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구에서 남자와 평화롭게, 때론 뜨겁게 공존하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은 섹스, 연애, 우정, 재테크, 패션, 그루밍을 가리지 않는다. 남자에 대해 뭐 이런 것까지 알아야 할까 싶은 것까지 세세하게 끌어 모은 <얼루어>의 남자 대탐구.

남자의 술

‘남자 = 술’이라는 등호에 반기를 든 남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물론 누군가는 여전히 술을 마신다.

술 끊었다
“왜 술 안 마셔?” 사람들은 묻는다. 마치 모두가 술을 마셔야 하는 것처럼. 사람은 때로 자신의 선택에 집착한다. 내가 그렇다. 술을 끊을 것을 선택한 지 3년이 되어가는 지금, 내게 금주는 진한 술보다 더욱 끊을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다. 계기가 없는 건 아니다. 2009년 겨울, 당시 군인인 나는 학교 앞에서 거나하게 취했다. 자고 가라는 친구를 뿌리치고 택시에 몸을 실었다. “부천이요.”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며 잠을 청한 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기사님이 짜증스럽게 나를 깨웠다. 미터기에 찍힌 금액은 3만8천원. 지갑 속 현금은 고작 1만2천원이었다. “아저씨 이 지갑 비싼 겁니다.” 지갑을 아저씨에게 던지고 냅다 달렸다. 다음 날, 방문을 열고 엄마가 다급히 들어왔다. “너 경찰서로 오래.” 그 뒤로 술을 끊었다. 그냥 뚝 끊었다. 그렇다고 술자리를 피하는 건 아니다. 술을 먹지 않아도 분위기 맞춰가며 재미있게 노는 법을 알게 됐다. 심지어 술을 안 마시는 사람으로서의 삶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술 취한 친구들을 차로 데려다 주면서 백미러에 비친 소리지르고 부둥켜 안고 사랑한다고 외쳐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귀엽기도 하다. 치킨에 맥주, 회 한 점에 소주가 그립다가도, 몸을 가누지 못하고 널브러져 있는 취객을 볼 때면 역시 술 안 마시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늦은 밤 친구와 동네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잔 기울이던 낭만은, 함께 ‘짠’을 하면 그만이다. ‘술’은 어쨌든 사람의 방어기제를 내리고 진솔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니까. 친구가 진솔해지는 순간까지만 최선을 다한다. 나머지는 친구 스스로 몫이다. 술 말고도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이제 금주는 ‘신념’이 됐다. 술을 마셔내 자신을 통제하지 못할 바에야 좀 더 제 정신으로 살고 싶었다. 나는 여전히 술 마실 생각이 없다. 어쩌면 남들 다 마시는데 혼자 안 마신다는 재미에 빠진 걸 수도 있고. – 김기재(프로덕션 MI 제작PD)

술 마신다
최근 친구들하고 만나면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는 하나. “요새는 담배 피우는 사람이 소수인 것 같아…”. 최근 친구들하고 만나면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 둘. “요새는 술 마시는 사람이 소수인 것 같아…”. 못난 흡연자들과 음주중독자의 같잖은 푸념처럼 느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실이다. 확실히 요새 한국의 사회정책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음식점이나 대로변에서 담배를 못 피우게 한다거나, 주폭을 척결하자는 플래카드가 나부낀다거나, 교내 음주를 규제하는 법률을 만들겠다거나… 물론 간접흡연이 더 안 좋다는 것이나 잔뜩 술에 취해 길거리에서 천하의 얼간이 짓을 하는 놈들이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우리도 별로라고! 도대체 어디에서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놀란 말이냐! 그렇게 깨끗한 공기에서 살고 싶으면 우선 자동차 배기가스나 더 줄이고, 룸살롱에서 2차를 외치는 이들부터 규제해야 하는 것 아니냐! 아무리 생각해도 땅 짚고 헤엄치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지워지질 않는다. 더욱 통탄할 일은 점차 친구들 중에서도 술을 마시지 않거나 담배를 안 피우는 녀석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본인의 선택은 존중한다. 하지만 존중은 하되 아, 아무래도 견딜 수가 없다. 술에 취한 네가 나에게 내뱉은 그 수많은 말들이 내겐 얼마나 재미있고 즐거운 정보였는데! 네가 옆 테이블 사람과 시비 붙던 광경이 내겐 얼마나 즐거운 강 건너 불구경이었는데! 무엇보다 가끔씩 풀린 눈으로 바보처럼 실실 쪼개던네 멍청한 웃음이 내겐 얼마나 큰 평화였는지를 너는 모른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얼마나 좋은 사람이건 내겐 중요하지 않다. 나는 착하고, 배려 깊고, 따뜻하게 말하고, 언제나 비폭력적인 너보단 나와 같은 입냄새를 풍기며 술에 취했다는 것을 핑계로 화를 내고, 분노하고, 울고 짜고, 욕하고, 한번씩은 남들 앞에서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얘기해주던 네가 더 좋다. 세상이 주정뱅이들을 비난하더라도 흔들리지 말자. 있는 그대로, 가끔은 풀어지면서 좀 살자고. 이 사람들아. – 단편선(뮤지션)

