몇 달이 지나도 지저분해지지 않고, 손질이 쉽다고 말한다. 모노 헤어의 윤상미 원장은 파마가 마음에 들지 않게 나왔다면, 머리카락의 끝선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웨이브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프리랜스 헤어 아티스트 김귀애의 에피소드가 흥미롭다. “선미와 화보 작업을 했는데, 그녀의 짧은 보브 커트는 만져보니 그렇게 정교할 수가 없더군요. 아이돌 가수의 경우, 대부분 무대에서 춤을 추기 때문에 움직임이 많아 커트에 더욱 공을 들인다고 해요.” 선미의 헤어를 담당한 이가자 헤어비스의 피트 강은 “춤을 출 때마다 헤어 라인이 리듬을 타도록 잘랐어요. 짧은 보브 커트를 한 후 부분부분 층을 낸 거죠”라고 말한다. 1시간 동안 자른 이 커트는 과격한 춤을 춰도 끝선이 자연스럽다.
그레이스 리는 커트와 파마, 염색, 스타일링 등 분야별로 전문화, 분업화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최근 이경민 포레의 재선 원장은 이런 말을 했다. “이제 파마와 커트, 염색을 각각의 전문가에게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잘 자른 커트의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반가운 얘기다. 하지만 여전히 파마와 염색에는 수십만원을 투자하면서 커트 가격에는 인색한 여자들이 많다. 커트는 메이크업에 비유하면 베이스 메이크업과 같다. 어떻게 잘랐느냐에 따라 그 뒤의 스타일링이 전혀 달라지니까. 게다가 커트만 잘하면 파마를 자주 하지 않아도 되니 덤으로 머릿결까지 보호할 수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다소 비싸도 커트에 투자하는 것이 더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이 아닐까? 물론, 비싼 커트가 잘 자른 커트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만큼 커트의 중요성을 알고 투자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커트의 고수들
제트 살롱의 제트 윤 제트 살롱 원장으로 커트만 하는 스페셜리스트다. 미국 비달 사순 아카데미에서 헤어 디자이너를 교육한 경험을 살려 국내에서도 헤어 디자이너의 1 : 1 교육을 진행한다. 커트 17만원.
모노 헤어의 윤상미 윤상미 원장은 커트를 오트 쿠튀르라고 말한다. 사람마다의 모발과 얼굴형이 모두 달라 그에 맞는 디자인을 해야 되기 때문이다. 처음 가는 사람은 머릿결을 길들이기 위한 헤드 스파(12만원)는 필수 코스다. 커트 13만원.
이희 헤어앤메이크업의 이희 이영애와 공효진, 임수정 등의 스타를 거느린 헤어 디자이너. 그레이스 리의 제자답게 단발 커트와 섀기 커트에 강하다. 커트 12만1천원.
스타일 플로어의 임진옥 배두나의 바가지 머리를 완성한 헤어 아티스트. 커트의 끝선을 무겁게 잘라 차분하게 정돈되는 헤어 스타일을 잘한다. 커트 10만원.
보이드 바이 박철의 콴 오직 가위만으로 조각을 하듯 머리카락을 잘라 입체적인 헤어 스타일을 완성한다. 두상이 예뻐 보이는 커트로 유명하다. 커트 6만6천원.
아우라의 임철우 신민아가 오랜 단골로 유명하며, 공들여 잘랐다는 느낌보다는 툭툭 잘라낸 느낌의 멋스러운 커트 선이 특징이다. 13만2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