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추격자>의 선 굵은 남자 배우들 사이에서 김성령은 유독 반짝였다. 그 반짝임이란 그녀의 화려한 외모로부터가 아니라 살아내려고 하는 처절한 의지에서 기인하는 것이었기에 더 아름다웠고 눈이 부셨다. 40대 중반에 들어선 김성령은 지금 이 순간, 연기에 가장 목마르다고 말했다.

 

드레스는 미스지콜렉션(Miss Gee Collection).반지는 쇼메(Chaumet).

드레스는 미스지콜렉션 (Miss Gee Collection). 반지는 쇼메(Chaumet).

 

김성령의 출발은 화려했다. 1988년 미스코리아 진으로 데뷔한 그녀는 1991년 강우석 감독의 영화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로 대종상, 백상예술대상, 춘사나운규영화예술제의 신인상을 휩쓸었다. 과정도 결과도 쉬웠다. 연기라는 거 별거 아니구나, 싶었다. 결연한 의지도 오래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시간이 조금씩 지날수록 연기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역할의 비중을 따지지 않고 도전 했지만 이렇다 할 대표작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김성령의 연기에 집중하기보다는 여전히 미스코리아라는 수식어를 갖다 붙이며 ‘예쁜 중견 배우’쯤으로 단정하려 했다. 누군가의 푼수 엄마가 되든, 아버지뻘 배우의 아내가 되든 그녀는 그저 열심히 그 자리를 지켰고 그런 그녀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추적자>의 ‘서지수’는 김성령이 묵묵히 만들어온 내공을 터트릴 최적의 인물이었다. 온갖 화려함으로 자신을 치장하지만 연민으로 가득한 여인을 연기하는 동안 김성령은 많이 울었고 또 웃었다. 뻔뻔하고 지독했지만 서지수가 악인으로 기억되지 않는 건 마지막까지 그녀를 단단히 붙잡았던, 치열하게 매달렸던 김성령이라는 배우가 있어서였다.

서지수와의 이별 후 어떻게 시간을 보냈나요?
드라마 끝나고 그동안 못 만났던 지인들, 친구들을 만났어요. 짧게 제주도에도 다녀왔고요. 일주일 동안은 실감이 안나서 좀 헤맸는데 딱 일주일 지나니까 정말 끝났구나, 싶더라고요.

처음 대본을 봤을 때 ‘서지수는 내 역할이다’ 싶던가요? 그녀를 받아들이는 마음이 어땠나요?
1, 2회 대본을 먼저 봤어요. 그냥 제멋대로인 여자라고 생각했어요. 촬영 들어가기 전에 작가와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다 가진여자가 오직 사랑 하나만으로 이발소집 아들과 결혼했다는 걸 알게 되었죠. 강동윤을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는 서지수는 불쌍한 여자였어요. 마지막까지 말이에요.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 발버둥치는 여자였죠.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서지수를 미워하지만은 않았어요.
차로 사람을 치고 벌을 받지 않았으니 미움을 받아야 마땅한데 의외로 서지수를 가여워했어요. 저는 제 역할이니까 당연히 그녀를 가여워했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반응할 줄은 몰랐어요. 서지수의 복잡한 상황과 마음들이 보는 이들에게도 잘 전달이 된 것 같아요.

강동윤이 말했죠. 사고가 났는데 차가 아닌 고양이의 안전을 걱정하는 서지수를 보며 그녀의 세계에 들어가고 싶었다고. 서지수에게는 다 가졌기 때문에 온전할 수 있는 지점들이 있었죠.
네. 저도 그 대사가 인상적이에요. 서지수의 한 부분을 잘 설명하는 말이죠.

김상중, 박근형과 함께 작업한 것도 의미 있는 일이었겠죠?
김상중 선배는 10년도 더 된 <종이학>이라는 드라마에서 잠깐 파트너로 만난 적이 있어요. 그의 섬세한 눈빛을 보면 도대체 이 사람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죠. 박근형 선생님은 카리스마가 대단해요. 어릴 적에는 선생님에게 연기 못한다고 혼나기도 했었죠 . 함께 대기실에 있는 시간도 많았고 정신적으로도 큰 의지가 되었어요.

장인어른과 사위의 기싸움이 대단했어요. 그 사이에 서지수가 있어서 긴장감을 더했고요.
김상중 선배와 박근형 선생님의 힘겨루기가 팽팽해서 더 흥미진진했던 것 같아요. 손현주, 김상중, 박근형 세 사람의 연기력이 이슈가 되면서 감독님께 제 분량을 줄여달라고 했어요. 세 분의 열연에 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반효정 선생님이 ‘니가 크게 보인다’고 말씀해주시더라고요. 덕분에 많은 용기를 얻었죠.

