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조선희가 안나푸르나에 올랐다. 낯선 공기와 청명한 자연을 들이마시며 카메라와 함께 여행하는 사이, 날숨 같은 사진이 쌓였다. 잠시 멈추고 적어 내려간 여행의 기록을 함께 싣는다.

여행, 영감을 위한 출발
영감을 받기 위한 출발은 언제나 여행이다. 특히 내 삶 속에서 무엇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가에 대한 영감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여행의 시작은 기다림이 먼저다. 우리 인생이 늘 ‘기다림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오래도록 잊고 있었다. 스티브 잡스가 세계를 하나로 만들어버리고 난 후, 그러니까 지금도 그가 만든 아이폰으로 글을 쓸 수 있게 만든 이 빌어먹을 세상을 만들어놓은 이후론 더 잊어버리고 말았다. 공항에서 비자를 받아야만 하는 나라에서는 긴 줄을 견디며 빨리 바깥 공기를 들이마시고 싶은 조바심을 참는다. 갈아타야 할 비행기를 놓칠까봐 노심초사하며 헐레벌떡 뛰어온 국내선에선 또 다른 기다림이 존재한다. 영락없이 비행기는 30분 이상 연착한다. 주변을 둘러본다. 더위를 식히기는커녕 더위를 부추기는 커다란 팬 선풍기와 허름한 공항 입구의 블루페인트는 내가 이국적인 나라에 왔음을 더욱 실감케 한다. 그 망할 기다림이 있었기에 주변을 더 관찰하게 되고 느낄 수 있게 된다. 너무 빨리 가면 아무것도 못 보게 된다. 그저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갈 뿐 …. 그렇게 아무것도 보지 않고 느끼지 못하고 ‘그곳’에서 난 무엇을 하려 했던 것일까. 8년 만의 여행. 일을 위한 것이 아니고 아무도 돌보지 않아도 되는 나만을 위한 여행이 얼마 만인가. 나를 들여다보고 내게 말을 거는 여행은 참 오랜만이다. 나이가 들어 여행하는 것은 그 반대의 경우와 참 다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만큼 느낄 수 있는 면적이 커진다는 걸 의미한다. 아는 것만큼 보이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스펀지처럼 쏙 빨아들인다면, 나이가 들면 아주 천천히 넓게 느끼고 곱씹게 되는것이다.

사람이 좋다
안나푸르나에 오르는 첫날. 내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사람’이다. 4,130미터에 첫발을 딛었을 때 길의 ‘숲 냄새’보다 ‘사람 냄새’가 먼저 다가왔다. 그곳이 어디든 삶이 있다는 것, 잊고 있었다. 그 높은 산을 오르려 세계각지에서 온 사람들, 그들의 짐을 이고 지고 가는 짐들, 산을 개간하여 먹고사는 사람들, 산으로 온 사람들을 위해 로지에서 일하는 사람들…. 그들 모두 산사람들이다. 어깨에 이고 등에 진 짐꾼들의 짐을 보며 문명세계에서 며칠간 ‘산사람’이 되어보려 하는 ‘우리’들은 얼마나 불필요한, 필요한 게 많은지 생각해본다. 똑같이 8일을 산에 머무를 저 산사람들의 짐은 작은 배낭 하나를 채우지도 못했는데, 난 왜 저 많은 것을 들고 왔을까? 결국 그것들은 문명세계에 길들여진 우리들의 소비욕 혹은 소유욕의 배설물에 불과하다. 부끄러워진다. 나의 사소한 욕심이 저 포터들의 어깨를 더 무겁게 만들었구나 싶어 더 부끄러워진다. 내가 지고 갈 짐이었다면 저렇게 싸 짊어지고 왔을까 싶어서 더 부끄러워진다. 여행은 낯선 곳으로 떠남을, 낯선 사람들을 만남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을 의미하기도 한다. 내겐 낯선 그들, 그들에게 낯선 나. 셰르파인 그들은 우리를 보호하지 않는 것처럼 보호를 하며 정상으로 이끈다.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며 다른 여행과 달리 아주 천천히 묵직하게 우리는 서로 친구가 된다.