자동차를 보는 세 가지 시선

남자들이 자동차를 사랑하는 이유는 사실 이렇다. 늘 새로운 자동차를 탐구하는 에디터의 최종 분석.

간단하고 오래된 현상이다. 하지만 종종 도를 지나치기도 한다. 맞닥뜨리면 당혹스럽고 황당하며, 결국 ‘남자’의 어떤 가련함에 대해 생각해보게도 되는 얘기. 자동차를 둘러싼 남자들의 마음은 상추처럼 담백하다가, 뭘 어떻게 도와줄 수 없을 정도 수준까지 가기도 한다.자동차를 애정 어린 이동수단으로 보는 경우는 평범하고 보편적이다. 두 명의 자녀가 있고 연봉은 이래저래 8천만원 가까이 받으면서 중고 쏘나타를 산 대학 동기가 여기 해당한다. 94년식 기아 프라이드를 애지중지 가꾸고 휠까지 수입해가며 타는 30세 남자도 있다.

이들은 자동차에 대한 기본적인 애착이 있고, 운전을 즐기며, 자동차의 기계적 세부에 대한 관심 역시 갖고 있다. 레고를 조립하는 집중력으로 자동차를 생각하는 날도 있다. 혼자 할 수 있는 튜닝은 직접 한다. 과하지 않은 취미, 목적에 충실한 소비다. 하지만 애착이 과한 나머지, 자동차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남자들도 있다. 자동차의 정체성이 곧 자기 정체성이며 브랜드의 공인된 품질과 이미지로부터적잖은 위로를 받는 경우다. 물론 반대편엔 작고 평범한 차를 타면서 위축되는 남자가 자리한다. 둘은, 근본적으로 같은 남자다. 한쪽은 차에 쓸 돈이 있고 다른 한쪽은 없을 뿐(이 차이가 꽤 큰가?). 하지만 결국 둘 다 공허하고, 자주 의존적이며, 차에 흠집이 나면 몸에난 흉터처럼 안타까워하다 상처까지 받는다. 세상에는 어딘가 부족한 것 같은 남자를 안아주는 데서 정체성의 위로를 찾는 여자도 있으니, 둘은 당분간 괜찮은 연애를 할 수도 있을까?

하지만 누구나 사랑과 관심을 갈구한다 해도, 그런 마음을 혼자서 어쩌지 못하는 남자를 상대하는 건 피곤하다. 자동차를 여자로 보기 시작할 때, 욕망의 양상은 더 다채로워진다. 여자의 허리, 그 사이에 파인 골, 혹은 가슴, 그리고 그 둘을 모았을 때 생기는 또 다른 골.허벅지 안쪽을 쓰다듬거나 또 다른 어딜 만지는 심정으로 자동차의 표면을 쓰다듬는 경우. 있을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선 람보르기니의 직선보다 페라리나 포르쉐의 곡선이 자극적이다. 갖고 싶지만 쉽게 그럴 수 없다는 점, 어떤 자동차의 곡선이 들고 나는 방식은 그대로 여자와 같다.

인피니티 수석 디자이너 시로 나카무라는 소유욕을 자극하는 자동차를 만드는 데 요염한 여자의 몸은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예쁜 여자와 헤어지면서 나도 모르게 안아주는 심정으로 자동차 회사 전시장 쇼윈도를 응시하는 마음에 왜곡은 없다는 뜻이다. 그럼 이 50대 남자의 경우는? 남자는 부자였다. 몇 개의 상가와 건물을 갖고 있다. 차고엔 포르쉐 911과 아우디 R8, 메르세데스 벤츠 S클래스가 있다. 몇 대 더 있었는지도 모른다. 와인 몇 잔을 거푸 마신 그가 말했다. “사실, 저는 말입니다. 자동차는 여자라고 생각합니다. 진짜 여자 말입니다. 제가 밤에 가끔 혼자 타는데요, 기분 진짜 좋습니다. 속옷 바람으로 탑니다. 팬티만 입고요. 아… 좋습디다.”

