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진 건 정우가 아니라 정우를 둘러싼 것들이다. 정우는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여유롭게 잡아냈고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냈다. 그건 당연한 결과였다. 이름 없는 배우로 살아가는 동안에도, 그는 단 한 번도 뜨겁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까.

시계는 스와치 레블론(Swatch Leblon). 스웨터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시계는 스와치 레블론(Swatch Leblon). 스웨터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쓰레기 오빠’를 이 겨울에, 발리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그러게요. 요즘 재미있는 경험을 많이 하고 있어요. <응답하라 1994> 끝나고 해외를 많이 다녔는데 거의 다 처음이었어요. 스태프들과 간 사이판도, 광고 촬영차 들른 샌프란시스코도, 여기 발리도요.

정말 바쁘죠? 샌프란시스코 다녀오자마자 발리로 왔잖아요.
행복한 일이에요. 지금 이 순간도 그렇고요. 휴가처럼 떠나온 이곳에서 화보 촬영하고 인터뷰하는 지금이 꿈 같아요. 이런 장면은 상상해본 적도 없어요.

발리로 출국하던 날, 당신의 공항 패션 기사가 얼마나 많이 올라오던지요.
네. 저도 봤어요. 공항 갈 때마다 새벽같이 와서 기다리고 촬영하는 분들이 고마워서 말이라도 한마디 더 하게 돼요.

코트와 스웨터, 스카프는 모두 에르메네질도 제냐(Ermenegildo Zegna). 팬츠는 닐 바렛(Neil Barret t). 슈즈는 구찌(Gucci).

코트와 스웨터, 스카프는 모두 에르메네질도 제냐(Ermenegildo Zegna). 팬츠는 닐 바렛(Neil Barret t). 슈즈는 구찌(Gucci).

이곳에 오는 동안에도 수 많은 사람이 당신에게 사진과 사인 요청을 했어요.
알아봐주고 관심 가져주는 자체가 감사한 일이에요. 그래서 최대한 해드리려고 하는데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는 솔직하게 말해요. 대신 악수를 건넬 때도 있고요. 어떻게 보면 그들에게는 저와의 만남이 추억일 수 있잖아요. 누구에게도 상처 주고 싶지 않아요.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어때요?
연기를 막 시작해서 촬영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 그렇게 좋았어요. 차 안에서 혼자 쇼를 해요. 어떻게 연기했는지 생각하고, 생각한 대로 잘한 날에는 울기도 하고요.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닌데, 자꾸 제 고집만 피운 때도 있었어요. 그것 때문에 소속사도 답답해했고, 가족들도 힘들었을 텐데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셨죠. 집안 형편은 기울어가는데, 이것저것 생각할 때가 아닌데 그랬던 거예요. 힘들고 외로운 때도 많았죠.

연기를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나요?
시작은 부모님께서 마련해주셨어요. 어릴 때부터 제가 남들 앞에 나서서 뭔가를 하는 걸 보시면서 제게 이 길이 맞을 거라 생각하셨나 봐요. 진로를 결정해야 할 나이가 되었을 때 어머니와 대화를 많이 나눴어요. 어머니 손에 이끌려서 서울에 왔고, 서울예대에서 연기를 전공하며 자연스럽게 이 길로 들어섰죠.

셔츠와 팬츠는 김서룡 옴므(Kimseoryong Homme). 가방은 밴드 오브 플레이어스(Band of Players).

셔츠와 팬츠는 김서룡 옴므(Kimseoryong Homme). 가방은 밴드 오브 플레이어스(Band of Players).

오랜 시간 무명 생활을 하며 제자리걸음이라 생각될 때 포기하고 싶은 적은 없었나요?
어릴 때는 연기하는 자체가 그저 좋았어요. 20대 후반부터는 악역만 계속 들어오니까 좀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하나의 이미지로 굳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죠. 설레지도, 즐기지도 못하고 툭 치면 기계처럼 나오 듯 연기하게 될까 봐 불안했어요. 그 때문에 연기를 그만두고 싶었다고 기사가 나기도 했는데, 사실 그건 아니에요. 힘들긴 했지만 단 한 번도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이거 하나만큼은 어떻게든 해내겠다는 의지가 있었죠.