순응
내려오는 길은 길 위에서 만난 많은 사람과 사물들을 다시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다. 여기서 그런 사람의 사진을 찍고, 여기서 그 사람과 그런 대화를 나눴다. 오르는 것보다 내려오는 것은 더 쉽기 때문인지, 이제 현실로 돌아가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생각해보면 정말 하루 10시간 넘게 걷던 지난 며칠이 꿈만 같다. 내려오는 길에 마주치는 힘들어하며 오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그때의 나를 본다. 상황이 사람을 얼마나 다르게 만드는지,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드는지…. 어떤 상황 속에 갇히지 않게 노력해야겠다. 언제나 내 상황에 급급하여 불같이 화를 내고 그러곤 미안함을 느끼던 나를 조금 내려놓아야겠다. 나의 잣대로 사람들을, 상황들을 가두지 말아야겠다.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 그게 내가 연습해야 할 과제다. 많이 걸어야겠다. 삶이라는 ‘산’속으로도 많이 걸어야겠다.

삶에 떠밀리는 것이 아니라 내 발을 한발한발 생각하며 옮기는 삶을 살아야겠다. 내려오면서 문득 오르면서 끊임없이 가졌던 ‘왜 오르는가’에 대한 답이 떠오른다. 무념무상 끊임없이 걸으며 이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어지럽게 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진정 걷는 것에만 집중하게 되는 그 순간에 우린 무념무상의 순간에 몰입하게 된다. 그것이 산에 오르는, 며칠에 걸쳐 산에 오르는 이유이다. 적어도 이번 산행에서 내가 얻은 답이다. 산에서 가장 강력한 적응은 순응이란다. 난 산악인은 아니지만 참 공감 가는 말이다. 자연은, 산은 내가 바꿀 수 없다. 순응, 이번 산행으로 배운 말이다.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 비겁한 게 아니다.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 그것이 순응이다.

40인승 포카라에서 내려 이제 카트만두행 네팔 아그니에어 706편에 몸을 실었다. 이륙장에서 날아오른다! 후텁지근한 날씨보다 더 뜨거운 비행기 안이다. 언제 다시 어떤 인연의 끈으로 다시 이 곳으로 오게 될지, 아니면 내 인생 영원히 단 한 번뿐인 안나푸르나 등반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난 지금 아쉬움보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가득 차 있다. 누구나 각자의 무게로 삶에 짓눌려 있을 때,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님을 느낄 때 여행을 꿈꾼다. 아니 나는 그렇다! 내 시간과 시간 사이 여백이라곤 없어 숨쉬기조차 곤란했다. 더 이상 내 삶에 나를 구속시켰다가는 스스로에게 사형 선고를 내릴 것 같아 여행을 결정했다. 그것도 나를 더 극한으로 내몰아 나를 비우기 위해 고난의 여행을 선택했던 거다. 어떤 여행이든 모든 여행은 축복이다. 비록 후유증으로 없던 편두통이 이틀 내내 나를 괴롭혀도 난 지금 새털만큼 가볍다. 출장 때 늘 모자라던 ‘딱 하루’도 이번만큼은 충분하다. 서울로 돌아가면 난 다시 늘 그래왔던 ‘나’로 돌아가겠지만, 남들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아주 조금은 변해 있을 거다. 그리고 다음 여행을 꿈꿀 것이다. 현실의 삶들이 나를 늪처럼 끌어안고 있어 자주 떠나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늪에서 어렵게 발을 빼내 여행을 떠나고 돌아오며 나의 변화를 소의 되새김질처럼 되새길 때. 비로소 이번 여행이 얼마나 나를 변화시켰는지 느끼게 될 것이다. 지식뿐만 아니라 삶의 지혜를, 아니 그런 것 필요하지 않다. 변화하고 진화하고 있음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또 다음 여행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