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늘 사랑을 이야기한다. 철저히 이상적이거나 지극히 평범하거나 잔인할 만큼 비극적인, 그래서 감히 최고라 말할 수 있는 드라마 속 커플을 꼽았다. 그들의 사랑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



당신의 암세포가 예뻐요 | <네 멋대로 해라> 전경과 고복수
일본 영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기적>의 배경은 휴화산이 다시 활동을 시작한 시골 마을이다.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화산재가 흩날려 빨래를 망치곤 하는 마을에서 주인공 소년과 엄마, 할아버지를 비롯한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간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스크린 속을 향해 소리치고 싶었다. “당장 이사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위험한 곳을 어째서 떠나지 않는 걸까? 아마 그곳에 집과 가족, 이웃과 일터, 생활의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일 테다. 화산은 밖에서 바라보면 공포지만, 마을 안에 있는 그들에게는 이미 삶의 일부이자 자신의 일부다. <네 멋대로 해라>에서 전경(이나영)과 고복수(양동근)는 이런 화산을 껴안은 사랑을 한다. 전경은 부유한 집안의 딸이며 밴드에서 키보드를 친다. 고복수는 소매치기였고, 그걸 그만두고 나서 스턴트맨이 된다. 드라마 속의 사랑이 으레 그렇듯 서로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 두 사람이, 놀랍게 만나고 서로를 좋아하게 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물잔을 끼얹거나 뺨을 때리며 이 관계를 갈라놓는 훼방꾼은 없다. 딱히 결혼 같은 목적지를 정해둔 만남이 아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배경 차이는 극복해야 할 고난이라기보다 그저 다른 성분의 남자와 여자를 만들어낸 재료일 뿐이다. 대신 이 사랑에서 연기를 뿜고 재를 떨어뜨리는 화산은, 죽음의 그림자다. 하지만 남자주인공의 암은 드라마 전환부에 두 사람을 시험하기 위한 극적인 고난으로 깜짝 등장하지는 않는다. 애초부터 고복수는 이미 자신의 병을 알고 있다. 다가오는 죽음을 예감하면서 조금씩 삶에 대한 관점과 태도도 달라지는데 그 가운데 전경과의 만남도 포함된 것이다. 아픈 사람은 사랑할 자격이 없을까? 곧 죽을 거면서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건 무책임하지 않나? 이런 질문에 대해 고복수와 전경은 그저 서로를 애틋하게 아끼는 모습으로 답한다. 내일 중환자실에 실려갈지 모르는 연인과, 오늘 그의 암세포까지 예뻐하며 웃는다. 두 사람이 허름한 트레닝복 차림으로 방바닥에 누워 서로의 발을 만지고 입맞추는 장면에 이 드라마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죽음을 이기는 사람은 없다. 그 앞에서 우리는 백전백패다. 하지만 죽음 전의 유한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는 각자의 몫이며, 사랑은 그 시간을 가장 의미 있고 강렬하게 농축하는 방식이다.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는 둘 사이에 가로놓인 죽음의 벽에 주먹질을 합니다. 그러나 벽은 남자와 여자의 노력보다 강합니다. 지친 남자와 여자는 그 벽에 얼굴을 기대고, 가만히 눈을 감고, 벽을 통해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이제 그 죽음의 벽마저 사랑합니다.” 길고 짧고의 차이는 있겠으나 결국 시한부인 인생, 전경처럼 사랑할 수 있다면 하루를 살아도 진짜 사는 걸 거다. 복수처럼 사랑할 수 있다면 나약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복수 일거다. 각자의 삶에 존재하는 화산이 언제 터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네 멋대로 해라>는 내가 기억하는 가장 건강한 시한부 인생의 이야기이며, 전경과 고복수는 가장 아름다운 패배자들이다. – 황선우 ([W Korea] 피처 디렉터)



