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전유물이었던 축구와 야구가 이제 여자의 취미생활이 되었다. 직접 헤딩을 하거나 배트를 휘두를 줄 모른다고 그 재미를 모르겠는가. 두 에디터가 ‘그깟 공놀이’에 숨어 있는 뜨거운 미학을 이야기한다.

축구, 이 전쟁 같은 사랑

기성용의 HJ는 배우 한혜진으로 드러났다. 토요일 오후, 지상파 3사가 모두 프로야구 개막전을 중계하는 충격적인 편성 속에서 그나마 축구계가 관심 끌 만한 뉴스를 건진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야구는 국민 생활 스포츠이지만 축구는 한일전, 올림픽, 월드컵 같은 국가대항전 때가 아닌 이상 야구에 밀리는 스포츠다. 2002 한일 월드컵 때는 페널티킥이 뭔지 모르는 여자도 축구에 빠지는 집단 최면 현상이 있었지만, 이후 향방은 명확히 갈렸다. 대다수 여자가 일상으로 복귀한 사이, 나처럼 인생에 새로운 장을 연 여자도 있었다. 묘연한 ‘약’ 한 번 맞고 그 기분을 못 잊은 사람처럼 약을 찾아 다닌 것이다. 그렇게 K리그 관람을 거쳐 박지성과 상관없이 EPL(프리미어리그) 시청에 투신한 지 10년. 건실한 직장인이니 새벽마다 EPL이나 프리메라리가(스페인 리그) 생중계를 보긴 힘들지만, ‘빅 게임’은 웬만하면 챙겨 본다. 파란 유니폼에 ‘삼성전자’가 박힌 ‘첼시’의 팬으로서, 지난해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한 이 팀이 이번 시즌 말도 안 되는 성적을 내고 있기 때문에 여러모로 심란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사람들은 ‘여자가 EPL을 본다’고 하면 ‘야심한 시각에 허벅지 튼실한 서양 종마들이 뛰노는 풍경을 보며 침을 꿀꺽 삼킨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야구에 미친 여자는 ‘야구 참 좋아하네’ 소리를 듣지만, 축구 열심히 보는 여자는 자칫하면 ‘변태’ 취급을 받는다. 어떤 이는 새벽마다 경기를 보며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여자의 모습이 ‘란제리쇼’를 보며 신음소리 내는 남자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고도 한다. 토레스의 빵빵한 엉덩이와 존 테리의 듬직한 어깨, 그리고 대다수 축구 선수에게 해당하는 황금 비율의 몸과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근육은 확실히 훈훈한 풍경이다. 축구 선수, 특히 경기 속력이 남다른 EPL 선수들이 그 몸으로 90분 내내 전력질주를 하면 테스토스테론이 TV 화면 밖으로 분사되는 느낌이다. 그러나 축구를 보며 그런 풍경을 즐기는 맛은 철저히 액세서리일 뿐이다(하지만 이 액세서리는 할머니에게 물려받아 웬만하면 뺄 수 없는 반지와 같다는 게 함정이다!). 축구는 다분히 남성적인 스포츠인데, 그 성질이 이종격투기 같은 종목과는 또 다르다. 원초적인 몸싸움보다는 전술로 움직이는 팀 플레이가 중심이 된다. 몸을 부딪치는 선수 개개인의 풍경은 거칠지만, 중계 화면을 멀리서 전경으로 잡거나 높은 펜스 없이 타원형의 경기장과 맞닿아 있는 관중의 응원문화가 더해지면 스펙터클한 카타르시스를 자아낸다. 선수의 육체, 거친 몸짓, 빠른 속력, 거대한 경기장에서 비롯되는 규모감까지, 축구는 놀이문화로서의 게임과 본능에 호소하는 ‘생의 싸움’ 사이에서 적절한 포지션을 차지한다.