“그럼, 발기하십니까?” “…그, 그럴 때도 있고요.”

자동차를 여자에, 운전을 섹스에 비유하는 건 클리셰다. 진부하지만 유효하다. 하지만 자동차에 여성성을 부여하는 것과,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여자를 만질 때와 정확히 같은 식으로 피가 몰리는 건 궤가 다른 얘기다. 이 남자의 욕구는 어디를 향하다가 어디서 좌절됐기에 거기서 풀리는 걸까? 와인잔을 내려놓고, 결국 이런 생각까지 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건 자본주의와 소비의 영역을 벗어난 얘기다.

자동차는 결국 소유하는 것이다. 소유와 소비의 결을 몇 가지로 구분하는 건 폭력이라는 걸 안다. 고양이가 그런 것처럼, 남자를 뭉뚱그릴 순 없으니까. 하지만 차를 소유한 어떤 남자들은 일반적인 애착의 범위를 벗어나, 또 다른 세계에 있다.
글 | 정우성( 피처 에디터)

스포츠는 나의 영웅

스포츠 경기를 몇 시간이고 잠자코 보는 남자가 답답한가? 이해해주길. 스포츠는 그의 영웅이니까.

남자는 자라면서 무수한 스포츠에 빠진다. 나는 20년 동안 축구에 빠져 있었고, 그래서 유학도 이탈리아로 갔으며 축구 전문 칼럼니스트로 밥도 먹었지만 좋아하는 스포츠는 너무나 많고 다양했다. 86년 아시안게임부터는 유남규가 되겠다며 탁구채를 안고 살았고,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때는 마라도나와 로베르토 바조처럼 되고 싶었다. 91년부터는 그 대상이 마이클 조던으로 바뀌어 ‘마이클 조던처럼 키가 크고(198cm) 그처럼 빠른 다리와 점프능력, 그리고 정확한 점프슈팅을 주세요’라고 주말마다 성당에서 기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물론 응답은 오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부모님을 들볶아 에어 조던을 신고 에어 조던 트레이닝복을 입는 것과 신문에서 AFKN 중계표를 보고 시카고 불스 경기 일정을 확인하는 것, CNN스포츠 뉴스를 보는 것, 그리고 NHK에서 새벽 1시부터 3시까지 하던 중계 재방송을 시청하는 것뿐이었다.

NFL 시즌 막바지에는 NBA 중계가 적어서 슬펐다. 아무튼 내 스포츠 시청자 인생에는 수많은 영웅이 있었다. 김병지, 베르캄프. 마누엘 루이 코스타와 안드레아 피를로. 그들을 떠올리며 군대에서도 축구를 했다. 지구상에 약 35억 명의 남자가 있을 것이며, 대한민국만 해도 2천5백만 명의 남자가 있다. 그들이 왜 스포츠에 빠져드는지 설명하기란 매우 어렵다. 경우의 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 남자는 이런 경로로 스포츠에 빠지게 된다. 어린 시절의 영웅. 어릴 적엔 그렇게 되고 싶은 위인이고, 성장한 후에는 ‘내가 하고 싶은 모습을 보여주는 선수’들이 내 꿈을 대신 실현해주는 대리 만족인 것 같다.

이탈리아에 있을 때 “남자들이 축구에 열광하는 이유는, 수많은 평범한 남자가 직장과 가족에 치여 신체능력과 남성상을 상실해가는 와중에, 땀 흘리면서 근육을 움직이고 극한의 체력적 고통을 이겨내며 경기를 하고 경쟁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라는 광고 문구를 보고 동의할 수 있었다. 티비나 경기장에서 지켜보는 선수에게 어느 순간 나 자신을 덧씌우는 것이다. 이것은 남자들에게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모습을 눈앞에서 재생해주는 또 하나의 ‘판타지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릴 적 남자 아이들이 축구공을 차고, 야구방망이를 잡고, 농구공을 잡는 이유는 어른들처럼 ‘운동’이 목적이 아니라 그 종목이 재미있고, 그 선수들이 하던 것을 자신도 해보고 싶은 욕구에서 출발했을 거라 생각한다.

