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정재영은 새 영화 <열한시>에서 타임슬립에 집착하는 천재 물리학자를 맡았다. 하지만 정작 그는 되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없다. 지금이 그에게 있어 가장 평화롭고 뜨거운 날이니까.

재킷은 꼬르넬리아니 (Corneliani). 셔츠는 에르메네질도 제냐 (Ermenegildo Zegna). 타이는 엠 플로린(M. Florin).

이번에는 <열한시>에서 타임슬립이 가능한 타임머신을 만든 천재 물리학자 역할을 맡았죠. 학생 시절에 물리 좋아했어요?
정말 싫어했어요. 수학은 진짜 싫었고, 물리는 어려웠어요. 지금 생각하면 물리는 정말 재미있는 학문이거든요. 그런데 수학이 싫으니까 물리도 싫더라고요.

물리는 싫어도 영화 속 역할은 마음에 들었겠죠?
천재 물리학자를 연기하는 데에 어떤 과학적 소양이나 지식이 필요하지는 않았어요. 이미 타임머신은 완성 단계였거든요. 그 타임머신에 집착하는 설정이었어요.

영화의 클리셰 중 하나인 ‘과학에 대한 열망 때문에 세계를 위험에 빠뜨리는 미친 과학자’ 역인가요?
하하. 결과적으로는 연구원들을 위험에 빠트린 셈이죠. 지상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실험을 하기 위해 해저 깊숙한 곳에 연구소가 있거든요. 고립된 곳이고, 위험한 요소도 많아요.

영화에 대해 알려진 게 많지 않은데 조금 더 힌트를 주면 어때요? 당신이 만든 타임머신으로 어떤 사건이 일어나죠?
타임머신이 성공해서 24시간 후의 시간으로 이동해요. 원래 실험이 성공하면 다 같이 휴가를 가기로 약속하거든요. 그런데 모든 게 폐허가 되어있는 거예요. 연구소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요. 그래서 그 24시간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추적하는 내용이에요.

오, 으스스하네요. 어릴 적에 사람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진 도시나, 혼자 떠다니는 메리 셀레스트호 같은 이야기를 좋아했거든요.
저도 워낙 재난물, SF물을 좋아해서 그런 할리우드 영화는 빠뜨리지 않고 봤거든요. 우리나라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 자체만으로 무척 기뻤죠. 그리고 이런 장르는 스토리를 아주 잘 꿰어 맞춰야 되거든요. 저는 처음부터 시나리오가 되게 재밌었어요. 어렵다는 사람도 있었는데 저는 이해가 잘되더라고요.

<열한시>는 충무로에서 잘 쓰였다고 소문난 시나리오였다던데요? 드디어 빛을 봤네요.
이게 약간 묵혀 있었죠. 컴퓨터 그래픽(CG) 작업이 중요한 영화라서 기술적인 부분이나 제작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거예요. 시나리오는 훨씬 더 어두운 작품이었어요.

작년에 크랭크업하고 개봉까지 1년을 더 기다려야 했는데요, 지루하지 않았어요?
후반 작업이 오래 걸렸어요. 저도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어요. 아마 시사회 때 볼 것 같아요.


트위드 재킷은 마누엘 리츠 바이 타트(Manuel Ritz by TAT). 울 소재 스웨터와 팬츠는 지제냐(Z Zegna).

타임슬립을 한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어요?
이미 지나온 과거가 궁금하지는 않아요.

바꾸고 싶은 것도 없어요?
그걸 뭘 특별히, 그 순간에만 바꿨으면 뭐가 대단하게 바뀌지도 않을 것 같고. 뭘 바꿀 수 있을까요?

그 작품을 해야 했다거나 그 여자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거나.
하나 가지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닐 거예요. 모든 게 다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차라리 미래를 보고 싶어요. 그럼 로또라도 살 수 있겠죠. 아니면 아주 먼 미래요. 과학문명이 얼마나 많이 발전했는지 아니면 인류가 멸망했는지 보고 싶어요.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던데….
과거가 행복하니깐 과거로 돌아가려는 거 아니에요?

지금 만족스러우니까 특별히 바꾸고 싶은 게 없는 거죠. 당신은 어때요? 만족하나요?
만족하지 않으면 너무 큰 욕심이죠. 앞으로 미래가 더 중요한 거죠.


울 재킷은 마누엘 리츠 바이 타트. 화이트 셔츠와 울 팬츠는 지제냐. 타이는 엠 플로린. 슈즈는 에르메네질도 제냐.

생각해보니 당신처럼 관객을 오랫동안 배신하지 않는 배우는 드문 것 같아요.
아니에요, 실망 많이 시켰죠. 영화 재미없다, 그런 얘기 많이 들었는데.

