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만 듣던 텃밭농사라는 게 어떤 건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 요리연구가 차유진의 텃밭을 찾았다. 동글동글 그녀를 닮은 호박과 가지가 영글어가는 그녀의 글과 요리처럼 따뜻한 풍경 속에, 어느덧 2년 차 농부인 차유진이 서 있었다.

1. 작지만 탱글탱글한 양배추와 피망, 그리고 비트. 2. 선연한 자홍색의 비트수프.

차유진의 텃밭에 도착한 건 공교롭게도 사상초유의 태풍 볼라벤이 도착하기 하루 전날이었다. 서울에서 그녀가 사는 여주까지의 거리는 한 시간 반.컵 밑바닥에 가라앉은 보리차 가루처럼 묘하게 차분한 공기와 습기를 머금어 축축해진 바람이 나를 맞이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텃밭을 구경하고 직접 만든 음식까지 맛보고 돌아가겠다는 내 의지가 꺾이지는 않았다. 오늘은 지난 9월, 여주로 이사한 뒤 두 번째 가을을 맞이하는 차유진이 가을 모종을 심는 날이니까. 그나저나 유난히 가물었던 봄, 폭염의 여름을 겨우 지났더니 이제는 TV와 라디오 모두 호들갑을 떠는 태풍이라니. 2년 차 농부 차유진에게는 참 다사다난한 한 해였을 터. 우리의 첫 대화가 날씨에 관한 것은 당연했다.

“첫해 농사인 만큼 올해는 온전히 땅의 힘만 믿고 한번 방치하듯 키워보려고 했어요. 봄에 비만 제대로 왔으면 좋았을 텐데, 지독하게 가무는 통에 아침저녁으로 물을 댈 수밖에 없었죠. 더위도 어찌나 극심했는지 햇볕을 좋아하는 타임, 오레가노, 세이지 같은 허브들도 말라 죽고 말았고요. 아무래도 초보자다 보니 식물이 어떤지는 보여도 땅까지는 보이지 않더라고요. 그래도 괜찮아요. 준비해서 내년에 제대로 하면 되니까요.”

1년을 열심히 일하고도 또 다음 해를 기약하는 것이 농사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차유진은 이미 훌륭한 농부다. 9월을 맞이해 오늘 그녀는 로메인, 루콜라 같은 샐러드 채소, 그리고 엄마를 위한 김장배추를 심을 예정이다. 무더위에 장렬히 전사한 허브도 다시 한번 심으려 한다. 집 주변에 공터만 있으면 밭을 만들던 할머니, 할아버지와 10년 넘게 함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농사에 문외한인 나는 가을에도 파종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해 그저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이런 게 이모작이라는 건가? 두리번두리번 밭을 둘러보는 사이, 부엌으로 들어간 그녀는 어느새 커다란 광주리를 품고 나온다. 흘깃 보기에도 작지만 야무지게 생긴 비트와 제법 튼실한 호박, 그리고 양상추와 파프리카가 한데 구르고 있다. 모두 올봄에 심어, 갓 밭에서 거둔 그녀의 첫 농작물이다.

그러고 보니 10평 남짓하다는 이 작은 밭에서 자라고 있는 것이 참 많기도 하다. 붉은빛 꽈리고추, 청양고추, 줄기에 매달린 방울토마토가 영글어가고 오이와 가지, 한껏 꽃을 피운 차조기잎도 보인다. 처마 밑에 일렬로 놓인 화분에서 자라고 있는 치커리와 셀러리 같은 각종 샐러드 야채까지. 도무지 초보 농부의 솜씨로 생각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영국 유학 시절에도 하숙집 앞마당에 허브와 콩, 작은 당근을 키우긴 했어요. 지금 집 근처에 오래전부터 외가 친척들이 살고 있어 도움을 받고있기도 하고요. 사실 잘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자신감이 조금은 있었던 것 같아요. 농사짓는 분들이 늘 하시는 말씀이‘자 식 돌보듯 사랑을 줘야 한다’는 거예요. 식물을 대하는 마음가짐, 그게 제일 중요하대요.”

귀농, 혹은 도시농부를 꿈꾸는 이들 중 일부는 텃밭농사라고 하면 씨를 뿌린 후 짬 날 때마다 마당에 나가 틈틈이 물을 주고 돌봐주면 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마치 주말농장을 다니거나, 학창시절 교실에서 강낭콩과 수세미를 키우던 때처럼 말이다. 하지만 지난 1년 동안 서울과 여주를 오가며 차유진은 그야말로 농부처럼, 절기에 따른 삶을 살았다. 가을 추수를 갈무리한 후 겨울에는 오는 봄에 심을 굵고 튼튼한 씨앗을 따로 빼놓고, 굵은 돌을 골라내고 퇴비를 섞으며 땅을 야무지게 만들었다 .

2월에 감자로 시작한 각종 채소의 파종은 5월 초까지 이어졌고, 모종을 심은 후에도 싹이 트면 간격 유지를 위해 계속 잎을 솎아주고 오이와 토마토, 고추를 위한 지지대도 만들어야 했다. 눈만 잠깐 돌려도 잡초는 계속 올라왔다. 한창 농작물이 자랄 5~7월은, 오히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다는 얄궂은 사실을 아는지? 낮의 불볕 태양을 피하려면 새벽 5시에 일어나 정오가 되기 전까지 부지런히 움직이고, 오후 느지막이 다시 밭으로 나가서 해가 떨어질 때까지 일을 해야 했다. 불빛 없는 깜깜한 시골의 밤은 소리소문도 없이 다가오니까. 비가 오지 않으면 물을 주고, 비가 오면 그 전날 미리 비료를 뿌렸다.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 농사다.

