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한 여자가 있었고 그녀에게 반한 한 남자가 있다. 남자는 찰나의 순간을 글로써 영원히 기록했다. 일생에 단 한 번일지도,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를 누군가에게 반해버린 그 순간에 대하여.

나는 이미 들어가 있었다

그게 누구든 한순간에 반해본 적이 없다. 다만 몇 번의 순간에 걸쳐 서서히 빨려드는 나를 본 적은 있다. 몇안 번 되 지만, 이제껏 겪어온 내 모든 연애의 시작이 그랬던 것 같다. 몇 년 전 만난 그녀도 마찬가지 순서를 밟으면서 내게 들다어.왔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에 걸쳐 나는 함몰되고 있었다. 서서히 그러나 돌이킬 수 없이.

처음 봤을 때 그녀는 앉아 있었다. 나도 앉아 있었다. 내가 앉아 있는 저편에 앉아 있는 여자. 그녀는 앉은 자그세대로 내 시야에 들어왔다. 우선은 나이가 내 눈에 들어왔다. 내 또래쯤 되어 보인다. 검은색 블라우스에 검은색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와서 앉아 있는 모습. 그녀의 표정도, 그녀 주변을 감싸고 나오는 기운도 검은색이었다. 유난히 흰 피부였는데도 왜 검은색이 보였을까. 나는 왜 검은색을 떠올렸을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느낌은 분명했다. 예사 느낌이 아닌 것이 분명한 그것이 무얼까를 골똘히 생각하기도 전에 한 시간이 지났고 두 시간이 지났고 그리고 한 주가 훌쩍 지나버렸다. 다음 주에도녀 그는 앉아있었다. 나도 앉아 있었다.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그녀 얼굴이 슬쩍 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얼굴이 작다. 그 작은 얼굴에 눈 코 입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모습. 나도 모르게 미인이구나,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생각에 푹 빠지기도 전한에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고 다시 한 주가 지났다.

그 다음 주에도 그녀는 앉아 있었을 것이고 나는 참석하지 않았다. 참석하지 않은 한 주를 포함해 두 주가 지나는 동안에도 내 생활과 생각은 이전과 다를 바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아니면 걸어 다니면서 일을 생각하고 감정을 생각하고 무엇보다 많이 지치고 외롭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영혼이 고갈될 정도로 외롭다는 생각을.

다시 한 주가 지나고 그녀는 앉아 있었다. 나도 앉아 있었다. 도중에 그녀가 일어나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했다. 책상과 의자 사이에서 몸을 빼서 일으키는 그 시간이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다. 마치 모든 시간이 지나가는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다 일어선 그녀의 몸도 비현실적일 정도로 길게 느껴졌다. 청바지를 입은 그녀의 길게 뻗은 다리에 시선을 빼앗겼다가 이내 달아났다. 다른 곳으로 다른 생각으로. 어차피 그것은 남의 몸이니까7. 그리고 마지막 주가 다가왔다. 지난 몇 주 동안 그녀와 나눈 대화는 겨우 몇 마디. 이름만 알 뿐 어디에 사는지 무얼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는 상태. 마지막 모임에서 뒤풀이가 이어졌고 뒤풀이도 거의 끝나갈 무렵 그녀와 나는 우연히 동석했다. 바로 옆자리에 앉아서 한 마디씩 두 마디씩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야기는 다음 술자리를 옮겨서 이어졌고 그녀의 집 앞 놀이터에 가서도 이어졌다. 밤이 새도록. 캔 맥주 두 개를 사이에 놓고 그녀와 나는 꽤 많은 담배를 피웠다. 담배 연기처럼 가늘고 긴 대화가 이어졌다. 대화 도중에 그녀가 내게 물었다. 여자친구가 있느냐고. 나는 없다고 대답했다. 날이 밝아올 무렵 자신의 팔찌가 예쁘지 않느냐고 그녀가 물었다. 나는 예쁘다고 대답했다. 그녀의 가늘고 길고 흰 손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아침이었다. 놀이터에서 집으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오래오래 눈에 담고 돌아서 왔다. 나의 집으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면서 이상하게 가슴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맨 처음 봤을 때 그녀가 왜 검은 빛깔을 띠었는지도 함께 떠올렸다. 간밤에 그녀가 많이 아프다고 했던 말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간밤에 그녀가 자신의 불행을 얘기해서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건 내가 어떤 블랙홀의 입구에 이미 접어들었다는 것을 예감한 탓이 아니었을까. 블랙홀은 블랙홀이 시작되는 지점부터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공간은 물론 시간마저도. 이틀 뒤 나는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한 계절이 지나고 또 한 계절이 시작되는 어느 날이었다. 계절은 이미 내게 들어와 있었다. 내가 이미 그 계절에 들어가 있었다. -김언(시인)