첫 방송부터 ‘명품 드라마’라는 수식어를 달았고 방송 내내 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어요.
30%의 시청률을 낸 것도 아니고 6개월 이상의 대작 드라마도 아니고, 고작 16부작에 시청률도 20%정도였죠. 그런데 체감 시청률이 확실히 높았어요. 드라마를 하면서 정말 많은 사람에게 연락을 받았어요. 마음을 동하게 하는 이야기가 있어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꾸준히 연기를 했음에도 대표작이 없었어요. 드라마의 인기를 떠나서 김성령이라는 배우의 존재감을 보여준 역할이 아니었나 싶어요.
제가 나오는 장면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보는 사람들마다 ‘너무 고생한다’고 하는 거예요. 그만큼 서지수가 인상적이었나봐요. 평소에 화장 안 하고 밖에 나가면 저를 잘 못 알아보는데 이제는 횟집아저씨도 알아볼 정도예요. 저를 잘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었던 것 같아요.

드레스는 맥앤로건(Mag &Logan). 목걸이는 쇼메.

드레스는 맥앤로건(Mag & Logan). 목걸이는 쇼메.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한 서지수의 스타일도 주목을 받았어요.
눈에 띄면서도 세련된 스타일을 만들고 싶었어요. 원색의 옷을 입고 커다란 주얼리를 착용했죠. 세트가 크고 웅장한 데다 전체적인 톤이 블랙과 화이트라서 웬만한 액세서리는 눈에 보이지도 않았어요. 목걸이가 과하면 귀고리를 줄이고 옷에 힘을 주면 메이크업에 힘을 뺄 법도 한데 일부러 모든 부분에 다 힘을 줬어요.

그것이 본인과 잘 어울렸다는 건 알고 있겠죠?
미스코리아 출신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저에게서 화려한 이미지를 찾는 것 같아요. 서지수가 만들어낸 스타일에 대해 저 역시 만족하고 있어요.

마흔이 넘은 나이에 배우로서 정점에 서게 되었어요.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기회는 아닐 텐데요.
시청률 좋고 반응이 좋다는 게 이런 거구나, 천만 관객의 영화를 한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하는 생각을 해봤죠. 젊었다면 그 다음이 더 화려하게 이어질 수 있겠지만 저는 이제 중년배우잖아요.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죠. 손현주 선배가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거라고 말하더라고요. 흥분하지 않고 겸허하게 차분하게 받아들이고 있어요.

40대를 넘긴 많은 여배우가 누군가의 엄마로서 연기하죠. 이번 드라마도 그렇고 영화 <아부의 왕>도 그렇고 여전히 자신의 이름을 건, 한 여자를 연기하고 있어요.
물론 엄마 역할도 했지만 아직 이런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걸 감사하게 생각해요. 이제는 정말 한 해 한 해가 달라요. 하지만 저는 나이가 드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요. 그렇게 관리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이번 드라마 끝나면서 앞으로 정말 열심히 관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정신적인 것과 보여지는 것 모두요.

꾸준히 운동을 한다고 들었어요. 뭐든 꾸준히 하는 건 어렵죠.
촬영이 없는 오전은 항상 운동을 하고 사우나를 가요. 골프를 하든, TP를 받든 어떤 운동이라도 하죠. 운동이 끝나고 사우나까지 다녀오는 게 오전 일과예요. 일주일에 한 번은 마사지를 받으려고 노력하고요.

아까 보니까 생크림을 가득 올린 캐러멜 모카 커피와 샌드위치를 정말 맛있게 드시더라고요.
먹는 걸 정말 좋아해요. 친구들이랑 밥을 먹다 보면 저 때문에 창피하다고 할 정도예요. 많이 먹고 나면 물론 신경이 쓰여요. 몸무게를 매일 재고 조금 늘었다 싶으면 열심히 운동해요. 근데 문제는 살이 안 빠진다는 거예요. 작년까지만 해도 굶고 운동하면 변화가 있었는데 말이에요. 이게 나이 드는 거구나 싶어요.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에서의 역할은 의외였지만 스스로 즐기는 모습이 보였어요.
오래전부터 시트콤에 욕심이 있었어요. 드라마에서 매일 울고 심각한 역할을 많이 하다 보니 재미있는 캐릭터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를 통해 이제까지와 확실히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어요. 극 중에서 개다리춤도 추고 철저하게 망가졌어요. 내가 이런 것도 할 수 있구나 하는 성취감과 배우로서의 자부심을 느꼈어요. 그게 <추적자>에도 큰 도움이 되었고요.

 

드레스는 미스지콜렉션.목걸이는 반클리프 아펠(VanCleef & Arpels), 팔찌는림 지오엘리(Rimm Gioelli).