마당에 무작정 무언가를 심기 전에 삶에 변화를 주어야겠다는 정도의 각오로 덤벼야 한다고 그녀는 말한다.“ 요리를 하는 사람이라면 식재료를 직접 재배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씩은 있을 거예요. 하지만 마당에 무언가를 심기 전에 대형 마트나 유통업체가 제공하는 식재료에 대해 의문을 갖고, 익숙했던 생활 패턴에서 벗어나야겠죠. 텃밭보다는 화분 하나로, 일단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텃밭에서 거둔 재료를사용해 차린 한 상. 테이블을장식한 차조기잎도 그녀가직접 기른 것이다.

주변에 편의점 하나 없어 때로는 맥주 한 캔이 절실하고, 여름철의 벌레, 지하수가 어는 겨울이면 가늘어지는 물줄기 등 낯설고 불편한 시골의 밤은 수확의 기쁨에 비하면 견딜 만하다.

“좀 못생기긴 했어도 내가 기른 오이를 딸 때, 첫 수확물로 요리를 만들 때, 그 뿌듯하고 행복한 기분을 아세요? 자연은 신기해요. 허브의 키가 쑥 자라고 화단에 심어놓은 꽃이 순식간에 무성해지고. 아침에 눈을 뜨고 나와 보면 예상하지 못했던 보람찬 순간을 불쑥불쑥 선사해요. 셀러리와 파프리카, 호박도 열매는 작지만 하나같이 달고 맛있었어요. 마치 가뭄을 이겨내고 핀 꽃의 색깔이 더 짙고 아름다운 것처럼요. 내가 너희를 고생시켰구나, 그런데도 이렇게 잘 자라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죠.”

차유진은 비료나 농약 없이 밭을 가꿨다. 땅의 기운을 듬뿍 머금고 자란 재료로 만든 음식에 대한 호기심을 더 이상 누르기 힘들 무렵, 오븐에 구운 야채 라타투이와 허브 치킨 소테, 오이와 연어알이 듬뿍 들어간 마요네즈 샐러드, 비트수프 등이 차례로 테이블에 오른다. 선명한 자줏빛이 촬영 내내 식욕을 자극했던 비트수프부터 한 숟갈 떠서 입에 넣는다. 아, 이토록 포슬포슬하고 부드러운 맛이라니! 축축한 공기를 마시며 몇 시간씩 움직이느라 눅진해졌던 몸의 피로가 풀리는 상냥한 맛이다. 포크를 든 손은 자연스레 주황, 노랑, 빨간색의 파프리카와 호박, 셀러리가 먹기 좋게 구워진 라타투이로 향한다. 텃밭에서 갓 거둔 뿌리채소들의 맛이 정직하게 하나하나 내 몸에 새겨지는 기분이다.

마요네즈 샐러드의 싱싱한 오이와 톡톡 튀는 연어알의 식감을 만끽하고 있을 때 정신이 번뜩 들게 한 것은 허브 치킨 소테다. 특별히 색감이 화려하지도 않고, 유난히 많은 재료가 들어간 것 같지 않은 소테는 이전 음식의 맛을 잊게 할 정도로 진하다. 뭘 넣은 건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허브와 와인, 닭, 마늘에서 우러 나온 맛이에요. 재료가 몇 개 안 되는 요리라는 걸 믿기 어렵죠? 소스처럼 국물에 빵을 찍어 먹어도 좋아요.” 맛있는 음식은 대화를 부르고, 부른 배는 사람을 느긋하게 만든다. 태풍 전야의 공기는 여전히 기묘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지만 피곤함과 걱정은 물러간 지 오래였다. 집 앞마당에 펼친 접이식 테이블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 처음 도착한 순간부터 품었던 질문을 그녀에게 던졌다. 지금의 삶에 만족하냐고. 돌아온 대답은 조용한 수면처럼 잔잔했다.

“밭일을 마치고 해가 넘어가는 것을 보면서 한숨 돌릴 때, ‘이 정도면 괜찮은 삶이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마냥 외로울 것 같지만 혼자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그런 시간이 사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하거든요. 하지만 도시는 그런 여유를 가질 틈을 주지 않죠.”
다행히도 태풍은 예상보다 조용히 그녀의 텃밭을 지나갔다. 그리고 지금쯤 그녀의 텃밭에서는 갓 심은 채소가 제자리를 찾고 분주하게 자라나고 있을 거다. 그녀의 말처럼, 땅은 강하니까.

1. 무성하게 자란 차조기잎.일본 깻잎, 혹은 ‘시소’라는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2. 담벼락을 따라 자란 딸기.여름이면 빨간 열매가 줄을이룬다. 3. 붉게 익어가는방울토마토의 생명력.4. 토란은 추석에 캐서토란국을 끓일 예정이다.5. 요리연구가이자 2년차 농부인 차유진. 6. 진한풍미를 자랑한 허브 치킨 소테. 7. 화분에서 자라고있는 세이지와 로즈마리. 8. 파종을 앞두고, 차유진은곱게 흙을 갈았다. 9. 게맛살을 넣어 식감을 살린마요네즈 샐러드.

차유진의 네타스키친

요리가 소통의 매개가 되기를 바라는 차유진이 요리가 있고 장이 서는 공간을 만들었다. 동교동에 자리한 네타스 키친은 쿠킹 스튜디오인 동시에, 그녀가 직접 길러 만든 조림과 통조림 올리브를 이용한 절임 등 음식과 소스를 판매하는 마켓이 될 예정이다. 찾아오는 사람만 찾아오게 되는 쿠킹 스튜디오와 달리 지나가는 이도 들를 수 있는 마켓에서 많은 사람이 좋은 음식, 건강한 음식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녀의 바람. 이 흥미로운 키친에 대한 소식은 www.netaskitchen.com에서 체크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