여수의 사랑

버스를 타고 여수로 갔다. 몇 번의 선잠을 왕복하고서야 닿을 수 있는 곳에 여수는 있었다. 오래 사귄 친구와 헤어졌었고, 그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가는 동안에는 마지막 인사를 나누리라 생각했다. 전화 통화 끝에 우리는 헤어졌고, 그것은 함께 보낸 세월에 대한 예의에서 한참 벗어난 짓이었다. 내가 힘껏 사랑했던 여자의 눈을 오래 쳐다보면서 작별을 고하리라 마음먹었다. 마음은 고속도로처럼 쭉 뻗어 있는 것 같았다. 이어폰 속으로 스며드는 타이어의 마찰음이 눈꺼풀을 흔들었다. 그리고 여수였다. 여수의 초입에서 터미널까지는 꽤 긴 거리이다. 멀리 보이는 바다를 둔 길을 지나면 언덕이 나오고 구불구불한 길이 나온다. 눈을 뜨자, 아무렇지도 않은 지방 소도시의 언덕이 보였다. 그토록 눈이 부신 풍경을 다시 보긴 힘들 것이다. 너는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그 후에 나를 만났고, 지금 다시 이곳에서 살고 있지. 내가 미처 알지 못한 네 삶의 흔적이 이 도시 곳곳에 스미어 있겠지. 여기서 작은 등에 커다란 책가방을 메고 처음 학교를 다녔을 것이고, 그리고 교복을 입었을 것이며, 역시나 부루퉁한 표정으로 고등학교까지 나왔겠지. 그리고 지금 이 길을 거꾸로 거슬러 너와 내가 만났던, 낯선 고장에 왔을 것이다. 시간은 왕복이 불가능하고, 나는 이미 여수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너의 심통 가득한 표정을 유독 사랑했다. 일부러 이런저런 식으로 놀리곤 했다. 결국 눈물을 비출 때까지 장난을 치고 내가 사랑하는 네 표정을 보고 속으로 흐뭇해하며 입으로는 미안해, 사과를 하고 곧 다시 간지럼을 태웠다. 너는 웃는 듯 우는 표정으로 방학이면 집에서 동생들과 이렇게 놀곤 한다고 했다. 어린 동생들은 너를 사랑하는 거야. 여수는 너의 고향이고, 너의 집이며, 곧 너니까. 나는 여수에 왔다.

화학공장은 흰 연기를 하늘로 끊임없이 뱉어내고 있었다. 우연히, 다시 이곳에 오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는 매연 같은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이곳을 떠날 수 없구나. 옆자리의 노인이 힐끗거리며 어지러운 표정의 청년을 살폈다. 쭉 뻗었다고 생각했던 내 마음은 백사장의 모래처럼 쉬이 바서졌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온 도시를 나는 결국 사랑하게 되었구나. 그리하여 너와 헤어지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구나. 버스에서 내렸다. 너의 볼 같았다. 여수에 내 살이 닿고 있었다. 약속 장소에 여자는 있었다. 여자는 내가 사랑했던 여자고, 그날로 다시 더 깊게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여자다. 어떻게 지냈냐고 물었다. 잘 지내지 못했다고 대답하길 바랐다. 네 입술이 오물조물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바다를 처음 보는 아이의 심장이 된다. 사실 그날 우리가 나눈 말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구불구불한 언덕길과, 멀리 보이는 바다와 공장의 매연이다. 아름다울 것 하나 없는 그것이 미치도록, 슬프도록, 못 견디도록 아름다웠다. 아름다움은 사랑받아야 하고, 그 아름다움의 연원은 여수였다.

지금 너는 옆방에서 반듯하게 누워, 둥근 배를 쓰다듬고 있다. 태동이 느껴지냐고 나에게 묻는다. 나의 사랑하는 여수는 내 아내가 되어 내 아이를 품고 가끔 부루퉁한 표정을 짓는다. 여기는 일산이고, 우리의 집이며, 당신과 나의 여수다. 나는 영원히…. -서효인(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