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이란 이름은 예명이다. 하지만 그 이름의 단정한 매듭은 차분한 그의 얼굴과 아주 잘 어울려서 다른 이름을 떠올리기 힘들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오늘 촬영 콘셉트는 ‘한 호텔에 잠입한 비밀 요원’이었고, 그는 더 흥미로워졌다.

블랙 슈트와 셔츠는타임(Time). 시계는살바토레 페라가모(Salvatore Ferragamo).

블랙 슈트와 셔츠는 타임(Time). 시계는 살바토레 페라가모(Salvatore Ferragamo).

더블 브레스티드 슈트는 반하트디 알바자(Vanhart Di Albazar).셔츠는 권오수 클래식(Kwon Oh SooClassic). 시계는 살바토레 페라가모.선글라스는 르샵 바이 옵티칼더블유(Leshop by Optical W).

더블 브레스티드 슈트는 반하트 디 알바자(Vanhart Di Albazar). 셔츠는 권오수 클래식(Kwon Oh Soo Classic). 시계는 살바토레 페라가모. 선글라스는 르샵 바이 옵티칼 더블유(Leshop by Optical W).

드디어 드라마 <대풍수>에 당신이 나오기 시작하더군요.
보통 드라마는 한 4부쯤 아역과 성인 연기자들이 바뀌는데, 이번에는 8회부터 시작했어요. 지금은 시청률이 좋지 않은 편이지만, 그동안 잘해준 아역 분의 바통을 잘 이어받아야죠.

시청률에 민감한 편이에요?
음, 민감하다기보다는 시청률은 많은 사람이 중요하게 생각하니까요.

바로 이 시점에 이 작품에 끌린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요?
저는 그래요. 제가 하고 싶은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때에는 저를 필요로 하는 드라마도 있는 것 같아요. 사실은 얼마 전 어떤 기자 분께서 그러시더라고요. 사극에 징크스가 있지 않냐고. 그래서 이번엔 잘해보고 싶어요.

<대풍수>에 왜 지성이 필요하다고 하던가요?
감독님은 이 무게감 있는 사극을 좀 유연하게 풀어줄 배우가 누굴까 생각하다가 저를 떠올렸다고 하시더군요. 저는 <대풍수>가 풍수지리학이라는 소재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드라마가 되었으면 하거든요. 하지만 초반에 잔인하고 무거운 장면이 많아서 그게 좀 아쉬워요. 그래서 작가님, 감독님과 많이 상의하고 있죠.

작품에 대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타진하는 편이에요?
누군가 그냥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 배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배우도 자기 가치관을 갖고, 모든 면에서 자기 연기에 대해 책임감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상의를 많이 해서 거리를 좁혀요. 일단 저는 몸에서 이해가 안 되면 안 움직여서요.

그럼 고민이 두 배로 늘겠어요.
그래서 제가 지금 좀 부담을 느끼고 있죠. 저는 제 캐릭터를 위해 세운 가치관이 있는데, 시청자들도 공감해줄까. 내가 방향을 잘 잡았을까.

아직은 캐릭터의 성격이 명확하게 들어오지는 않더군요.
제가 연기하는 ‘지상’은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어요.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고아로 자라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바르게 쓰지 못해요. 기생들 꼬이고 사람들 사기치는 데 쓰죠. 한마디로 한량인데, 이 한량이 변화하죠.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귀하고 중요한지 깨닫게 되고 이성계를 왕으로 만드는 ‘킹메이커’예요. 또 저는 김소연 씨와 멜로 라인이 있어요. 소연 씨의 예쁜 여성미를 발산하게 해서 드라마를 좀 밝게 만들고 싶어요.

당신도 미래가 궁금해서 점을 보러 간 적이 있어요?
없어요. 저는 안 믿어요. 점을 보는 것은 시행착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 것 같아요. 잘되고 싶은 마음과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요. 그런데, 저는 인생이 힘들었던 과정이 있어서 그런지 그런 건 두렵지 않아요. 항상 좋을 수는 없잖아요. 시행착오를 겪어도 좋으니 딱 하나, 제 본질만 바뀌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기다려요.