축구뿐 아니라 어느 스포츠에 빠져드는 방법 중 하나는 좋아하는 선수 하나를 찍는 것이다. 부끄럽지만, 처음 EPL을 보게 된 큰 요인 중 하나가 ‘독일의 홍명보’였던 미하엘 발락이 첼시로 이적했기 때문이다. 개인을 주목하면 그가 속한 팀을 주목하게 되고, 그 시간이 쌓이면 어느 순간그 팀이 ‘우리 팀’으로 다가온다. 유럽 여자들이 축구를 즐겨 보는 이유는 축구 종주국인 영국을 비롯해 몇 백 년 동안 이어온 종목의 역사가 나라와 도시 곳곳에 켜켜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연고지 개념이다. 국내에서 프로축구가 프로야구보다 파급력이 약한 이유도 바로 이 연고지 개념이 희박한 탓이다. 인간은 ‘우리 팀’이 생기는 순간 관람 태도가 전투적으로 변한다. 영국의 훌리건 문화나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처럼 과거 민족 간에 피를 봤던 싸움을 생각해봐도, 축구는 전쟁 같은 사랑이다. 오래 묵은 진짜 축구팬은 전사와 같은 비장함을 갖게 된다. 설사 잘생기고 허벅지가 남다른 남자에게 반해 축구에 입문한 여자라도 점점 축구의 본질에 몸을 실으며 승부게임에 쾌감을 느끼는 성숙함을 맛볼 수도 있는 것이다.

축구로 쓴 이 드라마에 마침표를 찍는 건 ‘인간 승리의 신화’다. 지구촌 단위에서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이자 격렬한 종목인 이 분야에서는 ‘천 번은 태클을 당해야 축구선수가 된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축구’ 따위의 제목을 달고 자서전을 내도 되는 선수들이 제법 있다. 169cm의 단신으로 ‘스페셜 원’이 된 메시, 평발을 극복한 박지성, 몇 년 전 머리 부상을 입은 이후로 아직도 매번 헤드 기어를 쓰고 경기에 나서는 첼시의 골키퍼 체흐 등. 코트디부아르 출신인 드록바는 ‘조국이여 내전을 멈춰달라’고 방송에서 호소했다가 정말 내전이 잠시 멈춰 ‘드록신’이란 별명을 얻었다. 연봉 몇 백억을 받는 선수들 중에는 질 좋은 잔디구장 대신 단단한 흙 바닥에서 공을 차며 성장한 경우도 많다. 그렇게 인간 승리를 거둔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거칠게 뛰다가도 상대팀 선수가 넘어지면 손을 내밀어 일으켜준다. 그 순간, 허벅지와 전투력과 인간적 젠틀함이 어우러진 총체가 그곳에 있다. 이것이 축구다. -권은경(<보그 코리아> 피처 에디터>)

야구, 내 집은 어디인가

오후 내내 내린 비는 그쳤지만 바람은 봄이 무색하게 시리다. 그런데 나는 왜 야구장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까? 아무리 춥고 바람이 분다 한들, 홈 경기의 개막전을 놓칠 수는 없는 일.

‘여자’가 더 이상 야구장의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건 주변만 봐도 알수 있었다. 남자끼리 온 관중만큼이나 여자끼리 온 관중도 많아졌다. 특히 몇몇 구단은 특히 여자 팬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낮은 중저음의 ‘떼창’이 구장을 뒤흔드는 기아 타이거즈 같은 팀도 있지만, 여자들의 높고 가는 목소리가 확연한 두산 베어스 같은 팀도 있다. 두산 베어스의 응원 단장은 급기야 남녀 2부로 나뉘는 응원가를 만들었는데, ‘두산의 안방마님 양의지’나 ‘날려라 날려 안타 두산 정수빈’은 남자와 여자의 파트가 다르다. 처음 이 응원가가 울려 퍼졌을 때 상대팀은 귀를 의심했다.

야구는 몰랐지만 탁 트인 구장에서 맥주와 함께 치킨을 뜯어 먹는 맛은 좋았다. 가족 모두가 야구팬인 모태 신앙이 아니면, 대부분 여자들은 남자친구의 간청에 못 이겨 처음 야구장을 밟는다. 그렇게 몇 번 왔다 갔다 하다 보면 어느덧 9회라는 시간도 그리 길지 않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그러나 야구팬으로서의 각성은 ‘분노’와 함께다. 무사만루 상황에서 병살타를 맞을 때, 어이없는 실책으로 다 이긴 승부를 내줄 때, 간이고 쓸개고 빼놓고 계속되는 패배를 지켜봐야 할 때 마음 깊은 곳에서 좌절과 분노가 핵융합처럼 치밀어 오르기 시작한다. 그때 비로소 한 사람의 야구팬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 울화통은 야구팬이 존재하는 힘의 한 축이며 동전의 양면이다. 야구의 역사를 거슬러 오르면 경기 결과에 화가 난 팬들이 앵그리버드가 되어 선수용 버스를 흔들어 뒤집은 사건, 버스에 불을 지른 사건 등 뉴스에 나올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광경은 이제 더 이상 보기 힘들다. 전문가들은 야구장에 여자팬이 늘면서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좋아진 것 같다는 분석도 내놓는다.