교통사고처럼 닥치는 | <푸른 안개> 성재와 신우
40년 넘게 평탄하게 달려오던 길 위에 불쑥 어떤 아이가 뛰어들었다. 잠시, 피해갈 수도 있었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멈춰 선 곳에서 남자는 발견한다. 평생을 꿈꾸었지만 한 번도 지니지 못한 젊음을. 20년 동안 외롭게 걸어가던 길 옆으로 어떤 남자가 더운 손을 내민다. 모른 척, 뿌리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멈춰 선 곳에서 여자는 발견한다. 평생을 꿈꾸었지만 한 번도 허락되지 않았던 온기를. 하지만 그것은 딜레마를 안고 시작한 사랑이었다. 어린 여자가 남자에게 처음 끌렸던 순간은 딸의 전화를 자상하게 받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머리 희끗한 남자가 여자에게 빠져든 것은 당당하고 겁 없는 삶의 태도였다. 그런 두 사람이 사랑에 빠졌다. 무언가를 ‘원조’받는 것도 아니고, 육체를 탐하지도 않았다. 몇 번의 포옹, 한 번의 입맞춤, 함께 차를 마시고, 밥을 먹고, 어깨를 마주하고 길을 걸은 것뿐이었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불륜이라 말했다. 남자가 여자에게 이 사랑의 진정성을 증명해 보일 방법은 가정을 버리는 것뿐이다. 그러나 남자가 이혼을 결심한다는 것은 다정한 아빠의 역할 역시 포기함을 뜻한다. 두 사람의 사랑이 깊어질수록 여자의 당당한 젊음도 서서히 빛을 잃어간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서로가 가장 사랑했던 모습에서 가장 멀어진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사랑을 찾으면 완전할 것 같았던 두 사람이 결국엔 불완전의 상태에 이르고 마는 불륜의 딜레마. <푸른 안개>의 성재(이경영)와 신우(이요원)는 사랑이라는 가장 잔인하고 아름다운 시험대에 오른 남과 여였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지금 우리의 눈앞에 ‘안개’가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안개가 걷히는 순간 누구에게라도 사랑이 교통사고처럼 닥칠 수 있음을, 그 앞에서 누구도 안전하지 않음을. 성재도 신우도, 당신도 나도. – 백은하 (<경향신문> 기자)



가장 보통의 연인 | <그들이 사는 세상> 정지오와 주준영
노희경이 썼는데 굳이 송혜교, 현빈씩이나 필요할까 싶었다. 오직 노희경의 것이라는 이유로, 그저 그녀에 대한 의리에서 시작한 드라마였다. 그러나 곧 현빈이어야 했던 정지오를, 송혜교여야 했던 주준영을 공감했다. 두 사람은 오롯이 정지오로서, 또 주준영으로서 그들이 사는 눈물겹도록 평범한 세상을 만들어냈고 그 세상이란 기꺼이 편승하고 싶은, 함께 머무르고 싶은 종류의 것이었다. 지오는 준영의 밤톨 같은 머리를 자주 쓰다듬어준다. 귀여워 죽겠다는 듯 앞머리를 마구 흩트리며 쓰다듬는다. 그걸 극대화하기 위해 송혜교는 기꺼이 밤톨 머리를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그 머리는 지오의 커다란 손안에서 유난히 예뻤다. 지오는 자신을 만나기 위해 밤을 새우고 찾아온 준영의 두 뺨을 감싸 안는다. 그 넓은 가슴 안에 준영을 가득 넣어버린다. 그녀의 작은 몸이 그 안에 들어가 있는걸 보며 두 사람이 꼭 사랑해야 한다고 믿고 바랐는데 그들은 고맙게도 정말 서로를 사랑하기까지 했다. 집을 돼지우리로 만들어놓고는 영화에 나오는 어설픈 춤사위를 따라 하고 시시껄렁한 만화책을 보며 키득거리고, 지오에게 대롱대롱 매달려 키스를 퍼붓고, 손에 침을 발라 상처를 만져주고, “밀가루로 부쳐놓은 것 같아” 라고 말하며 귓불을 만지는 그들을 보며 누구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열렬히 사랑했던 한 시절을 떠올리고 떠나보냈을 거다. 