이것 또한 지나갈 거라는 담담함인가요?
때로는 속상한 일들이 생긴다는 걸 받아들이고 있어요. 정말 우울증에 시달린 적도 있었거든요. 그래서 매니저와 함께 유럽 여행을 갔는데 그렇게 예쁜 도시들을 봐도 하나도 기쁘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마지막 날, 고흐의 다락방에 갔는데, 그땐 좀 달랐어요.

어떤 마음이었어요?
고흐가 마지막으로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쓰고, 창문 밖을 보면서 자살했다고 하잖아요. 그 의자가 그대로 놓여 있는 걸 보니까 눈물이 나는 거예요. 고흐와 교감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제 주위에도 가슴앓이 하다가 세상을 떠난 분들이 있어요. 가끔은 정말 사람이 이겨낼 수 없는 일들이 닥쳐오는 것 같아요. 그 긴 여행에서 즐거웠던 때는 그 한순간이었어요. 그러고 나서 집으로 향하는 그때의 마음은 어떻게 설명이 안 돼요.

우울해서 떠난 여행인데 결국 우울과 함께 돌아온 셈이네요.
사실 그 여행으로 더 우울해졌어요. 그런데 저도 천생 배우인지, 오자마자 바로 준비하고 시작한 드라마가 <보스를 지켜라>였어요. 유쾌한 드라마다 보니 드라마를 찍으면서 저절로 치유가 됐어요.

그러면 얼마 안 된 이야기군요. <로얄 패밀리> 끝난 후.
네. 작품의 영향도 있었던 것 같아요.

웰메이드 드라마로 호평받았는데, 당신에게는 힘든 작품이었어요?
<로얄 패밀리> 같은 드라마가 가장 촬영하기 어려워요. 대본에 내포되어 있는 어떤 상황과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해야 하는 게 어려웠어요. 인간의 증명에 대한 생각이나 선과 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제 본연의 모습을 자꾸 들여다보고, 증명해야 하는데 그걸 못 하겠더라고요. 그런 상황 자체가 저를 우울하게 만들었어요.

그럼 이제 이런 작품은 하지 말아야겠다 싶어요?
그렇지는 않아요. 이제까지 쉬운 작품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어려운 감독님들과 하거나, 체력적으로 많이 힘든 드라마를 하거나 그래요.

그러고 보니 데뷔한 지 10년이 훌쩍 넘었어요. 정확히는 14년째. 요즘은 어떤 생각을 해요?
마흔까지 3년 남았구나. 그러면 일년에 한두 작품씩만 해도, 한 세네 작품만 해도 마흔 되겠구나. 주인공은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남자 배우는 시간에 따른 선물을 얻는 것 같아요.
요즘은 그런 것 같아요. 예전에는 30대 초반이 되면 주연은 은퇴해야 했죠. 하지만 지금은, 다들 남자 배우는 30대부터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돌아보면 어때요? 당신이 걸어온 길에 만족하고 있어요?
배우를 꿈꿀 때에는 그냥 무대에만 설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때까지 연기를 배운 적이 없었어요. 기본기가 없다는 게 콤플렉스여서 진짜 나를 보여줄 수 있는 여유가 없었던 것 같아요.

언제부터 당신을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뉴하트> 때였어요. 군대 때문에 생긴 공백기가 제게는 좋았어요. 여유로움과 자신감을 줬거든요. 애교 떨고 귀여움 떨고 하는 모습들이 은성이란 캐릭터에는 맞았어요. 그 모습은 사실,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아버지와 싸우고 울고 계실 때 하던 거예요. 진짜 저를 보여주기 시작한 연기. 내 안에 있는 것을 좀 끌어내면서 한 연기를 시작한 거죠.