드레스는 미스지콜렉션. 목걸이는 반클리프 아펠(Van Cleef & Arpels), 팔찌는 림 지오엘리(Rimm Gioelli).

 

사교적일 것 같은 이미지는 아닌데 은근히 사람을 좋아하네요.
연기를 하면서 그렇게 바뀌었어요. 집에만 있는 건 연기에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더라고요. 사람들 만나는 게 부끄럽고, 사람들 앞에서 연기하는 게 부끄럽고, 사람들이 날 알아보는 게 부끄럽던 시절이 있었어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일부러 사람도 많이 만나고 좀 더 외향적으로 변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드라마로 시작한 배우가 연극을 찾는 건 흔한 일은 아니죠. 당신의 필모그래피에는 꽤 여러 편의 연극이 포함돼 있어요.
드라마는 대본이 나오자마자 쫓기듯이 촬영에 들어가고 자기 분량이 끝나면 집에 가기 바빠요. 그에 비해 연극은 함께 하는 배우들과 작품에 대해서 얘기하고 같이 둘러 앉아서 밥을 먹고 연기도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볼 수 있죠. 작품을 만들어가는 그 과정이 참 좋아요.

조금 느슨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모든 일에 열심이네요.
저는 이게 직업이 됐어요. 직업이니까 당연히 고민하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잘할까, 어떻게 하면 정체되지 않을까에 대해서 항상 생각해요. 연기에 정답이 없고 장점도 단점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늘 주위를 둘러봐요. 내 색깔만 고집하기보다는 시대의 흐름에 맞추려고 노력하고 마음을 열어놓는 편이에요. 사람들이 열광하는 인물이나 사건이 있다면 그것의 어떤 점에 그렇게 열광하는지 관심을 가지려고 하죠.

그런 당신을 위해, 여배우를 위해 대중들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요?
여배우가 나이 드는 걸, 얼굴이 변해가는 걸 인정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성형을 하고 나오는 여배우들을 보면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얼마나 고민을 했으면 저렇게까지 했을까 하고 이해가 가요. 단순히 예쁘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역할을 위해서 그걸 하는 거거든요. 사람들이 그걸 원하니까요. 대중들이 여배우들의 주름을 좀 더 너그럽게 봐주면 좋겠어요.

40대의 배우에게는 특수한 아름다움이 있죠. 특히 자신의 시간을 꾸준히 가꿔온 배우에게는 가장 매력적인 시간인 것 같아요.
20대에는 연기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고 빨리 결혼을 하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30대는 결혼생활을 하고 두 명의 아이를 키우면서 정신없이 흘러갔고, 40대가 되어서야 모든 게 편안해지고 안정을 찾았죠. 제 연기가 좋아졌다고 많이 말씀해주시는데 그 역시 이러한 편안함에서 기인하는 걸 거예요. 마음이 여유로워지고 두려운 게 없어지니까 감정이 풍부해지고 표현도 좋아지는 것 같아요.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그게 느껴져요. 이렇게나 많은 표정과 눈으로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아, 제가 그랬나요? 얼마 전에 보아의 ‘Only One’ 뮤직비디오를 보는데 가슴이 막 뛰는 거예요.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도 잘 우는 편이에요. 그런 감성이 연기를 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아요. 어제는 헬스장에서 올림픽을 보는데 다른 나라 선수가 우리나라 선수 얼굴을 막 때리는 거예요. 그걸 혼자 씩씩거리면서 봤어요. 씻고 나오는데 아줌마들이 골프 방송을 보고 있는 거예요. 올림픽 안 보고 어떻게 저걸 보고 있지? 하면서 또 씩씩거렸어요. 너무 웃기죠?

정도, 감성도, 표정도 많은 여배우가 가장 경계하는 것이 있다면요?
누군가에게 자기 주장을 강요하는 거예요. 젊은 사람들이 시행착오를 겪는 걸 보면 얘기해주고 싶어지죠. 근데 그건 잘못된 것 같아요. 직접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배우는 게 있을 거고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는 거니까요.

앞으로도 오랫동안 배우 김성령을 볼 수 있겠죠?
배우는 참 감사한 직업이에요. 게다가 정년 퇴임이라는 것도 없죠. 하고 싶을 때까 지 계속 할 수 있잖아요. 할 수 있는 힘이 있는 한 끝까지 한번 해보려고요.

이루지 못해 아쉽다거나 시간을 두고 이뤄내고 싶은 게 있나요?
제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이왕이면 많은 사람에게 좋은 얘기를 듣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요. 그리고 내 생활이 좀 더 풍요로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연기도 그렇고 정신적인 부분에서도 말이에요.

 

드레스는 바실리 바이 디누에(Vassillyby D.nue). 반지는 반클리프 아펠.

드레스는 바실리 바이 디누에(Vassilly by D.nue). 반지는 반클리프 아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