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지 않아서 행복하다는 느림보 섬, 증도로 떠났다. 양파 밭고랑을 지나고 소금 밀대를 밀고, 갯벌에서 짱뚱어와 칠게를 쫓아 다니는 사이 하루는 햇볕과 바람 속으로 증발해버렸다.

1. 증도를 둘러싼 크고도 넓은 갯벌. 증도를 여행하는 사이 갯벌의 여러 풍경에 대해 알게 되었다. 화도의 갯벌은 갯골이 깊다.해질녘 갯벌은 고요해 보이지만, 그 안의 짱뚱어와 게는 온통 소란하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생명의 소리가 들린다.2, 4. 우전 해수욕장 옆 갯벌에는 짠물에서 사는 염생식물이 잘 자란다. 퉁퉁마디로도 불리는 함초는, 증도에서 약처럼 귀하게여기는 식물이다. 3.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천일염 염전인 태평염전. 멀리 수차가 보인다.

1. 증도를 둘러싼 크고도 넓은 갯벌. 증도를 여행하는 사이 갯벌의 여러 풍경에 대해 알게 되었다. 화도의 갯벌은 갯골이 깊다.
해질녘 갯벌은 고요해 보이지만, 그 안의 짱뚱어와 게는 온통 소란하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생명의 소리가 들린다.
2, 4. 우전 해수욕장 옆 갯벌에는 짠물에서 사는 염생식물이 잘 자란다. 퉁퉁마디로도 불리는 함초는, 증도에서 약처럼 귀하게
여기는 식물이다. 3.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천일염 염전인 태평염전. 멀리 수차가 보인다.

커다란 지도를 펴놓고 남쪽 끝자락으로 쭉, 하지만 땅끝 해남까지는 가지 않고 목포 조금 위에서 바다 쪽으로 한 뼘 옆쯤 있는 섬. 갯벌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고 햇볕과 바람이 얼마나 좋은지, 매일 소금이 자란다. 본래 물이 적은 섬이라서 시루의 방언인 ‘시리섬’으로 불리다가 시루를 본뜬 ‘증’을 써서 증도가 된 섬. 느림의 미학을 인정받아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슬로시티’가 되었고, 느린 것이 장점이며 앞으로도 계속 느릿느릿하게 살 거라고 주장하는 그 섬으로 여행을 떠났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의 바지선은 육지에서 차량까지 통째로 싣고 증도로 나르는 게 일이었다. 그러나 다리 하나가 놓이면서 증도는 달라졌다. 배 때를 기다리는 대신 언제고 원한다면 드나들 수 있는 섬이 된 것이다. 여행하는 입장에선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일. 그 혁혁한 공을 세운 증도대교 입구에는, 이곳 명물인 칠게가 집게 다리로 담배를 들고 있는 커다란 모형이 몇 개 서 있다. ‘담배 없는 섬’을 알리는 표지판이다. ‘슬로시티’로 지정된 증도는 몇 가지 캐치프레이즈를 갖고 있다. ‘자전거 섬’, ‘쓰레기 없는 섬’, ‘담배 없는 섬’이 그 것. 담배 없는 섬을 만들기 위해서 섬의 그 어떤 가게도 담배를 팔지 않고, 쓰레기 없는 섬을만들기 위해서 증도를 찾는 사람은 어른 2천원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입장권과 함께 쓰레기 종량제봉투도 하나씩 준다. 증도 여행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이 쓰레기봉투를 채워 ‘슬로 시티’의 달팽이 로고가 선명한 쓰레기통에 투척하면 입장료를 환불해주니 너무 아까워하지 말기를. 그 덕분인지 증도는 유독 깔끔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땅 반, 바다 반
증도에는 마을 사람들과 여행자들이 만나는 로컬 마켓 ‘녹색시장’이 있다. 증도에서 길러낸 농산물도 팔고, 볏짚에 둘둘 감아 구운 낙지호롱 냄새가 폴폴 난다는 이 시장은 매주 토요일 짱뚱어광장에서 열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요즘은 휴무다. 왜? 농번기라서. 마을 어른들이 농사일을 하느라 바빠도 너무 바쁘다는 뜻이다. 아닌 게 아니라 올여름 유행인 프린트 룩을 시종일관 ‘몸뻬’로 선보이는 이곳 어르신들은 햇볕을 등에 엎은 채 밭일, 논일에 분주하시다. 양파는 수확해야 하고 논에 벼도 심어야 한다. 수확기와 모내기가 겹쳤으니 일년 농사가 다 여기 달렸다. 무안과 지척인 증도는 그 유명한 양파의 고장이다. ‘양파 수확철에는 양파 차량에게 길을 양보합시다’라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을 정도이며, 눈이 닿는 곳마다 양파다. 동글동글한 양파는 흙에 횡대로 드러누워서 제대로 일광욕 중. 손 빠른 집은 벌써 붉은 망자루에 가득 담아 농협 수매트럭을 기다리고 있고, 어떤 집은 담는 중이며, 어떤 집은 양파를 흙에서 파내느라 정신이 없다. 증도는 섬이면서도 농경지가 풍부하다.

