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 대한 애정은 천천히 뿌리를 내린다. 오랫동안 무덤덤하게 바라보던 친구 얼굴이 어느새 가장 반가운 얼굴이 되어 자꾸 보고 싶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제각각 다른 동네에 살고 있는 14인이 동네의 얼굴을 찍었다. 아침에 집을 나서는 오전 9시에 한 장,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오후 9시에 또 한 장.



회색 풍경| 서울시 성동구 응봉동
사진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내다보이는 동네 전경이다. 응봉산과 멀리 한강이 보이는데 몇 년째 같은 풍경을 찍었다. 아침과 저녁
눈 쌓였을 때, 흐렸을 때, 심심할 때. 풍경의 양옆으로는 전형적인 서울의 아파트들이 늘어서 있는데 무심하게, 멋없게 늘어서 있는 아파트들의 모습은 언제 봐도 낯설다. 서울은 언제나 회색이었다. 원래의 색깔이 어떤지와 상관없이 내 눈에는 멋없고 삭막한 회색으로 보인다. 그 색깔이 싫어서 사진을 차라리 흑백으로 바꿔버렸다. – 김현성(사진가)



서울해방| 서울시 용산구 용산동
행정구역상으로는 분명히 용산동 2가지만 모두 이곳을 해방촌이라고 부른다. 지금 서울에서 가장 뜨겁다는 이태원과 길 하나를 두고 이어져 있지만 이곳에는 여전히 ‘주민’이 있다. 해방촌 입구와 오거리 중간쯤에 위치한 이곳의 오전 시간은 바쁜 서울의 출근길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여유롭고 한적하다. 점포 주민들과 동네 주민들은 손을 흔들며 서로 인사를 한다. 퇴근시간에 접어들면, 환하게 불을 켠 점포들마다 이방인 친구들과 한국 친구들의 웃고 떠드는 모습이 활기차다. 2층의 오래된 여관과 1층의 세련된 카페와 레스토랑이 있는 이 길목에는 시간의 경계도, 인종의 경계도 없다. – 김현석(건설 CG 디자이너)



그냥 구름만 본다|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
이 창문으로 구름을 본 것도 10년이 되었다. 회사와 가깝다는 이유로 이화동을 기웃거리다 이 창문을 만났을 때 주저하지 않고 여기, 라고 생각했다. 창가에서 게으른 포즈로 구름을 봤다. 책도 안 읽고 음악도 듣지 않는다. 그냥 구름만 본다. 앞집 옥상엔 매년 호박넝쿨이 있었는데 올해는 그러고 보니, 없다. 낮에는 구름이 한바탕 우주선처럼 몰려왔는데 저녁에는 모두 어디론지 돌아가고 결이 고르지 않은 바람만 지나다닌다. 낮과 밤이 오직 이 창을 통해서만 내게 오는 것 같을 때도 있다. 지금은 어느 집에서 설거지를 하는지 그릇 부딪는 소리가 들려온다. – 장우철( 에디터)



도시의 빈틈, 문래| 서울시 영등포구 문래동
2005년 척박했던 문래동에 작업실을 냈다. 처음에는 쿵쾅 소리를 내는 철제공장들만 보였던 이곳에 얼마 후부터 쿵짝거리는 예술가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동네는 문래창작촌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받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꿈도 생겼다. 이곳에서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즐거운 일을 가득 만들고 싶다는 바람. 그래서 만든 옥상의 텃밭은, 이제는 또 다른 즐거움이 되었다. 어느 예술가의 철제조형물과, 어느 옥상의 텃밭 풀내음이 공존하는 이 동네가 나는 좋다. 이곳에서 나는 즐겁다. – 이소주(작가)



이태원 주민 일기|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동
2004년부터 살고 있는 이태원에는 다양한 층의 문화적 시공간이 존재한다. 이곳은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밖으로 드나드는 길이다. 바로 이 길로 나와 관계된 사람들의 삶이 드나드는 것이다. 다양한 말소리가 들려온다. 다양한 의상이 빨랫줄에 걸린다. 온갖 집에서 넘어오는 음식 냄새도 맡을 수 있다. 다른 삶이 섞여 있는, 같은 아침과 같은 밤을 맞이하는 이 길을 기록한다.
– 사이다(사진가, 작가)



