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정아의 아름다움을 수식하는 말은 많다. 눈매의 모던함, 큰 키에서 오는 시원함, 여느 여배우 같지 않은 솔직함. 그 모든 것을 증언하는 그녀를 만났고 배우로서 기억되기만을 바라는 이 배우의 진짜 축은 단순한 열정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처럼, 그 정제된 단순함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웠다.

 

케이프 장식 드레스는마쥬(Maje). 장갑은 DVF.시계는 CK 워치(CK Watch).

케이프 장식 드레스는
마쥬(Maje). 장갑은 DVF.
시계는 CK 워치(CK Watch).

염정아는 말을 길게 하지 않는다. 할 말을 꾸미는 건, 모두가 듣기 좋은 말을 해야 했던 90년대에도 하지 않았던 일이니까. 그래서 그녀와의 인터뷰는 마치 핑퐁 게임처럼 이뤄졌다. ‘핑’하고 질문을 던지면 ‘퐁’하고 받는 식이었다. 촬영장에서 완벽한 포즈로 사진가와 에디터를 감동시켰던 여배우는, 처음처럼 모든 메이크업을 지우고 흰 티셔츠와 검정 쇼츠 , 편한 슬리퍼 차림으로 다시 변해 있었다. 그게 그녀였다. 배우를 꿈꾸던 소녀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공식 미녀를 지나 한국 영화 황금기 한 가운데에 서 있었던 여배우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염정아다. 단 한 번도 자신감을 잃은 적이 없었고, 지금까지 늘 자신감에 차 있었던 그녀니까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의 자신감은 바로 내가 완전히 나 자신일 수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크게 웃는 게 너무 예쁜데, 계속 무심한 표정만 촬영해서 어쩌죠?
딴 데서 하죠 뭐! 그런데 정말 괜찮아요? 원래는 진한 메이크업을 안 좋아해요. 평소에도 기초화장만 하고 다니니까.

붉은 립스틱은 여배우의 상징 같은 것이죠. 그러고 보니 그런 모습으로 출연한 작품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그나마 <범죄의 재구성>, <장화, 홍련> 때 조금 보여줬었나요? 저도 진한 화장은 조금 센 캐릭터를 할 때나 해봐요.

당신은 2000년대 초 한국 영화 황금기의 중심에 선 여배우였어요 . 지금도 회자되는, 굉장한 역할을 다 당신이 했죠!
좋은 작품이 많았죠. 또 그런 작품에 출연했었고. 요즘은 여배우가 할 작품이 너무 없어졌어요. 그때 찍은 영화는 다 좋았어요.

어떤 영화가 당신에게 가장 각별할지 궁금해지더군요.
저는 다 사랑해요. 그 캐릭터들이 또 지금의 나를 만들어줬어요. <장화, 홍련>은 배우 인생의 전환이 된 작품이에요. 그런 캐릭터가 앞으로 또 나올까요? 안 나올 것 같은데요. 그 새로운 캐릭터가 제게 온 건 행복한 일이죠. <범죄의 재구성>은, 저는 그 영화를 정말 사랑해요. 너무 잘 만들지 않았어요? 최동훈 감독은 정말 똘똘하다니까요.

촬영장에서 당신은 어때요?
지금이랑 똑같아요. 편하게 얘기하는 거 좋아하고. 촬영장은 <장화, 홍련>이 힘들었어요. <장화, 홍련>은 아주 조용하고 정적인 분위기에서 찍었어요. 수정이가 또 말이 없어요. 둘이 앉아 있으면 말 한마디도 안 하는 스타일이에요. 저랑 김갑수 선배 둘만 모여서 막 떠들었죠. 반대로 <범죄의 재구성>은 막 웃고 들뜬 분위기에서 찍었어요.

터틀넥 니트 스웨터와 팬츠는펜디(Fendi). 반지는 모두폴리폴리(Folli Follie).