척박해서 주민 대부분이 바닷일에 종사하는 여느 섬과는 태생부터 다른 것이다. 증도가 빚어내는 풍요로움과 넉넉함은 땅과 바다에 반반씩 기댈 수 있는 이 자연 조건에서 오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곳 주민들은 삶을 바다와 땅에 골고루 기댄다. 그리고 땅은 다시 주민들에게 아낌없이 돌려준다. 바다와 농촌이 이토록 아름답게 어우러진 증도의 구석구석을 걸었다. 논길을 따라서는 샛노란 금계국이 가득 피었고, 습지에는 하얀 삐비꽃이 가득 피었다. 증도는 축복받은 섬이 분명했다. 신기한 건, 물이 귀해서 ‘시리섬’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치곤 섬 곳곳이 참으로 촉촉했다는 것. 저수지 옆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던 흑염소는 <굼벵이 마을의 염소>라는 메르헨 동화와 겹쳐져서 웃음이 났다. 여기는 느림보 마을이니까.

증도를 걷는 다섯 가지 방법
마음 속 섬의 크기에 따라, 증도는 큰 섬이 되었다 작은 섬이 되었다 한다. 여행의 미학은 일부러 만든 볼거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를 가까이 들여다보는 것이라는 걸 아는 이 지혜로운 섬은 희한한 인공구조물을 만드는 대신 마을을 쉽게 둘러볼 수 있는 길을 알려주기로 했다. 일명 ‘모실길’로 불리는 길은 모두 5개. 증도에 도착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달려가는 짱뚱어다리를 건너 해송숲으로 향하는 길이 가장 대표적이다. 갯벌 위로 해송 숲과 갯벌센터를 연결한 짱뚱어다리는 말 그대로 갯벌 위의 다리다. 하루 두번 밀물과 썰물을 겪으며 시시각각 변하는 갯벌의 풍경과 갯벌 생태계를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냥 진흙 아닌가 싶어 다리 밑을 자세히 보면, 흙이 온통 꼬물꼬물거린다. 흙을 덮어쓴 까닭에 보호색을 띠고 있을 뿐, 짱뚱어는 뚱뚱거리면서 뛰고, 이게 바로 ‘게밭’이다 싶을 정도로 게가 많다. 흰색 장갑을 낀 것처럼 한쪽 집게발만 큰 칠게는 증도에서 주먹깨나 쓰고 있다. 바구니와 삽 한 자루를 들고 나선다면 오늘 식사거리쯤은 문제없겠다. 마을 어르신 말로는, 갯벌마다 잡히는 게 천차만별이다. 어디는 짱뚱어가 많고, 어디는 백합이, 어디는 낙지가 많다는 식이다. 다리 밑 가까운 생태계를 한동안 바라보다 저 먼 곳을 보면, 갯벌은 숭고하게 다가온다. 평탄한 듯 보이는 갯벌 위의 갯골이 자유롭게 기록되어 있다. 자연에는 직선이 없으므로, 그 곡선은 이리 휘고 저리 휘면서 풍경이 된다. 증도에서 가장 유명한 우전 해수욕장은 모래 대신 진흙으로 이루어져 그 위로 자전거나 ATV를 탈 수 있을 정도다. 그 뒤로는 1천 년 된 잘생긴 소나무가 우거진 해송 숲이 가득하다. 그래서 이 길의 이름은 ‘천년의 숲길’이다. 그 다음 ‘노을이 아름다운 길’은 노룻구지를 지나 만들독살까지 바닷가를 따라가는 길로, 모두 1004개의 섬을 가지고 있다는 신안군의 작은 섬들을 볼 수 있다.