그들은 서로의 전 연인을 질투하고 자기 마음대로 오해하거나 단정하고 ‘속아지’가 더럽다고, 못돼 처먹었다고 욕하고 비난했다.미친 듯이 서로를 원하면서도 온힘을 다해 싸우는 서툴고 치기 어린 그들의 사랑은 미약하고 불완전한 우리의 모습이기도 했다. 준영은 할 말은 다 해야 직성이 풀리고 한참 선배인 카메라 감독과도 여배우와도, 미친 양언니와도 매번 싸우고야 마는 싸움닭이지만 지오와 싸운 뒤에는 “우리 화해한 거지? 그럼 뽀뽀해줘. 한번 더”라고 말할 줄 아는 가장 보통의 여자였다. 지오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위해 기꺼이 술잔을 기울이고 어깨를 빌려주면서도 정작 자신의 삶에는 준비되어 있지 않은 채로 질퍽거리는 가장 보통의 남자였다. 준영에게 있어 지오는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함께 웃고 싶은 연인을 넘어, 가야 할 길을 먼저 가는 선배였고 우상이었고 삶의 지표였다. 지오에게 준영은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온전한 이유였다. 정지오와 주준영은 가장 보통의 연인이 가장 아름다운 존재임을 증명했다. 이것이 정지오와 주준영이 살아 숨쉬던, 그들만의 세상을 뜨겁게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 조소영(<얼루어> 피처 에디터)



늙은 여자와 허세 남자의 로맨스 |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 민호와 들래
“아주 중늙은이들끼리 좋아 죽는구나.” 남자 나이 마흔셋, 여자는 오십. 평생 남자와 키스 한 번 못해봤던 여동생의 늦바람을 보다 못한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의 이들자(이미숙) 여사가 말씀하셨다. 하지만 영화든 드라마든 남의 연애에는 도통 설레지도 짠해하지도 않는 메마른 감수성의 내게 민호(김진수)와 들래(최화정)의 로맨스가 남다르게 다가온 것은 한순간이었다. 두 번의 이혼을 거치고도 어린 여자 헌팅에 혈안이 되어 지내던 민호가 자기도 모르게 빠져든 ‘늙은 여자’에 대한 호감을 감추려 괜한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그 모양을 지켜보던 들래는 다 안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이 사람은 이렇게 외롭구나. 이런 같잖은 짓을 하면서까지 친해지고 싶어 하는구나. 내가 뭐 잘났다고. 나도 아는데, 외로운게 뭔지”라고 말하던 그 미소에 답이 있었다. 서른을 훌쩍 넘기기 전에는 연애가 멀고도 어렵게만 느껴졌다. 타인이 내 삶의 일부를 차지하도록 곁을 내어주고 그의 매력뿐 아니라 결점마저도 직시하며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나라는 사람의 유치하고 어설픈 부분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부담스럽고 두려웠다. 단점 없는 인간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실망하고 상처받을 내 자신을 미리 보호하느라 마음을 닫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뚱뚱하고 뻔뻔하고 머리에는 어울리지도 않는 두건을 두르고 다니는 철딱서니 없는 남자, 객관적으로 보면 대체 어떤 여자가 좋아할까 싶은 민호의 귀여움을. 남들이 보기엔 천덕꾸러기 노처녀지만 뒤늦게 찾아온 사랑 앞에 용감히 뛰어들어 “나이 들어 다행인 건 남의 이목에서 자유롭다는 것”이라며 새로운 삶의 방향을 찾아나가는 들래의 사랑스러움을 말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연인들은 모두 흠잡을 데 없는 선남선녀인 게 아니라 서로의 못난 점을 알면서도 사랑할 만큼 사랑하는 거라는 새삼스런 진리를 그들에게서 배운 셈이다. 그리고 지금 외로운 이들모두, 언젠가는 그런 상대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겨울에도 꽃이 핀다더니 넌 겨울에 피는 꽃이었나 보다”라는 들자 언니의 말씀처럼. – 최지은(<10아시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