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 처음으로 홈쇼핑 채널을 켜니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파운데이션부터 반신욕기까지 새로운 뷰티 용품들로 넘치는 ‘홈쇼핑 뷰티’를 처음으로 목격한 피처 에디터의 보고서.

적어도 홈쇼핑 채널은 내가 완전한 순결무구함을 주장할 수 있는 분야였다. 그도 그럴 것이 수많은 가요 프로그램과 예능을 달고 살면서도 한 번도 홈쇼핑 채널에 리모컨을 멈춘 적은 없었으니까. 누적 판매액 천3억을 달성했다는 어느 연예인의 팩과, 메이크업 원장님들의 브랜드 론칭 소식에도 꿈쩍하지 않던 마음이 움직인 건 얼마 전 단체카톡창에 뜬 친구의 메시지 때문이었다. 모 브랜드의 보디 스크럽 제품이 사고 싶은데 개수가 너무 많으니 함께 사서 나눠 갖자는 것. 늘 좋은 브랜드의 제품만 쓰던 그녀가 홈쇼핑 채널 애청자였다니! 어쩌면 내가 그동안 홈쇼핑을 너무 등한시한 것은 아닐까?
미지의 세계로 탐험을 결심한 이후, 경건하게 TV 앞에 앉아 채널을 돌려보니 총 다섯 개의 홈쇼핑 채널이 다운점퍼부터 김치까지 제각기 다양한 것을 판매하고 있었다. 떠돌던 채널은 헤어 스타일러 광고에 멈췄다. 처음 들어보는 상표를 단 헤어 스타일러 옆에는 누구나 한번쯤 들어본 헤어숍의 원장님이 서 있었다. 발열봉, 음이온 같은 설명은 한 귀로 흘린 채 오로지 저 최신형 헤어 스타일러가 어떤 헤어 스타일을 연출해줄지, 모델이 등장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내 화면을 채운 것은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 속 마리 앙투아네트 머리를 한 채 어색하게 웃고 있는 모델의 모습이었으니…. 웨이브만 생기면 스타일은 어찌되어도 좋다는 걸까? 원장님의 손을 거쳐간 수많은 연예인 중 그 누구도 하지 않을 것만 같은 머리 모양을 만든 그 헤어 스타일러는 드라이기와 세팅기도 증정하고, ARS 주문 시 3천원 할인이라고 해도 갖고 싶지 않았다. 실패!
또 다른 채널에서는 역시 처음 듣는 이름의 메이크업 브랜드 제품이 한창 광고 중이었다. 시큰둥하게 화면을 응시하던 두 눈은 ‘유럽 넘버 원 브랜드’라는 문구를 보는 순간 번쩍 뜨였다. 아, 나는 대체 왜 ‘메이드 인 유럽’에 이토록 약할까. ‘무스 파운데이션’은 대체 어떤 제형의 파운데이션 일까? 제품 시연을 기다리면서 브랜드 이름을 검색해봤다. 생각보다 훨씬 유명한 브랜드였다(심지어 <얼루어>에도 몇 번 소개됐다!). 홈쇼핑 상품은 저가가 대부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해외 인지도가 높은 제품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프랑스의 디자이너 향수, 해외 컬렉션에서 모델들이 백스테이지에서 사용한다는 립글로스 등등. 모두 낯선 브랜드였다. 그래도 나름 드럭스토어를 자주 드나들며 새로운 뷰티 브랜드와 친하다고 자부했는데, 홈쇼핑 채널은 나를 훨씬 앞서나가고 있었던 거다.
이번에는 물량으로 승부를 걸고 있는 보디 제품 브랜드의 차례였다. 모두 유명한 브랜드 제품이었지만 12종, 때로는 18종에 달하는 구성은 당황스러웠다. 아니, 아무리 모공 관리가 중요하다지만 똑같은 비누를 열 개씩 쟁여놓고 쓸 사람이 있나? 오늘 아침 지구에 떨어진 것도 아닌데 보디 워시, 핸드크림, 풋크림, 립크림 등 모두 한 브랜드의 제품이 꼭 필요할까? 이 모든 의문은 가격을 보는 순간 설득당하고 말았다. 저 많은 구성이 10만원이 조금 넘다니. 10만원이 적은 돈은 아니지만 제품 몇 개를 그냥 얹어주는 거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할부로 지불하면 호스트의 말대로 ‘외식 한 번 안 하면 되는 금액’이다. 사람들이 이 맛에 홈쇼핑을 하는구나. 가만있자. 친구가 말한 보디 스크럽은 6개에 얼마라고 했더라? 그녀는 남자친구를 설득해 절반씩 보디 스크럽을 나눠 가졌다고 했다. 마침 화면 속 쇼핑호스트도 말했다“. 18개를 넣어두고 하나둘 선물하다 보면 본인 쓸 것도 없을 겁니다.”
그러나 3일간의 탐색 기간 동안 나는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물론 솔깃한 순간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아니 솔직히 감탄도 여러 번 했다. 구매 경험이 있는 브랜드의 파운데이션을 제품 두 개에 기초 종3 세트까지 얹어줄 때는 제품 구성에, 호스트가 “가격이 선물입니다”라고 말할 때는 그 문학적인 언어구사력에 감탄했다. 하지만 나는 늘 결정을 내리기 전에 채널을 돌렸다. 너무 많은 ‘말’에 지쳤기 때문이다. 호스트들은 쉬지 않고 열심히 말했지만 결국 머릿속에 남는 것은 그녀들의 말이 아니라 양쪽 화면에 크게 박힌 활자와 제품 시연 장면이었다. 수분감, 발림감, 광택감처럼 뜻은 전달되지만 결국에는 문장 안에서 부대끼는 단어들, ‘하이드로워터’나 ‘4D 모션’ 같은 낯선 조합의 단어가 수도 없이 반복되는 설명을 귀 기울여 들을 사람이 있을까? 그야말로 ‘말을 위한 말’은 구매욕보다는 피로를 촉진했다.
홈쇼핑에는 다양한 욕망이 넘친다. 그리고 그 욕망들은 ‘청담동 원장님’, ‘강남 핑크’ 같은 지명으로 나타나거나 혹은 연예인으로 향한다. 뷰티 제품들은 아름다워지고 싶어 하는 욕구에 끊임없이 호소하지만 결국 판매를 위한 화술이나 화면에서는 어떤 미의식도 찾아보기 어렵다. 제품의 커버력을 보여주기 위한 누군가의 어색한 민낯, 겨드랑이가 흠뻑 젖을 정도로 땀을 뻘뻘 흘리며 반신욕기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은 내가 ‘홈쇼핑 초보’이기 때문일까? 하지만 나는 친구가 말해준 ‘없어서 팔지 못한다’는 팩의 방영 시간에 맞춰 TV를 또다시 켤 예정이다. 이제는 방송할 때 주문하면 가격이 더 저렴해진다는 사실쯤은 알게 됐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