바다에 잠긴 중국 송, 원대 유물을 건져낸 것을 기념한 ‘보물유적비전망대’에서 기독교 순교지를 잇는 길은 ‘보물선 순교자 발자취 길’이며 태평염전의 염전 옆을 지나는 길은 ‘천일염 길’, 그리고 갯벌 센터에서 바다 건너 노두길을 지나 화도까지 이어지는 길은 ‘갯벌길’로 불린다. 이 길을 전부 이으면 곧 증도가 된다. 거의 한 곳도 빠지지 않고 둘러보게 되는 셈이다. 걷는 대신 자전거를 타도 좋다. 시간당으로 빌릴 수도 있고, 하루를 온전히 빌려도 1만원 밖에 하지 않으니까. 증도 곳곳에 놓인 벤치의 양 옆은 자전거 바퀴를 따서 만들었다. 이 벤치의 뒤는 자전거 거치대다. 언제든 자전거를 묶어놓을 수 있도록 만든 벤치다.

만약 이 섬을 좀 더 들여다보고 싶다면, 마을 주민들이 직접 운영하는 여행사 ‘길벗’의 문을 두드리길. ‘증도 주민이 직접 운영하는 사회적 기업 여행사’로 우리나라 공정여행의 한 획을 그은 길벗 여행사는 마을 주민이 가이드가 되어 섬 이곳저곳을 안내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냥 둘러보는 여행이 아닌 최고의 가이드와 증도의 구석구석을 다니며 체험 여행, 생태 여행을 할 수 있는 길벗 여행은 가족 여행이나 팀 여행일 때 더 좋겠다. 12인승 친환경 전기차를 빌려 증도의 곳곳을 오갈 수 있고, 독살로 물고기를 잡거나 백합을 캘 수 있고, 바다낚시를 할 수도 있으니까.

1, 5. 태평염전의 모습. 본래 두 개였던 증도는 염전을 조성하면서 한 섬이 되었다.여행자들과 탐방객들로 늘 붐비지만 항상 친절하다. 2. 우전 해수욕장의 상징이 된파라솔과 선베드. 3. 증도에서 수평선과 지평선을 실컷 봤다. 4. 섬의 곳곳에 핀 장미.6. 증도와 화도를 잇는 노두길. 밀물이라 물이 차올랐지만, 썰물 때가 되면 거짓말처럼갯벌이 된다. 7. 화도 반올림 식당의 백반과 산낙지 한 접시.

1, 5. 태평염전의 모습. 본래 두 개였던 증도는 염전을 조성하면서 한 섬이 되었다.
여행자들과 탐방객들로 늘 붐비지만 항상 친절하다. 2. 우전 해수욕장의 상징이 된
파라솔과 선베드. 3. 증도에서 수평선과 지평선을 실컷 봤다. 4. 섬의 곳곳에 핀 장미.
6. 증도와 화도를 잇는 노두길. 밀물이라 물이 차올랐지만, 썰물 때가 되면 거짓말처럼
갯벌이 된다. 7. 화도 반올림 식당의 백반과 산낙지 한 접시.

화도, 고맙습니다
증도에서 이어지는 또 다른 섬, 화도를 알리는 방향마다 드라마 <고맙습니다>가 함께 따라온다. 증도 곳곳에는 이 드라마를 추억하는 푯말이 가끔씩 눈에 띈다. <고맙습니다> 촬영지 2.2km, <고맙습니다>이쪽 방향… 한때 제주를 휘덮은 <올인> 푯말처럼 질색해야 할 일인데, 거슬리지 않고 다정해 보인 건 자꾸 들어도 좋은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가진 마법 때문이었다. ‘어른을 위한 동화’를 표방한 이 드라마는 우리나라의 하고많은 섬 중, 증도와 화도를 파고들었다. 섬이면서도 척박하지 않고, 섬이면서도 풍요롭지만 여전히 소박한 아름다움을 갖춘 곳이니까.

