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트콤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밝고 상냥한 사람들, 야자수가 키다리 아저씨처럼 쭉쭉 자라며 건강하게 그을린 남자들이 서핑을 하는 해변의 다른 한쪽에서는 물개들이 일광욕을 한다. 캘리포니아의 태양이 내리쬐는 샌디에이고는 매일매일 이런 날이다.

바닷가 도시 샌디에이고 곳곳에 마리나가 있다. 하버 아일랜드 마리나에 해가 진다.

폭설 속에도 비행기는 떴다. 어디에서 출발했더라도 샌디에이고에 도착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하는 건 가방 속을 뒤져 선글라스를 꺼내 쓰는 일이다. 그만큼 캘리포니아의 태양은 1년 내내 강렬하게 존재감을 내뿜어서, 추운 나라에서 날아온 사람들의 마음까지 녹인다. 그러니 샌디에이고 사람들은 일조량이 적은 겨울에 걸리기 쉽다는 ‘겨울 우울증’ 같은 건 아예 모른다. 도시 어디에서나 방금 미국 시트콤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즐거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10년 된 친구처럼 인사를 건네는 낯선 사람들. 같은 캘리포니아지만 LA와도 다르고, 샌프란시스코와도 다른 따뜻한 에너지가 여행자에게도 쉽게 전염된다. 캘리포니아에서도 조금 더 행복한 태양이 내리쬐는 샌디에이고는 매일매일 이런 날이다.

1 스페인 양식의 건물이 모인 크고 아름다운 공원 발보아 파크. 식물원, 회화 미술관, 사진미술관 등으로 사용 중이다. 2 패시픽 비치의 서퍼들. 샌디에이고의 많은 해변 중에서도청춘들이 가장 사랑하는 곳이다. 3 올드타운에서 캘리포니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빨간 트롤리로 샌디에이고 한 바퀴
샌디에이고 공항은 도시 안에 있다. 납작한 도시 위를 아슬아슬하게 날아 착륙한 순간부터 이 도시가 맘에 들기 시작했다. 공항에서 고급 호텔들이 밀집한 다운타운까지는 차가 꽤 막힌다는 주말에도 10분을 넘지 않는다. 본래 샌디에이고는 미 해군의 도시였다. 도로 옆으로 펼쳐진 바다에는 한국전쟁까지 다녀왔다는 은퇴한 항공모함이 느긋하게 떠 있고, 맨체스터 그랜드 하얏트 샌디에이고 호텔은 마침 해군들의 파티가 열리고 있어서 정복을 입은 해군과 드레스를 입은 여자친구로 북적거렸다. 그 때문인지 이곳은 미국에서도 가장 안전한 도시로 불린다. 해가 진 후에도 걱정 없이 도시의 이곳저곳을 쏘다닐 수 있으니 그만큼 하루가 길어졌다.

오래전 가스등으로 불을 밝힌 것에서 유래한 개스램프(Gaslamp)지역은 다운타운의 중심이다. 재즈바와 클럽, 카페, 지역 맥주를 파는 브루어리, 패션 숍, 힙한 레스토랑과 작은 부티크 호텔이 늘어서 있는 이곳은 낮과 밤의 풍경이 확연히 다르다. 낮에는 커피와 아이스크림을 앞에 두고, 기라델리 초콜릿과 어반아웃피터스 같은 브랜드 쇼핑백을 든 사람들이 차지한 이 거리를 밤에는 재즈와 칵테일 드레스, 술기운이 살짝 오른 사람들이 점령한다. ‘Time in a Bottle’로 유명한 뮤지션 짐 크로체(Jim Croce)가 불운의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내가 운영하는 크로체스 재즈바(Croce’s Restaurant & Jazz Bar)에는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 가득하고, 메리어트 호텔의 꼭대기에 위치한 루프톱 바 알티튜드(Altitude Sky Lounge Bar)도 비슷한 풍경이다. 샌디에이고에서 전망이 가장 좋은 알티튜드에서는 칵테일과 함께 바닷가 도시 샌디에이고의 항구와 스카이라인이 만들어내는 파노라마 야경을 누릴 수 있다. 알티튜드는 바로 옆에 위치한 명성 높은 야구장 펫코파크(Petco Park)의 잔디가 손에 닿을 듯 내려다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샌디에이고 파드레스의 홈구장인 펫코파크는 몇년 전 박찬호의 홈구장이기도 했다. 자정이 훌쩍 넘은 후에도 개스램프는 사람들의 유쾌한 기운이 넘친다.

샌디에이고의 첫날. 낯선 도시에 조금 익숙해지고 싶다면 먼저 빨간색 트롤리를 타보길. 샌디에이고를 한 바퀴 도는 새빨간 전차는 샌디에이고의 끝, 즉 미국과 멕시코 접경 지역까지 향한다. 앉아서 ‘미국의 땅끝’까지 가볼 수 있는 셈이다. 요금 2.5달러를 내면 2시간 이내엔 자유롭게 타고 내리는 게 가능해서, 처음 샌디에이고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이보다 더 좋은 게 없다. 하루 종일 이용할 수 있는 원데이 패스도 있다.