데뷔 14년 차인데 작년 한 해가 유독 힘들었던 이유는 뭔가요?
지금 당장 유명해지고 싶은 게 아니라 내실을 다지고 싶었어요. 즐겨야 하는데 즐기면서 할 여유가 없었던 거예요. 여유가 생기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하고, 생각을 다잡아야 하고, 다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하는데 그 모든 것이 어려웠어요. 대중이 좋아해도 제가 원하는 연기가, 작품이 나오지 않으면 기쁘지 않고 오히려 불안했죠. 그건 제 것이 아니니까요.

시간이 갈수록 고민이 더 많아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아요.
20대 때는 긴장도 많이 하고 사람들 눈치 보느라 정신없었어요. 나이가 들면서 뜻대로 연기가 되면 감정이 복받치고 그렇게 되지 않을 때는 잠을 못 잘 정도로 예민해졌어요. 촬영 전날 잠을 못 자는 건 당연하고요. 스스로를 힘들게 한 거죠. 못하면 다음에 잘하면 되는데 지금 왜 잘하지 못할까에 대해서만 자책하니 힘든 거예요. 이제는 여유가 좀 생겼고, 그렇게 스스로를 힘들게 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어요.

슈트는 엔트로페(Entrofe). 슈즈는 구찌.

슈트는 엔트로페(Entrofe). 슈즈는 구찌.

<응답하라 1994>로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지만 사실, 당신에게 있어 영화 <바람>을 뻬놓을 수는 없죠.
스스로 변화한 시점이 <바람>이에요. 제가 제 이야기를 각본으로 썼고, 많은 사람이 보지는 않았지만 영화를 본 사람들은 좋아해주셨어요. 생각한 것과 가장 비슷하게 나온 작품이기도 하고요. <바람> 이후로 제 선택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어요.

얼마 전 <바람>을 재상영하는 극장을 찾았죠? 눈물 흘리는 모습이 기사화되기도 했어요.
팬들이 재상영을 요청했고, 그게 받아들여져 딱 한 번 재상영이 이뤄졌어요. 그 소식을 듣고 꼭 현장에 가고 싶었어요. 일하다가 잠깐 들러서 팬들에게 인사를 하는데 울컥하더라고요. 취재진 없이 팬으로 가득 찬 공간에 서니 무장해제가 되더라고요.

아무래도 <응답하라 1994> 이후에 작품 선택에 대한 부담이 더 커졌겠죠?
사실, 그렇지는 않아요. 이미지 변신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고 늘 그랬던 것처럼 시나리오를 보고, 감독님을 보고, 함께 할 배우들을 보겠죠. 제가 하고 싶은 작품을 하고 역할의 크기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할 거예요. 엄청난 포부나 목표 없이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요.

니트와 팬츠, 슈즈는 모두 살바토레 페라가모(Salvatore Ferragamo). 가방은 밴드 오브 플레이어스.

니트와 팬츠, 슈즈는 모두 살바토레 페라가모(Salvatore Ferragamo). 가방은 밴드 오브 플레이어스.

작품 안에서 보여지는 캐릭터 때문인지, 사람들이 당신을 오해하기도 하죠? 저 역시도 그랬고요.
쓰레기는 상한 우유도 먹잖아요. 저는 자극적이지 않고 건강한 음식, 맛있는 음식을 먹는 걸 좋아해요. 먹고 입고 자는 것 중에 먹는 게 가장 중요하거든요. 그리고 술을 잘할 거라 생각하는데 소주는 못 마시고 맥주는 500cc 두 잔 정도예요. 집에서 빈둥거리는 걸 좋아하지만, 빈둥거릴 때도 깨끗하게 몸을 씻는 편이고요. 하하.

데뷔 이후, 팬들에게도 기자들에게도 90도 인사를 고집하고 있어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요?
팬들을 향한 감사의 마음도 있지만 동시에 제 자신을 컨트롤하기 위해서예요. 늘 겸손하자고 자기 최면을 걸어요. 그렇게 해야 제가 편해요.

시간이 갈수록 더 커지는 가치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일이에요. 사랑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게 첫 번째인 것 같아요. 그래야 저도 행복하고요. 만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데 그게 쉽지는 않아요. 하지만 열 명 중에 반 이상은 만족시키고 싶어요. 더 노력해야죠.