터틀넥 니트 스웨터와 팬츠는
펜디(Fendi). 반지는 모두
폴리폴리(Folli Follie).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부터 대단한 작품이 될 거라는 게 보여요?
그 정도로 연출을 잘 알진 못해요. 영화가 잘 나오겠다 이런 느낌보다 와! 이런 영화를 만드는구나, 하고 설레죠. 당연히 나랑 잘 어울릴 거 같으니까 캐스팅을 제의하는 거고, 나도 잘할 거 같으니까 한다고 해요.

무리일 것 같으면 피하고요?
그런 작품이 있어요. 그러면 절대 안 해요. 그리고 또 배우도 하기 싫은 게 있어요. ‘음 이건 장면이 너무 힘들겠어~’ 이런 게 눈에 보이거든요. 이게 장소가 어디고, 계절이 이렇고. 오 괜찮겠다. 이건 진짜 힘들겠다. 전 그런 것까지 고려하면서 해요. 고생은 별로 안 하고싶어요. .

한번 크게 고생한 사람이 하는 말 같은데요?
2000년대 이후에는 제 스스로 너무너무 신나서 작품을 했어요. 그때는 고생하기 싫다는 그런 생각은 안 했죠. 하지만 그건 제가 어렸을 때였잖아요? 그리고 그 전에는 하기 싫은 역할도 아주 많이 했었어요. 그 모든 경험이 제 기억 속에 있는 거예요. 이제는 그런 시행착오를 겪지 않아도 되죠. 그때 다시 하지 말아야겠다 싶었던 건 그 이후로 안 하고 있어요.

하지만 3년 만의 복귀작인 <로얄패밀리>에서 분량이 대단했잖아요 . 정신적, 육체적으로 만만한 캐릭터가 아니었을 것 같은데요?
맞아요.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너무 힘들었죠. 특히 아들 역으로 나온 조니. 조니 캐릭터 때문에 헷갈리고 힘들었어요. 그렇지만 다시 와도 해 볼 만한 좋은 작품이에요. 배우에게도 진짜 연기하는 재미를 주는 작품이었고요. 고민을 많이 하고 고른 건 아니었어요. 우선 회사에서 적극적으로 추천한 작품이라 관심 갖고 읽어봤는데 재미있었어요. 그래서 신랑한테 물어봤죠. 대충 이런이런 내용에 이런이런 캐릭터라는 말만 듣고 ‘이건 해라’ 하더라고요. 이젠 신랑이 도와줘야 할 수 있으니까.

이제는 미스코리아로 데뷔했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많죠?
원래 꿈이 배우였어요. 중학교 때부터 배우를 꿈꿨어요. 그래서 연극영화과에 진학했고. 미스코리아도 나갔고. 그 두 활동은 별개라고 생각 했었는데 미스코리아가 되어서 배우도 하게 됐어요.

그때도 전형적인 미스코리아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동그란 스타일을 선호했었는데 갑자기 이런 앙칼지고 여우 같은 사람이 나왔죠.하지만 세상이 바뀌어서 개성 있는 역할이 생기고 그런 역할을 또 좋아해주는 세상이 됐잖아요. 그러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고요. 조금 더 일찍 만났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때라도 만나서 다행이었죠.

그럼 조금 늦게 태어날걸?
그랬으면 전 지금 투잡을 하고 있을걸요. 가수도 하고 있고. 하하하. 노래하고 춤추고 이런 걸 너무 좋아했거든요. 하지만 다들 날 말렸죠.

레이스 블라우스와 스커트는DVF. 장갑과 귀고리는보테가 베네타(BottegaVeneta). 뱅글은 모두 랑방컬렉션(Lanvin Collection).

레이스 블라우스와 스커트는
DVF. 장갑과 귀고리는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뱅글은 모두 랑방
컬렉션(Lanvin Collection).

가수 염정아라니. 상상이 안 되는데요?
근데 뭐 안 하길 잘했어요. 한 길만 가길 잘한 것 같아요. 그리고 노래와 춤도 딱 20대만 재밌었어요. 당시에 전 정말 끼가 많았는데 이제 그 끼는 연기할 때와 남편에게만 쓰고 있죠. 배우가 아니었으면 엄청 멋 부리고 다녔을지 모르겠지만, 전 그런 덴 별로 관심이 없어요.

