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루어>의 9주년에 나무액터스의 뿌리 깊은 배우들이 함께 했다. 배우이자 한 사람으로서의 내면을 고요하게 들여다보는 흑백 영화 뒤엔 그들의 영화적 열정을 응축해 담은 또 한 장의 영화가 있다. 무성과 유성, 흑백과 컬러, 장르와 장르를 오가며 완성된 영화적 순간들.

 

드레스는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드레스는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멜랑콜리아>의 포스터가 배우 김지수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레이스를 휘감은 순백의 드레스를 입었지만 신부에게는 서서히 종말이 다가오는 중이다. 개인의 종말과 세계의 멸망. 멜랑콜리아 행성이 지구와 가까워지면서 사람들은 제각기 미쳐간다. 절망과 신경증이 뒤섞인 신부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는 미쳐서 물에 빠져 죽은 오필리어의 이미지를 다시 한번 빌린 것 같기도 하다. 크고 넓은 연 잎사귀로 둘러싸인 그녀의 표정은 그런 날카로움과 서글픔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복잡한 인간의 복잡한 인생을 표현해야 하는 배우에게 우울은 위험하면서도 필요한 것이다. 그녀도 동의한다. “배우만 아니면 단순하게 사는 게 참 좋을 것 같은데. 단순해지는 거 같으면 약간 걱정이 돼요. 어떤 배우들은 단순하기도 하겠죠. 하지만 난 ‘이렇게 단순해져도 되나?’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거든요.” 그러곤 배우로서 자신의 물성을 명확하게 표현한다. “나는 속에 불, ‘Fire’가 있는 사람이에요.”

너무 상식적으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그녀 안에 빨간 불이 켜지는지도 모른다. 너무 심심해지면 곤란하다. 미적지근한 그건 도무지 뜨겁지가 않아서 싫다. “그렇다고 배우가 4차원적인 게 좋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 사실은 되게 보편적이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럼 또 걱정이 되고.” 그러니까 그녀가 경계하는 것은 필연적인 지루함뿐이다. “이 영화의 포스터를 보세요.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정말 ‘글루미’해 보이잖아요? 호기심을 자극해요.” 너무 섬세해서 부서질 듯한 웨딩드레스의 레이스 자락을 가득 펼쳤다. 김지수는 이게 더 어울릴 거라면서 목에 건 목걸이를 풀었다.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건 종말을 앞둔 신부였으니까.

심장 깊숙이 알 수 없는 불을 숨긴 배우. 그러나 감독들은 그녀를 언제나 섬세한 감정선 위에 올려놓는다. 신경숙 소설에서 나 나올 법한 식물 같은 <여자, 정혜>이거나 청초하고 아름다워서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남자의 첫사랑일 수 있는 <러브 어게인>의 여자로 존재하는 식이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한 번도 자신과 닮은 불의 심장을 가진 인물을 만나서 화르륵 태워보지 못한 것 같다. “정혜는 다시 하라 그러면 힘들어서 못할 것 같아요. 나는 속에 에너지가 있는 사람인데 정혜는 에너지가 없잖아요. 말도 별로 없고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화도 안 내고 맨날 무덤덤하게. 감독님한테 정혜가 되고 싶지 않다고 짜증 많이 냈었어요. 그래도 <태양의 여자>에선 불이 있는 여자였죠.”

드레스는 데카다 바이 프로노비아스 (Decada by Pronovias). 귀고리와 반지는 모두 렉스 다이아몬드(Rex Diamond).

드레스는 데카다 바이 프로노비아스 (Decada by Pronovias). 귀고리와 반지는 모두 렉스 다이아몬드(Rex Diamond).

웨딩드레스를 입고 드러낸 어깨 뒤에는 얼마 전 새긴 것 같은 문신이 선명하다. 남자친구 이름을 새겼다. 그 어깨너머로 돌아보는 그녀의 얼굴이야말로 김지수라는 배우를 가장 직관적으로 설명해주지 않을까. “문신은, ‘파이어’가 없으면 절대 못해요. 남녀관계 일이란 모르는 건데, 끝나면 억지로 지워야 하잖아요. 저도 제 인생에서 몸에 다른 사람의 이름을 새기는 것은 처음이에요.” 열여섯 살 어린 남자친구를 만나는 것. 영화적인 순간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어도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던 일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인생은 모르는 것 같아요. 안 그래요?”

그녀에게 사랑은 무엇인가. “나는 사랑이 제일 좋아요.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좋고요. 하지만 사랑에 대한 큰 환상이나 기대감은 없어요. <클로저> 같은 영화가 사랑의 진짜 얼굴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그들과 그녀들이 다 이해가 가거든요. 내가 인생에서 결혼을 미치게 하고 싶었던 때가 34살 때였고, 결혼이 하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불안해서 결혼을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싶었을 때가 38살쯤이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오히려 결혼을 안 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연애를 많이 해서 진짜 사랑의 뒷모습이 어떤 것인지 알고 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는 결혼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아요.”

그녀가 출연을 결정하려고 하는 멋진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미 절반의 인생을 살아온 과거의 연인이 이탈리아에서 우연히 만나,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두 번째 스물>이라는 제목에 시나리오를 읽기도 전부터 끌렸다고. “나는 풋풋한 청춘은 아니었어요. 스무 살 때 공채 탤런트로 연기를 시작했거든요. 하지만 쉰이 되고 예순이 되어도 자기들끼리는 애들같은 사랑일 것 같아요. 그런 풋풋함을 표현할 수 있다면 성공이겠죠.” 이 작품을 함께 할 남자배우가 궁금해졌다. 누구든, 그녀의 상대역은 그녀의 뜨거움과 차가움을 오가는 에너지에 탄복하게 될 것이고, 세상에 두려운 것이 많지 않은데 새로운 작품을 앞둘 때면 늘 겁이 나는 그녀의 섬세함에도 기대게 될 것이다. 세상에 종말이 다가올지언정 언제나 타오를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사람. 그녀에게 불을 가져다줄 사람은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