셔츠는 프라다(Prada). 팬츠는 시에로(Siero). 슈즈는 살바토레 페라가모. 선글라스는 그리피(Grriffi).

셔츠는 프라다(Prada). 팬츠는 시에로(Siero). 슈즈는 살바토레 페라가모. 선글라스는 그리피(Grriffi).

배우로서, 서른넷의 남자로서 앞으로의 시간을 그려보기도 하나요?
어릴 때는 ‘30대는 뭘 하고 있을까? 40대는 어떤 모습일까?’ 하고 상상했는데 이제는 아니에요. 그냥 물 흐르듯이 가고 싶어요. 지금 해야 할 것들을 생각하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오랜 시간 무명으로 활동하는 배우들에게 당신은 큰 용기가 될 것 같아요.
빛을 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무척 많아요. 이 길이 정말 자신의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좀 더 힘 내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 시기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기회는 언젠가 한 번은 오거든요.

당신의 성공을 자기 일처럼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어요.
연기 스터디를 같이하는 동생들이 있어요. 지금 당장 연기할 곳이 없는 사람들이 그 욕구를 풀어내는 모임이죠. 요즘은 바빠서 못 나갔지만 <응답하라 1994> 촬영 전까지 계속 나갔어요. 연기한 걸 캠코더로 찍어서 보기도 하고 누군가는 감독 역할을 하기도 해요. 그 모임의 동생들이 제가 힘이 된다고 이야기해요. 사실 그 모임에서 제일 많이 배우는 건 저예요. 앞으로 밥을 좀 더 열심히 사려고요. 하하.

코트와 셔츠, 베스트는 모두 버버리 프로섬(Burberry Prorsum). 팬츠는 자라 맨(Zara Man).

코트와 셔츠, 베스트는 모두 버버리 프로섬(Burberry Prorsum). 팬츠는 자라 맨(Zara Man).

역시 지금 이 시간을 가장 기뻐하는 분은 어머니겠죠?
어머니는 어지간한 일에 동요하지 않아요. 덤덤하신 편인데 그런데도 제가 잘되어서 좋다고 눈물을 흘리시더라고요. 얼마 전, 짧게 부산에 다녀왔어요. 함께 백화점에 가서 옷을 하나 사드렸는데 정말 좋아하셨어요. 뭘 못해드려도 늘 괜찮다 하시니까 진짜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예요. 그걸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진짜 바보였던 거죠.

연기 외에 가장 마음을 쓰고 있는 건 어떤 건가요?
어머니가 서점을 30년 가까이 하셨어요. 그 동네가 철거되면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잘 안 되어서 문을 닫았어요. 형이 업종을 바꿔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될 것 같아요. 어떤 걸 하면 좋을지, 요즘은 그 생각을 많이 해요. 배우로서의 인생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역시 가족이에요.

지난해, 부산 집에 현수막이 걸렸다죠?
KBS에서 신인상을 받았다고 현수막이 걸렸더라고요. 예전에 <바람>으로 대종상 신인상 받았을 때도 걸린 적이 있어요. 쑥스럽고 민망하지만 어머니가 좋아하시니 괜찮아요.

매일, 어떤 다짐을 하나요?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아야죠. 지금 제게 주시는 사랑을 좋은 연기로 보답하고 싶어요. 작품이 어떻게 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제 마음가짐이, 최선을 다할 수 있느냐가 중요해요. 항상 최선을 다하려 하지만 그게 잘 안 될 때도 있거든요. 그래서 쉬지 않고 마음을 다잡으려고요.

오늘 촬영을 하면서, 인터뷰를 하면서 당신이 얼마나 많이 ‘감사하다’고 말했는지 모를 거예요.
이 먼 나라까지 저를 위해 모인 사람들이잖아요. 제가 힘을 드리는 건 당연하죠. 그리고 워낙 장난치는 걸 좋아해요. 소속사 분들이 말도 좀 세련되게 하고, 사진 찍을 때 브이도 하지 말라는데, 그게 잘 안 되요. 폼 잡고 있으면 몸이 아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