어떤 작품으로요?
영화는요, 되게 상대적이에요. 그래서 최대한 그 상대적인 것을 없애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죠. 대중의 기호를 다 맞출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착한 영화를 찍어요. 그럼 착한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아휴, 신파고 뻔하다’고 해요. 그런데 이게 또 ‘센 영화’를 찍으면 센 영화를 싫어하는 분들이 ‘영화가 너무 잔인하다. 저걸 영화라고 만들었냐’라고 하죠. 다 맞출 수 없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맞춰가면서 해요.

그 맞춰가는 과정이 어렵지 않아요?
그래서 영화가 재미있는 것 같아요. 우리 인생도 그러니까요. 인생 자체, 또 삶 자체. 나를 위해서 사는 게 진짜 행복한 걸까요? 가족이나 남을 위해 사는 게 행복할까요? 아니면 돈을 버는 게 행복할까요? 다 생각이 다르지만, 그중 하나를 이룬다고 해서 절대 행복하지 않거든요. 그런 많은 조건이 다 조화로워야 행복해요.

어떻게 조화를 꾀하고 있죠?
그 과정에서 타협하고, 때로는 내 고집도 가져가면서 맞춰가요. 저는 그런 부분이 재미있어요. 그러니까 계속하는 거죠. 하기 싫은데 남의 눈에 맞춰 억지로 하는 것도 피곤한 삶이에요. 영화도 그래요. ‘이건 잘될 거야’라고 생각해서 하고, 관객들이 ‘이걸 좋아할 거야’라고 따라가는데 그 안에 정작 자기 것은 하나도 없다면, 그 예상이 틀리는 순간 재미없지 않겠어요? 의미도 없어지고요.


셔츠는 지제냐. 메탈 프레임 안경은 브라운 클래식스 바이 C군 컴퍼니(Brown Classics by CGoon Company).

영화만 하는 배우라는 인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요?
옛날에는 연극도 많이 했죠. 왜 꼭 그렇게 모든 걸 갖춰야 하고, 엔터테이너가 되어야 하나요. 진짜 마음에 드는 드라마가 있으면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작품은 ‘결과’로 말하는 거예요. 영화든, 연극이든, 영화든 대박이 나면 잘했다고 하고, 잘 안 되면 그런 걸 왜 했냐고 하죠. 하지만 둘 다 똑같은 것이거든요.

요즘 야구장에서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이겼느냐, 졌느냐. 그날의 경기는 결과에 따라 다시 쓰이더라고요.
아무도 모르는 거거든요. 지금 대타를 쓰면 안타를 칠지 안 칠지, 결정적인 순간에 보내기 번트를
실패해서 저놈을 죽여 살려 하는데 마지막에 홈런을 치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후회가 없어야 해요. 그래야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을 수 있어요. 누가 내게 어떤 작품을 권해요. 내가 그 말을 듣고 이 작품을 해도 내 의지, 나 자신이 반 이상을 들어가야 잘되건 못 되건 후회를 하지 않아요.

오, 언제 깨달았어요?
알아도 소용이 없어요. 아까 스태프 중에 스물세 살이 있었죠? 스물세 살 때 이런 걸 아는 것도 웃긴 거고, 알아도 실천할 수가 없어요. 그냥 그때는 아무거나 하는 거예요. 앞뒤 재지 말고 하고 싶은 것을요.

당신의 스물세 살은 어땠어요?
그때는 한 가지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연기를 잘할까?’ 예를 들면 소품 나르려고 들어온 게 아닌데 소품만 나르는 거예요. 중국 무술 영화 보면, 무조건 물지게부터 나르는 장면 있잖아요. 무술 가르쳐달라고 왔는데 자꾸 물지게만 나르래요. 그런데 그 이유는 기초 체력이 필요하기 때문이에요.

연극과 출신이니 많이 경험해봤겠네요.
저도 그렇게 배웠어요. 그래서인지 옛날 사람들은 지구력이 좋았던 것 같아요. 요즘 친구들은 순발력이나 자기 표현력이 굉장히 뛰어나요. 요즘 세상엔 그런 게 또 맞는 것 같아요.

순발력과 지구력 중 어느 쪽에 자신 있어요?
저는 지구력 쪽이었어요. 그냥 한길만 팠어요. 그때는 그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철도 없었죠. “연기를 왜 해?” 하면 그냥 좋아하니까, 하고 싶으니까. 그냥 이 말 말고는 답을 할 수 없었어요.



니트 재킷은 지제냐. 스트라이프 셔츠는 보기(Boggi). 울 팬츠는 꼬르넬리아니. 타이는 엠 플로린.

