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마음에 드는 화장품을 발견했는데, ‘가격미정’이라고 쓰여 있다. ‘가격이 왜 미정일까’ 하고 궁금했던 독자나, ‘가격미정’이라고 써야 하는 에디터도 답답한 건 마찬가지다. 가격 책정은 왜 이리 늦어져 ‘가격미정’의 꼬리표를 달고 있는가.

잡지를 보면서 흥미 있는 상품이 가득한 페이지를 만난다. 신난다. 갖고 싶은 ‘욕구 게이지’가 치솟고, 내 취향에 딱 맞음에 감동하며, 언젠가 구입하리라 생각하며 기사를 읽어 내려간다. 흥분이 절정에 치달을 무렵 마지막 부분에 ‘가격미정’이라는 단어를 마주한다. 김빠진다. 마치 그에게서 고대하던 반지를 기다렸는데 ‘아직’이라는 의미의 팔찌를 선물 받은 기분이다. 찝찝함보다는 강한 감정이고, 좌절감보다는 약한 ‘실망스러움’ 어딘가다. 마치 즐겨 보던 드라마가 ‘열린 결말’로 끝난 느낌이다. 물론 가격 책정 과정은 존중한다. 샘플이 출고되어 눈앞에 있을 때 보통 사람이라면 곧바로 가격을 매길 수는 없다. 그러나 각 파트별로 여러 명의 전문가가 모였는데도 자신들이 개발한 제품 혹은 수입한 제품의 가치와 가격을 결정짓는 것에 늘 어려움을 토로하는 일부 경우는 안타깝다.

모 해외 화장품 브랜드의 홍보 담당자는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내부에서 결정을 미뤄서예요. 전체 매출을 보고 결정해야 하고, 경쟁사 가격 조사도 필요하고, 본사 컨펌도 받아야 해요. 마케팅팀과 영업팀 등 유관 부서의 의견도 조율해야 하고요. 출시 2~3달 전에 샘플이 도착하면 질감과 패키지를 살펴보고 기대 이하이면 가격을 내려야 하는 경우도 있어요.” 늘 먼저 본사가 문제다. 또 다른 해외화장품 브랜드의 홍보 담당자는 생각이 좀 다르다. “한마디로 기다리는 거죠. 제품은 반년 전에서부터 거의 1년 전에 완성되어 있어요. 하지만 국내 백화점 판매 상황을 파악해서 그 시즌의 이윤을 계산해봐야 하고, 환율 눈치도 보죠. 신제품은 출시 한 달 반 전에 미디어로 보내니 잡지 나오기 직전까지 시간을 벌어야 해요. 하지만 결국 처음 생각한 가격과 거의 다르지 않죠.” ‘가격미정’을 출시 직전까지 고수해서 얻는 것은 정말 클까? 꼭 그렇지 않다. 가격미정으로 일관하는 브랜드의 상품은 처음에는 소비자의 흥미를 끌지만 이런 행위가 반복되면 오히려 주목도가 떨어지기 쉽다고 국내 화장품 마케팅 담당자는 말한다. “가격미정으로 나오는 일부 해외 브랜드의 제품 중 본사의 가이드가 있어서 가격을 곧바로 정할 수 있지만 조금이라도 판매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적정 가격을 고민하느라 결정을 못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대부분이 큰 단위는 아니고 1 ~2천원 때문에 고민하는 경우가 많아요. 소비자들의 알 권리를 제공하는 것도 서비스로 여기는 배려심이 아쉬워요.” 매달 신제품을 엄선해 촬영하는 에디터에게 가끔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진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가격 미정에 대한 브랜드의 요구다. 명백히 가격이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사에 제품 가격을 미정으로 기입하길 원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수십만원 혹은 백만원이 훌쩍 넘는 값비싼 화장품인 경우는 특정 타깃을 위한 제품이 분명한 데다가, 위화감만 조성하니 브랜드 입장에서는 가격이 눈에 띄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런 경우는 심리적으로 가격 구애받지 않는 타깃층만 상대하고 싶다는 귀띔인데 그런 기업 마인드가 씁쓸하기는 하다. 생각해보면 1천원짜리 음료수에도 소소한 영양성분과 칼로리 정보까지 적어 소비자에게 정확한 수치로 알려주는데 화장품은 자세한 정보를 제공해주지 않는다. 정제수 80%, 알코올 12% 같은 수치 대신 화장품 성분 의무 표기법에 따라 성분 이름만 기재한다.

리뉴얼해 나오는 중요 제품의 가격 인상을 앞두고 있을 때 내부 담당자들은 얼마나 침이 바짝바짝 마를지는 안다. 금형사고가 나서 갑자기 패키지를 교체해야 하는데 단가가 올라가 가격을 바로 정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는 것도 안다. 왜 가격을 빨리 정하지 않느냐고 닦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피부에 바르는 화장품인 만큼 오랜 시간 연구해서 충분한 검증 과정을 거치고 안전성을 확인한 후 ‘적정 가격’이라는 옷을 완벽히 갖춰 입고 어엿하게 소비자 앞에 나왔으면 하는 것이다. 요즘 시대에 가격은 ‘영혼’이다. 영혼 없는 상품은 매력이 떨어진다. 사실 에디터가 추천하는 상품 기사를 읽는 맛은 제품 정보의 마지막에 ‘5만 8천원’, ‘12만원’ 같은 단어로 비로소 온전해진다. 좋다. ‘10만원대’ 같은 ‘대’ 라도 붙여주길 바란다. 앞으로 아주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제품을 노출하는 데만 급급하지 말고 ‘가격’이라는 ‘매력’을 입혀서 당당하게 구매자를 만나도록 해주면 좋겠다. 가치 있는 물건이라면 소비자는 어떤 가격이든 존중해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