야구를 좋아하게 되는 건 동시에 내 발을 찧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 야구 때문에 죄인이 되기도 한다. 몇 해 연속 리그 하위를 달리고 있는 한화 이글스는 개막 이래 13연패를 기록 중인데, 요즘 한화 팬을 일컫는 말은 ‘부처’다. 모든 번뇌에서 성불했다는 뜻이다. ‘지는 것도 한화의 의지에 달렸다’, ‘한화가 13연패인 이유는 경기를 열세 번 했기 때문’이라는 자조적 유머도 나왔다. 롯데 자이언츠는 팬들이 열광적이기로 유명해서, ‘성지’로 불리는 부산 사직구장에 원정 간 서포터즈들이 ‘목숨 걸고 응원 중’이라는 플래카드를 들 정도다. 아홉 번째 구단으로 처음 정규리그에 참여한 NC 다이노스의 활약도 올해 지켜봐야 할 관전 포인트다. 다만 야구팬이 되면 각오해야 할 일이 생긴다. 다른 스포츠에 비해 경기수가 월등히 많다는 것. 야구는 기록 스포츠이므로 챙겨야 할 기록은 더 많다는 것. 봄에 개막해서 플레이오프가 열리는 가을까지, 원래 경기가 없는 월요일만 제외하면 매일 저녁 약 4시간씩 경기가 열리는 셈이니, 그 경기를 다 챙기다 보면 인생이 줄줄 샌다.

인생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야구는 인생을 닮았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좀처럼 와 닿지 않는다. 그러나 높은 관중석에 앉아 구장을 내려다보는 횟수가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야구 속에 담긴 인생을 이해하게 된다. 각 팀이 자리 잡은 구장을 부르는 다른 이름은 ‘홈(Home)구장’이다. 즉, 집인 것이다. 야구는 주자가 집을 떠나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고단한 여정이다. 주자는 우선 공을 잘 쳐서 홈베이스를 떠나야 한다. 집도 못 떠나면 사람으로 태어나 제 구실도 못한다고 눈총 받는다. 요리조리 공을 골라 ‘볼넷’을 만들면 슬렁슬렁 걸어나간다. 출루한 이후에 다음 타자들이 안타를 뻥뻥 쳐주면 2루와 3루 베이스를 차례로 밟고 다시 집으로 돌아올수 있다. 그럼 비로소 1점이다. 뛰어난 타자는 홈런을 친다. 그럼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식솔들까지 한 번에 데리고 금의환향할 수 있다. 간혹 요행을 노리며 도루를 하고, 그러다 작전에 걸려 죽기도 한다. 나는 여기서 죽을지언정 동료는 진루시켜야 한다는 비장한 희생플라이를 볼 땐 눈물이 난다. 집으로 오지 못한 선수들의 잔루는 패잔병처럼 쌓인다. 뛰다 죽든, 기다리다 죽든 ‘객사’신세는 같다. 참 고단한 인생이다.

전후반전을 다 뛰어도 2점 내기 힘든 축구와 달리 야구 점수는 종잡을 수가 없다. 7회가 가도록 변변히 점수가 나지 않는 ‘변비 야구’도 있고, 이게 야구인가 배구인가 싶을 정도로 점수가 많이 나는 ‘뻥 야구’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야구가 인생을 닮은 부분은, 끝까지 결과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9회말 투아웃’처럼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끝내기홈런이 터질 수 있다. 야구 팬들의 눈가는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면서 뜨거워진다. 야구에는 항상 인생 역전의 희망이 있다. 또 끝날 때까지 묵묵히 모든 이닝을 이끌어야 하는 ‘타임아웃이 없는 게임’이다. 베테랑 해설자나 캐스터는 관중의 함성으로 귀가 먹먹해지는 기적 같은 상황에서 간신히 입을 뗀다. 그럴 때 나오는 말은 항상 같다. ‘야구,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