지금까지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해왔죠. <피도 눈물도 없이>를 보면서 우리나라에 이런 배우가 있구나 새삼 감탄했었어요.
주변 반대가 무척 심했던 작품이에요. 그 전에 했던 게 <킬러들의 수다>,<간첩 리철진>이었으니까 부정적인 이미지가 덧씌워질까봐 많이들 말렸죠. 센 역할이었지만 그 안에 드라마가 워낙 세다 보니까 걱정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죠. 내겐 새로운 것을 해볼 수 있는 기회였어요. 거칠고, 세고, 날것 같은 캐릭터는 쉽게 오지 않아요. 그 당시로서는 굉장히 드문 캐릭터였어요. 좋은 기회였었죠.

관객들이나 기자를 만나면 각자가 자신이 생각하는 당신의 최고의 작품을 이야기하잖아요.
자기 자신의 취향, 좋아하는 장르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아요. 어떤 분은 <아는 여자>를 좋아하고, 어떤 분은 <피도 눈물도 없이>를, 또 어떤 사람은 <이끼>를 좋아하고요. 사람들은 제게 다양한 연기를 한다고 하는데 저는 두 가지라고 생각해요. 나약하거나 강하거나.

<열한시> 이후에도 계속 영화가 대기 중이죠? 한지민과 함께한 <플랜맨>도 있고요. 한지민과 은근히 잘 어울린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플랜맨>은 1월에 개봉해요. 잘 어울리죠! 여배우들 다 예쁘잖아요. 저랑 다 잘 어울릴 수밖에 없어요. 왜? 돋보이니까! 영화에서도 어느 한쪽이 조금 현실적이거나 자연스러워야 말이 됩니다.

이번에도 예능 프로그램은 고사했다던데요.
부르지도 않아요. 할 이야기도 없고. 우리가 영화를 보잖아요. DVD를 보면 영화를 본 다음에 메이킹을 봐요. 그런데 너무 홍보를 많이 하고 자기 얘기를 많이 하면, 메이킹을 보고 영화를 보는 것처럼 몰입이 떨어질 것 같아요. 영화는 정말 진짜처럼 보이려고 애를 쓰면서 만들었는데, 영화를 보기도 전에 이미 이건 가짜다, 얘네들은 배우들이다, 알려주는 거예요. 그럼 영화에 덜 몰입할 수밖에 없어요. 영화를 보고 그 영화가 좋으면 관심이 가니까 서플도 보고, 메이킹도 보면서 촬영 비하인드 스토리도 궁금해하는 게 순서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영화 <대부>의 서플은 되게 유명한데, 서플 먼저 보고 영화를 보면 재미가 없죠.

언젠가 연출을 해보고 싶지는 않나요?
감독은 배우와 다른 게, 디렉션을 하는 사람, 디렉터이기에 첫 번째로는 할 이야기가 있어야 해요. 배우는 자기가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감독이 하고 싶은 얘기나 다른 사람이 기획한 이야기를 대신 해주는 것이죠. 가장 큰 기준은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인데요, 난 그런 게 없어요. 너무 게으르거든요.

어떤 역할을 할 때 가장 자기 자신처럼 느껴져요?
다 조금씩 섞여 있어요. 저도 들어가 있고, 또 제가 아닌 부분도 많죠. 배우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면서 가장 어려운 건 무엇이었어요? 잘하고 못하고는 백지 한 장 차이예요. 전 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신선함’인 것 같아요. 배우 중 연기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 어느 정도는 해요. 어떤 작품에서 조금이라도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는 게 진짜 싸움인 거죠.

연기로 늘 신선함을 찾아내야 한다는 건, 6년째 연애 중인 남자친구에게 새로워 보이는 것만큼이나 어려울 것 같은데요?
그렇죠. 연기로만 새로움을 주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수염도 길러보고, 살도 뺐다가 찌웠다가 해요. 신선함을 외모의 변화, 작품, 캐릭터로 주는 거예요. 언젠가부터는 어떻게 하면 새로움을 줄까를 더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렇다고 해서 성형수술을 해서 못 알아볼 정도로 나타나면 그건 또 안 돼! 그럼 못 알아보니까 다시 시작해야 해요. 하하하.

<열한시>에서는 어떤 신선함을 기대해볼까요?
음…. 줄거리가 신선해요.

하하. 마지막에 빠져나가네요!
신선함과 지루함의 경계선을 잘 모르니까 항상 열심히 하는 거예요. 또 항상 부족함이 남고요.

새 작품 <역린>이 크랭크인했죠? 내년 기대작 중 하나인데요.
스케일이 워낙 커요. 이번에는 궁궐에서 이루어지는 사극인데 현빈, 조정석, 그리고 조재현 형도 나와요. 궁궐 안에서 일어나는 장면이 많으니까 좀 덜 춥겠죠. 사극은 역할에 따라 여름과 겨울이 너무 힘들어요.

이번에는 어떤 역이에요?
내시를 맡았습니다. 신선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