해변에 살자
미국인들이 은퇴하고 살고 싶은 곳. 샌디에이고를 설명할 때 꼭 따라다니는 말이다. 코로나도(Coronado) 비치와 라호야(La Jolla) 비치는 바로 그 은퇴한 사람들의 저택이 즐비한 고급 주택가다. 코로나도 비치는 미국 최고의 해변으로 선정된 곳이기도 하다. 해변 앞에 있는 호텔 델 코로나도(Hotel del Coronado)는 1887년에 세워진 목조호텔로 역대 대통령과 셀러브리티들이 머무는 곳으로 유명한데, 마릴린 먼로의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겨울 시즌에 방문하면 야자수 아래에서 아이스 스케이트를 타는 신기한 경험도 할 수 있다. 낮 기온은 20℃에 달하고 따사로운 햇볕이 쏟아지지만, 특수 설비를 한 야외 아이스링크라 녹지 않는다. 스케이트를 탄 뒤 뜨거운 코코아 대신 아이스크림을 먹는게 사뭇 다르지만.

라호야 비치는 샌디에이고를 찾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가장 오래 말하는 이름이다. 절벽과 해변이 조화된 아름다운 비치를 따라 고급 호텔과 부티크, 저택이 늘어서 있는 부촌이다. 수많은 부동산을 소유한 부호인 미트 롬니의 저택도 있는데, 쓰린 속을 달래는데는 캘리포니아의 태양만 한 건 없다고 생각했는지 대선에서 오바마에게 패배한 후 한동안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특히 12월부터 3월까지 수백 마리의 고래가 샌디에이고 해안을 지나 남쪽 멕시코로 이동했다가 다시 돌아오는데,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라 발렌시아 호텔, 더 그랜드 콜로니얼 호텔(The Grande Colonial Hotel)에서는 호텔 창문만 열어도 볼 수 있을 정도라고. 호텔 앞에는 부티크부터 패션 숍, 레스토랑, 바, 카페가 펼쳐져 있다.

샌디에이고에 왔다면 이렇게 ‘비치 호핑’을 즐겨야 한다. 피시 타코가 맛있고 여름이면 미국에서 가장 잘 노는 대학생들이 모여든다는 패시픽 비치, 요트가 즐비한 마리나와 어우러진 미션베이 비치, 서퍼들의 성지로 불리며 샌디에이고에서 가장 맛있는 햄버거집 호다스(Hodad’s)가 있는 오션 비치, 행글라이더와 전망을 즐길 수 있는 선셋 클리프 등을 차례차례 들렀다. 같은 푸른색이어도 너무 다른 그 풍경을 보는 사이 자연히 캘리포니아적인 삶을 알게된다. 눈부신 해변과 함께하는 건강하고 여유로운 삶.

1 토리 파인스 스테이트 파크에서 내려다본 라호야 비치. 2 줄리언의 명물 애플파이는 미국 최고로 손꼽힌다. 3 산속 마을줄리언으로 가는 길엔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4 줄리언의 매력은 밤에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도시의 빛을 피해 달아난 수백만개의 별이 하늘에 걸려 있다. 5 샌디에이고의 중심지인 개스램프 쿼터는 해가 진 후 더 흥미로워진다. 안전한 도시의 선물을 마음껏누릴 수 있다. 6 리틀 이탈리아와 힐크레스트는 요즘 뜨는 지역이다. 7 멕시코와 가까운 까닭에 진짜 멕시코 요리를 먹을 수 있다.

샌디에이고의 과거 그리고 오늘
샌디에이고에서 만난 패션 피플과 호텔리어, 셰프 등에게 샌디에이고의 매력을 물었을 때 그들의 대답은 늘 같았다. 좋은 날씨, 상냥한 사람들 그리고 다양한 문화. 샌디에이고에 가장 먼저 발을 디딘 스페인의 문화와 국경을 맞댄 멕시코 문화가 섞여 있고, 개척시대 골드러시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미 해군의 위풍당당함도 있다. 올드타운(Old Town)에 들어서면 잠시 어리둥절해진다. 여긴 어딜까? 짐마차와 가죽공방, 양조장 등이 남아 있는 올드타운에서는 누구나 사진을 백 장쯤은 찍고 싶어질 것 같다. 이곳은 캘리포니아의 탄생지다. 1542년 스페인의 탐험가 카브릴로가 발견한 후, 최초로 유럽인들이 정착하게 되면서 가장 오래된 마을의 직함을 얻었고 지금은 역사공원이 되었다. 올드타운의 주변에는 스페인 양식으로 지은 성당과 저택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샌디에이고에서 유명한 멕시칸 식당도 여기 모여 있다. 세상에서 가장 매운 고추 중 하나인 하바네로로 만든 살사를 먹고 속수무책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으면 세 명의 멕시칸 아저씨로 구성된 밴드가 나타나 ‘케 세라’ 나 ‘키사스 키사스’를 불러주는 식이다. 바깥쪽으로 낸 부엌에서는 자수가 놓인 블라우스에 앞치마를 곱게 두른 멕시칸 아주머니들이 깨설탕만 안 들었지 아무리 봐도 호떡인 토르티야를 바로바로 구워낸다. 이곳에서 진짜 과카몰리와 피시타코를 맛보길.