추측을 하자면 스포츠는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놀이’이고 그 놀이에서 본인이 실현하고 싶어 했던 동작에 더 가까이 다가가면서 그 매력에 빠져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동작을 완벽하게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이란 것을 알게 되어도 그것을 눈앞에서 보여주는 선수들에게 동질감을 느끼면서 스포츠에 더 빠져들고 소위 ‘환자’ 내지는 ‘신자’가 되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식으로 스포츠에 빠지는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농구장이나 야구장의 치어리더를 통해 스포츠에 빠질 수도 있고, 스포츠 방송사의 여자 스포츠 아나운서를 통해 그 스포츠에 빠질 수도 있기도 하다. 어찌 보면 여자 앞에서 축구든 야구든 ‘그깟 공놀이’ 일 뿐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내 눈에 고준희, 문채원보다 더 예뻐 보이는 정인영 아나운서를 보기 위해 KBSN을 열공 중인데 역시 그녀를 보기 위해서라면 축구, 야구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느 날, 한 축구 기자가 내게 중증이라고 말했다. 나는 답했다. “축구라는 그깟공놀이는 그분을 영접하기 위한 도구일 뿐”. 이런 식으로 스포츠에 빠져드는 남자들이 매우 많아진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글 | 이건철(칼럼니스트)

오늘도 한 게임

직업, 차, 집, 여자친구. 모든 걸 가진 남자가 여전히 게임을 하는 이유. 88올림픽이라는 거국적 사건이 있은 다음 해 사촌형 집에서 게임을 접한 후 나는 곧바로 게임의 길로 빠져들었다. 그 이후, 자라면서 그때의 정서에 맞는 책을 고르듯 나는 게임을 골랐다. 음울하던 사춘기 시절에는 ‘퀘이크’와 ‘둠’에, 사회에 불만이 많을 때는 슈팅게임인 ‘레인보우 식스’에 빠졌고, 지금은 온갖 슈퍼카에 탑승할 수 있는 레이싱 게임을 한다. 고백하건대 나는 한 번도 게임과 멀어진 적이 없다. 게임을 위해 컴퓨터 사양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비디오카드를 교체한 뒤 빨라진 속도에 신이 나 추석 연휴 내내 게임을 한 적도 있으며, 지금도 여자친구를 만나지 않는 날이면 컴퓨터 앞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 쾌적한 게임을 위한 27인치 대형 모니터는 필수다.

30대 중반에 돌입한 지금까지도 내가 계속 게임을 하는 이유? 게임은 남자가 일상에서 가장 쉽게 승부를 가릴 수 있는 행위다. 순위와 대전결과, 스테이지 등 수많은 지표가 나의 성공과 실패 여부를 즉각 알려준다. 그리고 알다시피, 승부욕은 남자의 핵심 특성이다. 많은 남자가 복잡한 조작키에 머리를 써야만 하는 ‘스타 크래프트’에 10년째 열광하는 이유는 진입 문턱이 높기 때문이다. 스타 앞에서 남자의 승부욕은 불타오르는 반면 여자들은 ‘이렇게까지 힘들게 게임을 해야 해?’라고 생각한다. 많은 여자가 게임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지만 게임을 찾는 가장 원초적인 이유인 재미만 충족된다면 게임은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니다. 예술 취급받는 영화 역시 재미와 감동이 없다면 시간 낭비 아닌가?

그리고 무엇보다 게임은 간편하다. 축구나 야구처럼 한 판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연락할 필요도 없고 게임 속에서 내가 죽든, 총기난사를 하든 게임 밖으로 나오는 순간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게 된다. 게임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그 차단성, 완벽한 ‘가상세계’란 점에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을 혼동하는 순간부터 ‘게임폐인’의 비극이 시작된다. 게임 속의 관계가 현실의 관계보다 중요하게 느껴지고 게임에서 졌다고 해서 그 분노가 일상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크다면, 그건 문제다. 하지만 대부분의 멀쩡한 남자들은 이 당연한 사실을 직시하고 게임을 한다. ‘‘디아블로’의 ‘악마를 무찌른다’면서 으쓱해하는 약간의 대리만족을 느끼면서 말이다.

이번 주말에도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을 할 거다. 부카티 베론을 타고, 신호를 위반하며 갓길로 마구 달릴 테다. 참, 난이도 설정은 낮은 편이 좋겠다. 그래도 지면 열 받으니까. 글 | 최도철(프레젠테이션 플래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