그만큼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좋은 작품이었다는 이야기도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말하긴 민망하지만, 그런 것 있잖아요. 누굴 돕는 것. 봉사하는 것. 누구를 위하는 것. 어머니는 늘 제게 그래야 한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뉴하트>에서 진심을 담고 연기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그때부터 연기가 정말 재미있어졌고요.

연기를 못한다고 생각했을 때. 그때를 어떻게 이겨냈어요?
십 년 뒤를 봤어요. 제가 이런 작품, 저런 작품을 하는 걸 보고 도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은 못 하는 걸 찾아가고, 공부하는 중이에요. 공부하고 공부하고 공부하다 보면 10년 뒤에 제가 갖고 있는 주머니는 정말 많아질 거고, 그 주머니 속에서 연기를 하면 어떤 배우든 다 이길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고, 롱런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블랙 턱시도 슈트는 존갈리아노(John Galliano).화이트 셔츠는 프라다(Prada). 블랙 앵클부츠는살바토레 페라가모.

블랙 턱시도 슈트는 존 갈리아노(John Galliano). 화이트 셔츠는 프라다 (Prada). 블랙 앵클부츠는 살바토레 페라가모.

새틴 소재 롱코트와 터틀넥스웨터, 슈즈는 프라다.

새틴 소재 롱코트와 터틀넥 스웨터, 슈즈는 프라다.

이제는 영화를 공부하는 셈이네요. 곧 영화 <마이 PS 파트너>가 개봉하는데, 정말 오랜만에 출연하는 영화예요.
2002년에 <휘파람 공주>라는 영화를 찍었어요. 제가 주연이었어요. 그때 무대 인사를 갔는데, 관객이 한 15분 계셨어요. 충격이었어요. 영화 재미있게 봐달라는 이야기가 안 나오는 거예요. 떨리고 눈물이 나올 것 같고요. 그때 생각했어요. 100분의 러닝타임을 끌어갈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는 없다. 누군가 만들어준다고 영화를 하는 거, 창피하지 않나.

하지만 다들 그렇게 시작하지 않나요?
드라마로 시작을 해서인지, 어떤 영화의 주연으로 선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을 했어요. 영화는 당분간 생각하지 말자, 영화를 할 때는 조연부터 하나씩 하나씩 하자고 마음먹었죠. 그래서 김대승 감독님의<혈의 누>를 한 후에 군대를 갔죠. 저는, 영화에서는 신인이에요. 그럼 이번 영화는 아주 어렵게 고른 영화라는 건데요. 어렵더라고요. 이번 작품도 처음에는 저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재미있게 읽었지만 감성이 맞지 않았어요. 좀 과했어요. 모든 표현이.

19금 코미디라서요?
<러브&드럭스>라는 영화를 무척 재밌고 아름답게 봤어요. 예쁘고 잘생긴 남녀 배우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스토리 자체가 현실감이 느껴지는 게 좋았어요. 우리나라에도 그런 영화가 더 많아져야 하지 않나 싶어요. <내 아내의 모든 것>도 정말 재미있게 봤거든요. 그래서 감독님에게 물었어요. <러브&드럭스> 같은 영화를 만들어줄 수 있겠느냐고. 그렇게 갈 거다. 하셨고 그럼 해보겠다고 했죠.

<마이 PS 파트너>의 방점은 PS에 찍혀 있겠죠. ‘폰섹스’의 줄임말.
누가 그러더라고요. ‘PS’가 뭐냐고, ‘추신’ 아니냐고.

영화 안 찍는 지성이, 처음으로 섹스 코드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했죠. 영화를 봤다면 질문할 게 너무 많아서 몇 시간도 모자랐을 거예요.
그래서 이야기를 안 하고 싶어요. 그냥 몰입해서 쭉 봐야 하는 영화예요. 이건 정말 봐야 해요! 하지만 영화는 저를 겸손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영화 앞에서는 황급히 겸손해지는 배우라뇨!
‘대박이에요!’ 이렇게 얘기를 못 하겠어요. 자꾸 웃음만 나와요. 저도 왜이러는지 모르겠어요. 부끄러워지네요.