새로운 유랑| 제주시 구좌읍 평대리
정든 월정리를 떠나 새 보금자리를 찾을 때, 조건은 하나. ‘바다가 보일 것’이었다. 동쪽을 마주하고 있어 일출을 볼 수 있는 이 마을의 아침에는 새, 파도, 바람 소리를 제외한 어떤 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다. 대청마루에 앉아 바다를 바라 보다가 저녁 7시나 8시쯤 가게 문을 닫고 난 후에는 조용히 그 바닷가를 거닌다. 휘영청 밝은 달이 언제까지라도 쫓아온다.
– 다아나(‘유랑노점 조르바’ 주인)



빈 테이블의 의미| 서울시 종로구 계동
평소에도 정적인 계동의 공기는 오전에는 한층 차분하다. 이 조용한 동네의 길을 비집고 따뜻한 점심 식사를 기대하며 올 손님을 생각하며 오전에 나는 식당 청소를 마치고 몇 개 되지 않는 식당 테이블을 정리한다. 이 빈 테이블들을 오늘은 몇 명의 손님이 채울지, 기다리며 함께 가게를 하는 병준 씨와 둘이 주방에서 열심히 점심 메뉴를 준비한다. 점심과 저녁, 두 끼니의 시간을 보낸 밤 아홉시, 한바탕 손님을 치르고 난 뒤의 빈 테이블은 오전의 그 빈 테이블이 아니다. 고단한 하루와 오늘도 내 요리를 먹으러 다녀간 손님이 있었다는, 흐뭇한 상징이다. – 정창욱(‘차우기’ 오너셰프)



내게는 최고의 공원| 서울시 여의도구 여의도동
초등학교 1학년. 한창 강남 붐이 불었을 때 우리 집은 거꾸로 방배동에서 여의도로 이사를 했다. 여의도에 살게 된 게 무척 신이 났던 이유는 주말마다 늦잠을 자던 아버지를 마구 졸라 찾았던 ‘여의도 광장’ 때문이었다. 그렇게 유년시절을 함께했던 광장이 1997년에 문을 닫더니 2년 뒤 지금의 근사한 공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3년이 지났다. 이제 울창하게 나뭇가지를 드리운 초목들, 나름 운치가 있는 정자, 그 뒤로 펼쳐진 빌딩숲. 여의도 공원 중앙에는 아직도 어릴 때 달렸던 아스팔트 광장의 모습이 남아 있다. 여기서 인라인 스케이트도 탔고, 배드민턴도 쳤고, 농구하는 친구들을 따라 응원도 했고, 맥주도 마셨다. 그리고 지금은 자전거를 탄다. 하이드파크, 센트럴파크 뭐 그런 거 난 안 부럽다. 여의도 공원이 있어서. – 서다희(<더 트래블러> 에디터)



신도시가 품은 보물|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몹시 시골 같은 이곳은 분당의 콘크리트 숲 사이를 흐르는 탄천, 그중에서도 동막천이라 불리는 곳을 찍었다. 봄이면 벚꽃이 만개하고 가을엔 풍성한 단풍잎이 마음을 흔드는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풍경은 계절이 되면 과격하게 우거지는 억새풀이다. 어찌나 흐드러지는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다. 얼마 전엔 아기 오리 일곱 마리가 어미의 궁둥이에 앙증맞은 부리를 콕 박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헤엄치는 걸 넋 놓고 구경했고, 언젠가 밤엔 마실 나온 너구리와 마주치기도 했다. 이러니 내가 이사를 갈 수가 있나.
– 정우열(일러스트레이터)



보통의 동네에서 보내는 보통의 하루| 서울시 마포구 연남동
2년 전 겨울, 연남동과 인연을 맺었다. 작업실을 찾기 위해 홍대 주변을 헤매다 우연히 흘러든 곳이건만, 이 동네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있었다. 반지하도 없고 옥탑방도 없이 오래된 2층짜리 주택이 늘어서 있는 동네는 집집마다 담벼락에 능소화를 드리우고 올망졸망 열매를 맺는 감나무가 심어져 있다. 시야를 가리는 수많은 전선이 집집마다 연결된 풍경. 나는 아침이면 물청소를 한 듯 상쾌한 집들을 지나치고 저녁이면 창밖으로 스며 나오는 불빛을 보며 걷는다. 뭐 하나 특별할 것 없는 보통의 동네, 모든 사물이 애매한 아름다움을가진 보통의 거리, 사는 사람도 먹는 음식도 비슷비슷한 보통의 사람들. 이곳은 연남동이다.
– 최예선(작가, ‘달콤한 작업실’ 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