모내기가 한창인 논두렁 밭두렁 사잇길을 지나면 금세 다시 갯벌과 바다가 나온다. 증도와 화도를 연결하는 건 돌을 쌓아 지지대를 만든 노두길이다. 물이 차오르면 다리를 건너지 말라는 푯말에 겁이 난다. 설마 저 섬에 들어갔다가 못 나오 건 아닐까? 섬에 전화를 넣어서, 다시 증도로 나오는 건 문제가 없다는걸 확인하고서야 건넜다. 사실 말은 내가 했고 섬 아주머니는 “이에? 이에이에~”만 해주었지만.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는 ‘시골 섬’ 화도. 만약 섬마을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가지고 있다면 바로 이 곳일것 같다. 옹기종기 모여 있다가 다시 흩어지는 가옥들에는 집집마다 주인 취향의 꽃과 나무를 심어놓았다. 노랗게 주름진 꽃을 피운 호박도 정취를 더하고, 집 옆 텃밭에는 보라색 가지꽃도 피었다. 이곳에서 몇 달을 먹고 자고 했다는 드라마 촬영팀이 마침내 부러워졌다. 아직 휴가철이 아닌 섬에는 주민들과 나만 있었다. 예약을 하지 않으면 밥을 안 주는 반올림 식당에 백반을 주문해놓고 섬을 다녔다. 이곳에 ‘빈집 갤러리’가 있다는데 신기하게도 마을 어르신 중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 결국 3G망의 힘을 빌려, ‘이렇게 파란 지붕을 가진 집에 사진이 많이 걸려 있어요’라고 사진을 보여드리니, 손에 든 낫을 휘두르며 곧장 그 집으로 안내하신다. “나도 말만 들었지 첨 본디야.” 입구에 커다란 무화과 나무가 자라는 이 빈집은, 살고 있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며 ‘빈집’이 되었지만 지금은 갤러리로 쓰고 있다. 이곳에 전시된 것은 다름아닌 마을의 역사다. 지붕만 보고 이 집을 찾아준 화도식당 주인 아주머니는 사진만 보고 누가 누군지 대번 맞힌다.

잘생긴 무화과 나무 잎사귀마다 사람들이 소원을 적은 노란 쪽지가 달려 있다. 빈집은 늘 사람들이 찾아와 빈집이 아니다. 섬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녔는데도 아직 밥상이 안 나왔다. ‘성질 급한 도시인’ 본능을 다시 ‘느림보섬 정신’으로 다스린다. 이곳은 손님이 있어야만 밥을 한다. 그래서 예약을 하지 않으면 밥을 못 얻어 먹는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미리 해놓고 그릇에 담아 보온통에 쌓아 묵힌 밥은 맛이 없으니까. 그렇게 묵힌 밥이 끝까지 남으면 다시 낼 수도,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 사람에 7천원씩 받는 백반 밥상은 황송하다. 모두 이곳 바다와 섬의 땅에서 거둔 것들이다. 매일 바다에 나가는 아저씨가 잡아온 자연산 숭어와 광어를 넣은 매운탕에 갯벌에서 거둔 게로 담근 간장게장과 작은 굴을 손수 무친 젓갈, 빠질 수 없는 양파김치와 갓김치, 푹 익은 묵은 김치, 매콤새콤하게 무친 꼬시래기가 한 상에, 섬에서 자란 고사리도 올라왔다. 여기에 갯벌에서 막 잡아들인 산낙지회나 낙지볶음, 소라무침, 회 등을 곁들일 수 있다. 특히 산낙지는 한 번 시도해보길. 이곳의 산낙지는 꿈틀대는 것이 아니라 막 튀어오른다. 지금까지 먹은 산낙지가 빈사상태였다면, 이곳의 낙지는 쓰러진 소도 다시 일으키고도 남는다.

화도에 머문 두 시간 사이, 노두길까지 찰랑찰랑하게 차오르던 바닷물은 신기하게도 저 멀리 달아나 다시 광활한 갯벌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위로 슬며시 해가 진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길 위에 잠시 섰다. 갯벌에 집을 둔 온갖 생명이 살아 있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자글자글 자갈이 굴러가는 소리 같기도 하고, 후두둑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같기도 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바위에 붙어 있는 삿갓조개와 바다고둥이 잠시 정지한 사이, 못생겨도 너무 못생긴 짱뚱어와 온갖게, 깊이 숨어든 낙지와 갯지렁이들이 움직인다. 땅과 바다의 경이로움이 이곳에 다 있었다. 싫은 건 없고 좋은 곳만 있는 느린 섬, 고맙습니다.