좋아요, 그럼 다음 영화에 대한 계획을 이야기하죠. 다음에는 어떤 작품을 하고 싶어요?
<숙명>에 특별 출연했을 때 그런 생각으로 연기를 했어요. 나중에 등을 칠 거라는 것을, 눈빛으로만 표현을 하자. 그러고 나니까 연기를 하고 나니까 제가 연기를 안 한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악한 역할을 한 적이 없네요, 당신은.
영화에서 해보고 싶어요. <이웃사람>과 <나는 살인범이다> 시나리오를 받았었는데, 그 살인범 역할을 정말 하고 싶었어요.

왜 안 했어요?
<나는 살인범이다>는 스케줄이 겹쳤고, <이웃사람>은 여학생을 죽이고 토막 살인하는 그 장면이 싫었어요. 아무리 연기라도 저는 그건 못해요. 이번 <나의 PS 파트너>에 정사 신이 나오는데 그것도 제가 적극적으로 해야 했다면 못 했을 거예요. 주인공이 굉장히 수동형 인간이라 가능했죠. 그 여자친구가 리드를 하거든요. 그래도 굉장히 힘들었어요. 여배우를 챙겨주는 것보다 누가 나 좀 챙겨줬으면 싶을 정도였어요.

수동적인 남자주인공이 나오는 로코물이라는 거죠?
얼마나 찌질한지 몰라요! 그 과거의 여자친구는 ‘벤츠남’에게로 떠나는데 잊지도 못해요. 그러다 우연히 술에 취해 자다가, 전화가 와서‘누구세요?’ 하고 받았는데 갑자기 신음소리가 들리면서 모든 게 시작이 되죠. 그 초반의 대사가 정말 재미있어요.

만약에 이 작품이 한 몇 년 더 빨리 왔다면?
감히 못 했을 것 같아요.

연예인 같지 않다는 건, 당신에게 칭찬이에요?
칭찬이에요. 그러고 싶어요. 저는 연예인 같은 사람들이 싫어요. 같은 연예인으로서 저렇게는 하지 말아야지 싶은 모습을 자주 봐요. 그렇게 살면 나중에 외로울 것 같아서요. 그 평범함을 다 잃어버리고 살면 정말 난 죽을 때까지 다른 누군가의 옷을 입고 살아가야만 될 것 같아요. 단추를 계속 잠가놓으면요, 못 풀어요. 절대로 못 풀어요. 그래서 일 끝나면 최대한 제 생활로 돌아오려고 노력을 해요.

어떤 노력을 해요?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사는데, 여동생이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는 거예요. 내가 버릴 테니 달라고 했어요. 말리더라고요. 저희 집 옆에 박유천이 살아서 집 앞에 항상 사람들이 많거든요. 가족들이 절 생각해서 그런다는 걸 알지만 전 그 지점이 싫더라고요. 그래서 억지로 뺏어서 제가 버렸어요. 가족의 그런 배려를 당연시 여기는 순간부터는 저는 평범하게 돌아가기 어려울 것 같아요.

화보를 촬영하는 당신과 인터뷰하는 당신은, 정말 달랐거든요.
아까 옷 갈아입으니 동네 오빠로 변신했다고 말했잖아요. 저는 그 말이 좋았어요. 평상시에는 저는 진짜 옷을 안 차려입어요. 일부러 그렇게 해요. 그래서 사람들이 평상시의 지성에게 좀 실망하더라도, 그 실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해요.

무대인사에 대한 트라우마를 이야기했는데, 이번엔 어떨 것 같아요?
많은 사람이 와서 앉아 있으면, 정말 감사한 마음, 영화 재미있게 봐야 하는데 하는 마음일 것 같은데요. 다시 부끄러워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