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루어>의 9주년에 나무액터스의 뿌리 깊은 배우들이 함께 했다. 배우이자 한 사람으로서의 내면을 고요하게 들여다보는 흑백 영화 뒤엔 그들의 영화적 열정을 응축해 담은 또 한 장의 영화가 있다. 무성과 유성, 흑백과 컬러, 장르와 장르를 오가며 완성된 영화적 순간들.



세트와 조명을 잠시 바꾸는 때였다. 먼지 날리는 스튜디오의 가장 구석에 잠시 앉았다가 이번 영화는 잘 나왔냐고, 영화에 대한 가장 가벼운 이야기를 던졌다. 그러자 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태종은 세종을 왕으로 앉히고 싶어 하잖아. 하지만 셋째 아들이잖아. 나, 황희는 아니다. 장자인 양녕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귀양을 가. 왕은 패기가 있어야지 방 안에서 책 좀 본다고 군주는 아니라는 거지. 세속적인 법을 지키라고 태종한테 반기를 들다가 찍혀서 저 구석으로 쫓겨나. 그런데 막상 세종도 왕 되는 게 싫다 이거야. 그래서 한국판 <왕자와 거지>가 되어서 거지 같은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거야. 그러다 황희한테 밥을 얻어 먹으러 왔는데 보니까 많이 보던 얼굴이야. 그래서 황희가 “나는 너같이 생긴 놈을 제일 싫어한다” 고 한다고…” 그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고, 그 한 편의 영화가 모노드라마 형식으로 펼쳐지는 동안 그는 별다른 제스처도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목소리만으로 모든 스태프가 그 영화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모두 황희가 백성들에게 나눠 줄 쌀을 훔치기위해 담을 넘기도 한다는 그 영화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꼭 보러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백윤식은 올해 칸에 다녀왔다. 대배우를 알아본 사람들은 그에게 회고전을 권했다. 아마 그의 회고전이 열린다면 정말 다양한 장르가 버라이어티하게 펼쳐질 것이다. 그나저나 최고로 멋지게 진행되고 있는 필모그래피 중에서 도대체 개막작, 폐막작으로 무엇을 선정해야 할까? “고르기가 너무 힘든데. 우선 <지구를 지켜라>. 큰 흥행성적을 거둔 건 아니지만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작품이야. 무엇보다 내가 정말 좋아해. 영화사 쪽에서는 <나는 왕이로소이다>도 넣어줘야 한다고 하겠지만 안 돼. 내가 조금밖에 안 나왔어. 주지훈이 좋으라고? 내 것을 가지고 해야지. 그럼 아마도 <그때 그 사람>을 빼놓을 수 없지.”

명실상부 이 시대 최고의 배우다. “종래에 없는 재미있는 캐릭터를 하니까 영화 쪽 제의가 많이 오더라고. 젊었을 때 영화로 데뷔했는데 <멋진 사나이> 같은 작품들로. 그러다가 끊어졌었지. 잘못하면 일회용이 될 수 있는 캐릭터도 많아. 주는 떡이라고 다 먹을 수는 없잖아. 나의 특성도 일부분 비춰지는 것을 가지고 골라야지. 그래서 많이 발을 담글 수는 없더라고.”

슈트와 리넨 셔츠, 행커치프 모두 빨 질레리(Pal Zileri). 시계는 벨앤로스(Bell&Ross).


그러고 보니 우리가 백윤식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계기가 바로 <지구를 지켜라>였다. 백윤식은 ‘내 안에 있는 것을 빼먹기만 하는’ 작품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본능적으로 소모되는 것을 피한다. 그래서 그는 모든 작품에서 백윤식으로 남을 수있었다. 백윤식의 태종, 백윤식의 윤 회장, 백윤식의 강 회장, 백윤식의 황희. <지구를 지켜라> 때는 감독과 대표, 피디가 함께 책을 들고 만났다. “그때 차승재 대표가 장준환 감독이 천재라고 하더라고. 책을 받아서 읽어 봤는데 그런데 팬티 하나걸치고 머리 깎이고 물고문에 고생은 엄청 하겠더라고.” 하지만 이미 좋은 작품을 알아 보는 배우의 본능이 빛났다. 외계인과 인간을 오가는 그 혼신의 연기를 그는 ‘생체 리듬의 연계’라고 불렀다. 그냥 이루어진 것이 절대로 아니라고.

검은색 셔츠와 팬츠 차림의 백윤식은 그 나이대 남자 배우의 중후함 대신 우아함과 여유, 유머가 넘친다. 그 매력에 우리는 바짝 다가선다. 게다가 대단히 날렵한 몸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센 역할을 맡기고 싶나봐. 전혀 안 그럴 것 같은 분위기의 배우가 그런 상극되는 연기를 하면 효과가 더 큰 거지. 감독들은 그런 임팩트를 생각해. 전혀 살인과 상관없을 것 같은 배우가 살인을 하면 관객이 볼 때 느끼는 임팩트가 다를 테니까.”

영화감독들은 점점 더 백윤식을 원한다. 한 감독은 사석에서 그에게 ‘영감을 주는 배우’라고 고백했다. 립 서비스였을 수 있지만 배우가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였다고 백윤식은 말했다. ‘연기를 잘한다’라는 게 너무 익숙해진 대배우에게는 더 특별한 게 필요하다. “나는 작품 할 때마다 배를 탄다는 생각을 해. 드라마 작업, 영화 작업은 유토피아를 향해서 가는 거야. 이왕이면 낙원으로 가면 좋지. 흥행도 되고 작품성도 인정받고. 하지만 이것까지는 못 가도 무인도라도 가면 되는 거야. 난 감독에게 이야기해. 파라다이스는 못 가더라도 암초에만 부딪히지 않게 해달라고. 감독이 곧 항해의 선장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