탐험가 카브릴로가 처음 정박한 지역은 포인트 로마(Point Loma)로 불린다. 오래된 포인트 로마 등대와 함께 전망대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어서 도시 전체는 물론 태평양과 멕시코까지 보인다. 스페인의 정취는 발보아 파크(Balboa Park)에서도 계속된다. 스페인 건물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낭만적인 정취를 가진 곳이다. 건물은 미술관과 공연장 등으로 쓰이는데 스페인 회화와 램브란트, 루벤스 등의 그림도 볼 수 있다. 연못을 앞에 둔 식물원은 타지마할처럼 로맨틱하다. 이곳들이 샌디에이고의 역사와 과거를 말해준다면 리틀 이탈리아(Little Italy), 힐크레스트(Hillcrest)는 지금 샌디에이고의 자유로움을 말해주는 곳이다. 과거 이탈리아인 이주자의 마을이었던 리틀 이탈리아는 젊은 부유층들이 가장 선호하는 지역이 되었고, 힐크레스트는 붉은 팻말 너머로 보이는 무지개 깃발들이 이곳의 정체성을 상징해주듯 대표적인 게이와 레즈비언들의 지역이다. 샌프란시스코의 캐스트로 거리와 비슷한 곳이다. 그 말은, 이곳에 샌디에이고에서 가장 맛있는 카페와 가장 멋진 레스토랑, 시크한 숍이 모여 있다는 것이다.

줄리언의 별 헤는 밤
사람들이 샌디에이고에서 어디가 제일 좋았냐고 물을 때면 늘 ‘줄리언’이라고 답하게 되었다. 가장 예상치 못했고,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선물해준 곳이라고. 줄리언(Julian)은 샌디에이고 북쪽 끝에 있는 산속 마을이다. 다운타운에서 1시간쯤 달리면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산속 풍경이 펼쳐진다. 울창한 숲 대신 지면에 바싹 붙어 있는 나무와 돌과 덤불들이 조화된 낯선 풍경은 사막 지형이라서 그렇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고도가 높아서 아주 가끔이지만 샌디에이고에서 유일하게 눈이 내리기도 한다. 1870년대에 이곳은 금광으로 번성했다. 그러나 금은 금세 바닥났고 사람들은 떠났다. 남은 사람들은 사과를 심었다. 그 사과와 사과로 만든 애플버터, 애플파이가 줄리언을 다시 유명하게 만들었다. 이제 사람들은 줄리언에 애플파이를 먹으러 온다. 이곳에는 유명한 애플파이집이 많은데, 단순하게 사과만 넣은 것부터 체리를 넣은 것, 루밥을 넣은 것 등 종류가 열 가지도 넘는다. 사과주스와 시나몬을 넣어 뜨겁게 마시는 애플사이다도 진하고 신선하다. 단풍이 들고 사과를 수확하는 가을은 줄리언이 가장 예쁘고, 가장 바쁜 철이다. 하지만 사과가 아니더라도 옛 금광시대의 정취를 고스란히 갖고 있는 줄리언은 아름다웠다. 목조건물이 늘어선 작은 거리는 <초원의 집>을 떠오르게 한다. 조용하고 낯선 풍경을 선사하는 줄리언은 샌디에이고 사람들이 즐겨 찾는 드라이브 코스다. 이곳의 진짜 아름다움을 보려면 방마다 벽난로가 있는 멋진 산장 오차드 힐 컨트리 인(Orchard Hill Country Inn)에서 하룻밤 머물길. 해가 지고 애플파이를 두둑하게 먹은 사람들이 떠나면 마을은 적막함에 잠긴다. 모든 빛이 사라진 그때, 샌디에이고에서 가장 높고, 가장 어두운 줄리언이 숨겨둔 아름다움을 꺼내놓는다. 고요 속에 수만 개의 별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 그림자만 남은 산 위로 검은 벨벳에 크리스털 수만 개를 뿌려놓은 것처럼 반짝거리는 별을 고개가 아프도록 봤다. 이 별에 반한 천문학자는 가장 높은 산꼭대기에 별자리 관측소를 열었다. 천체망원경 여러 대를 갖추고 특수 레이저로 별을 알려준다. 시리우스, 카시오페아 등 하늘로 곧게 뻗어간 레이저의 궤적이 오래된 그리스 신화를 꺼내놓는다. 천체망원경으로는 성단과 성운, 목성도 볼 수 있다. 그래도 은하계의 신비보다 그냥 하늘을 보는 게 더 좋았다. 이쪽을 보라고 할 때 저쪽을 봤더니, 그곳엔 유성이 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