털털하더라도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는 배우는 없을 거예요.
주위에서 계속 해야 된다고 그러는데, 저는 피부관리라는 걸 작년에 처음 받기 시작했어요.

오, 그전까지 피부관리를 받아본 적이 없다고요?
그래서 다른 배우도 그런 줄 알았고, 피부가 좋은 배우들은 타고난 줄 알았죠. 그러다 작년부터 신랑 후배가 하는 피부과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점점 좋아지는 게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피부관리 이거 받아볼 만한 것 같다고 했더니 그걸 이제 알았냐면서. 전 운동도 안 해요. 원래 안 좋아하고요. 허리가 아파서 필라테스만 조금 해요.

워낙 살이 안 찌는 체질인 것 같더라니….
원래는 그랬어요. 그런데 여자는 아이 낳고 체질이 달라진다고 하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지금은 조절 안 하면 살이 찌더라고요. 저는 몸에 탄력도 없어요. 그냥 몸매가 그렇게 생긴 거예요.

시간에 따른 노화에 가장 민감한 사람이 여배우일 텐데, 어때요?
스트레스 받으면 누가 제일 힘들까요? 나 자신이죠. 그래서 안 받으려고 애써요. 거울을 보면 옛날과 다르다는 걸 왜 모르겠어요? 하지만 뭐 어떡하나요. 다들 공평하게 늙는 건데요. 그리고 그걸 인위적으로 거스르려고 하면, 그건 알아둬야 해요. 이상해진다는 것.

자연스럽게 나이가 들기 위해서는 순리대로 가야 한다는 뜻이네요.
저는 그냥 이런 거예요. 어떻게 보이든 나는 항상 내 자신에게 자신이 있어요. 원래 자신감이 있는 사람이었어요. 뭐든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면 문제가 될 게 하나도 없을 것 같아요. 문제 삼으면 그때부터 ‘문제’가 돼요.

혹시 그런 생각은 안 들어요? 이 좋은 피부관리를 미리 받았더라면?
안 그래도 피부과에서 아이돌을 많이 봐요. 그 나이대 할 게 뭐 있나? 레이저 같은 시술도 너무 자주하면 안 좋대요. 저는 그런 관리를 워낙 안 받아본 피부라 지금 효과가 ‘팍팍팍팍’ 오고 있거든요! <로얄패밀리> 때 단점으로 지적되던 피부 톤이나 모공, 이런 게 개선되고 있는 것 같아요. 다음 작품에는 그런 게 보완되었을 거예요. 하하.

여전히 드라마에선 여배우들이 풀메이크업을 하고 잠들죠.
우리도 다 지우고 싶죠. 그런데 그럴 수가 없어요. 그 다음 장면을 빨리 찍어야 하니까. 모든 미니시리즈는 다 그렇겠지만 얼굴이 좋게 나올 수가 없어요. <로얄패밀리> 할 때 집에 일주일에 한 번 들어갔어요. 저도 정말 최상의 컨디션으로 연기를 하고 싶은데, 제 얼굴이 어떻게 나오는지 신경 쓸 겨를조차 없어지죠.

드레스는 노케 제이(Nohke J).팬츠는 타임(Time). 반지는CK 주얼리(CK Jewelry).슈즈는 쥬세페 자노티(Giuseppe Zanotti).팔찌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드레스는 노케 제이(Nohke J).
팬츠는 타임(Time). 반지는
CK 주얼리(CK Jewelry).
슈즈는 쥬세페 자노티
(Giuseppe Zanotti).
팔찌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새 작품 영화 <간첩>과 드라마 <내사랑 나비부인(가제)>이 곧 시작하는데, 털털한 성격을 보여줄 수 있는 코미디 장르가 편해요?
그렇지만 가장 어려운 장르가 바로 코미디예요. 누군가를 웃겨야 하는 것도 어려운데, 그걸 계속 의식하면서 연기를 한다는 게 어려운 것 같아요. 코미디는 꼭 웃겨야 하잖아요. 웃기지 않으면 실패고.

