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루어>의 9주년에 나무액터스의 뿌리 깊은 배우들이 함께 했다. 배우이자 한 사람으로서의 내면을 고요하게 들여다보는 흑백 영화 뒤엔 그들의 영화적 열정을 응축해 담은 또 한 장의 영화가 있다. 무성과 유성, 흑백과 컬러, 장르와 장르를 오가며 완성된 영화적 순간들.

드레스는 버버리 프로섬 (Burberry Prorsum). 반지는 엠주.

드레스는 버버리 프로섬 (Burberry Prorsum). 반지는 엠주.

오리엔탈 무드의 드레스를 걸친 유선이 화장대 앞에 앉았다.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할 때, 여자들은 장소는 거울 앞이 된다. 이미 위기는 찾아왔다. 이제는 결정해야할 때다. 거울은 여자의 두 얼굴을 동시에 보여준다. 강인해 보이는 얼굴 너머로 어딘지 연약해 보이는 얼굴이 나란히 놓인다. 표정을 크게 바꾸는 것도 아닌데 눈빛에 따라서 그 뉘앙스가 달라졌다.

존 카사베츠 감독은 자신의 아내이자 당대의 배우였던 지나 롤랜드를 주인공으로 영화 <글로리아>를 만들었다. 1980년에 발표된 이 영화는 그후 많은 영화의 원형이 되었다. <레옹>과 <아저씨>는 <글로리아>의 성별을 거꾸로 바꿔놓은 충직한 변주였다. 글로리아는 가족이 모두 마피아에게 희생된 이웃집 아이와 함께 도망을 친다. “너희 집 아이는 특히 더 싫어.” 아이가 싫다고 늘 되뇌는 그녀지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바로 그 아이, 필을 지켜주겠노라고 약속한다. 한 손에 갈색 여행가방을 든 채 한 손으로 아이를 위협하는 마피아에게 총을 겨누는 모습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한 장면이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약한 존재였던 여자는 필요에 따라 세상에서 가장 강한 여자가 된다. 신작 <돈 크라이 마미>에서의 유선처럼.

부서질 듯 약해 보이는 그녀는 왜 작품 속에서 늘 강해져야만 할까. 유선을 실제로 본 사람들은 그녀의 선이 고운 작은 체구에 놀란다. 말은 조용하고, 손가락도 역시 섬세하다. 감독들이 그래서 더 그녀를 원하는지도 모르겠다. 약함과 강함의 대비. 연약한 여자가 깨어졌을 때의 광기를 보고 싶은 건 아닌가.

“원래 제 성향은 섬세하고 예민하죠. 다른 사람들의 기분에 빨리 전염되니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를 좋아하지 않아요. 낯선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여전히 위축되고요. 그래서 강한 역할에 대한 동경이 있어요.” <이끼>, <검은집>의 배우라고 믿을 수 없는 소심한 이야기들! “정말 그래요. 연기를 할 때 저는 굉장히 힘들어해요.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감정적인 것과 섬세한 쪽을 더 잘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죠.”

오린엔탈풍의 프린트 원피스는 모스키노(Moschino). 크리스털 팔찌는 스와로브스키. 팔찌는 엠주.

오린엔탈풍의 프린트 원피스는 모스키노(Moschino). 크리스털 팔찌는 스와로브스키. 팔찌는 엠주.

글로리아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를 구하기 위해 강해지고, 마침내 그 아이를 지켜내고 죽음을 당한다. <돈 크라이 마미>는 반대로 하나뿐인 아이를 잃고 살아남은 엄마의 분노와 복수를 그린다. “딸이 성폭행을 당하고, 그 동영상으로 협박받다가 자살했다는 걸, 딸이 죽은 후에야 알아요. 가슴 깊이 오열하죠. 찍는 내내 정말 힘들었어요.” 김용환 감독은 처음부터 유선을 염두에 두고 영화를 기획했다. 그녀는 한번 거절했다. “결혼 전이었는데 대본을 받고 심장이 두근거려서 잠이 안 왔을 정도였죠.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염려가 되기도 했죠. 그래서 한번 고사했다가 시간을 갖고 다시 결정했어요.” <이끼>후 <글러브>를 찍으면서 이제 밝은 세상으로 돌아왔다 싶었다던 그녀를 다시 더욱 어둡고 강한 세계로 내려보낸 작품. “<글로리아>의 글로리아는 그래도 마피아의 연인이었죠. <돈 크라이 마미>에서 난 철저히 그냥 엄마였어요. 그래서 다이내믹한 액션은 없어요.” 하지만 여리고 작은 손이 복수를 결심했을 때 그 처절함은 몇 배가 될 수 있다는 걸 안다.

드라마 <마의>도 시작된다. 조승우의 첫 드라마로 화제가 된 이 드라마 속에서 유선은 그의 멘토가 된다. “영화는 하나둘씩 공들여서 퍼즐을 맞춰나가듯이 찍는 재미와 보람이 있어요. 드라마는 순간순간 감정을 어떻게 할지 계산할 새가 없이 내 자체가 그 캐릭터가 되어서 촬영 내내 쭉 사는 거 같아요. 잠깐 집에 와서 잠을 자는 시간 외에는 계속 현장이기 때문에 촬영하는 기간에는 그 캐릭터 자체 인물이 되어버려요.” 어느 한쪽의 갈증을 다른 한쪽으로 채우는 유선의 영리함은 필모그래피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그녀는 100% 만족한 작품은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거라고 말한다. “존재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정말 신기한 게 그때 당시에는 모두가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한두 달 시간이 지난 뒤에 개봉했을 때는 빈 구석이 보이는 거예요. 그러면 견디질 못하고 눈을 감아버려요. 이게 뭐지? 내가 그 사이에 성장한 건가? 아니면 조금 더 넓은 시야로 보게 된 건가?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을 해요. 그러곤 완벽할 수는 없지만 완벽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매번 투쟁을 시작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