영화는 4년 만이에요. 기대가 남다를 것 같기도 한데요?
일단 시나리오가 굉장히 재미있어요. 작품을 고르는 건 항상 다 똑같아요. 시나리오 보고 감독님 만나서 얘기 듣고 정하거든요. 이번 <간첩>을 찍은 우민호 감독은 대학교 동기예요. 전작 <파괴된 사나이>도 잘 찍었던 친구라 고민 없이 결정했어요. 기대했던 대로 이제 결과물을 봐야죠.

지금까지 흥행불패신화를 이어왔는데, <간첩>은 어떨까요?
흥행은 제 몫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영화 속에서 제 것은 열심히 잘했어요. 나머지는 맡겨야죠. 서브 역할이라 부담도 별로 없었고, 김명민 씨와 재밌는 이야기하면서 즐겁게 찍었어요.

또 새 드라마가 있고요. 이번에는 여배우 역할이라던데요?
10월에 첫 방송할 예정인데 이번엔 주말드라마예요. 전성기가 지난 여배우인데, 전성기 때도 연기로 각광받던 배우가 아니라 오롯이 스타일로 사랑받은 스타였고, 철 없고 안하무인인 그런 캐릭터죠.

연기하기 재미있겠는데요?
그런데 저와는 너무 달라서요! 완전히 여배우 병이 있는 캐릭터인데 저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누구를 롤모델로 삼을까… 지금 요리조리 보고 있어요. 하하하.

지금까지 많은 사례를 보셨겠는데요!
그런데 보통 여배우끼리 작업을 별로 안 하니까 볼 기회가 잘 없어요. 안 그래도 감독님과 작가님한테, 참고할 만한 여배우 없냐고 물어봤어요. 두 분 다 실명을 절대로 거론할 수 없대요. 알아서 찾으라고. 하하하.

말만 들어도 재밌을 것 같아요.
네, 아주 재미있는 작품이 될 것 같아요. 전 이제 작품을 큰맘 먹어야 해요. 연기는 하고 싶어서 하는 건데, 가족들이 많이 희생해야 하니까요 . 이제 연기보다 걱정되는 건 그런 거고, 현장은 떠나자마자 잊어요.

그쪽이 연기 생활하기가 더 좋지 않아요? 잊어버리는 것.
역할에 몰입해 있다가 빠져나오는 건 정말 잘해요. 감독이 ‘컷’ 하는 순간 빠져나와요. 제가 매니저한테 그러거든요. 나는 머리가 좋다. 그런데 기억력이 나쁘다!

새 작품이 많으니 다른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볼 수 있겠군요.
안 해요. 작품 말고는 방송은 거의 하지 않으려고 해요. <무릎팍 도사> 이후로 다시 깨달았어요. 나를 많이 보여주고, 내 얘기 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워요. 배우는 어떤 역할을 했을 때 그 역할로만 보여주는 것. 저는 그게 제일 좋은 것 같아요.

여배우로 사는 삶을 후회해본 적은 없어요?
듣고 싶지 않은 얘기들을 듣는 건 힘들죠. 하지만 제가 누리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니까 당연하게 받아들여요. 그 외에는 너무 좋아요. 배우는 나만 연기를 잘하면, 나만 옳은 생각을 가지고 잘 살면 참 좋은 직업이에요. 그리고 주변에 좋은 사람만 있다면요. 그거 아세요? 배우들은 몇몇 이상한 사람만 제외하면 참, 순진하답니다.

20대 때 연기와 지금 연기하는 재미는 다른가요?
뭐가 다를까. 급하지 않고 모든 게 여유가 있어요. 연기도 좀 더 넓은 시야에서 전체를 보죠. 그게 달라요. 내 것 하나만 보는 것과 더 넓게 보는 것. 나이는 그냥 먹는 게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